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11
#310화
스스스슥.
천력부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산적들의 숫자는 오백을 헤아렸다.
그러나 주화란의 얼굴이 차갑게 굳은 것은, 그들의 수가 압도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세가 달라.’
산을 넘으려는 자와 막는 자. 표국과 녹림은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다.
매번 칼을 빼 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표국 측에서는 일정 금액의 통행료를 지불하고, 녹림 또한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 서로의 체면을 지키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그러나 천력부와 그가 이끄는 흑석채의 산적들에게서는 물러서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끝내 피를 볼 생각이군요.”
주화란의 말에 천력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린 년이 눈치가 제법이로구나. 맞다. 내 오늘 흑석산을 피로 물들일 생각이니라.”
“어린 년?”
“왜, 마음에 안 들면 늙은 년이라 불러 주랴?”
“나는 용봉표국의 소국주. 내가 당신에게 하듯, 당신도 예의를 갖추세요.”
붓으로 그린 듯한 주화란의 아름다운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용봉표국의 무남독녀지만 금이야 옥이야 자란 것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검을 휘둘렀고, 표사들과 함께 길에서 먹고 자며 보고 배웠다.
사람들은 강북삼화라며 주화란을 떠받들지만, 그녀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
“맹랑한 년이로고. 싫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렇다면…….”
비수를 숨긴 꽃, 은비화(隱匕花) 주화란이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죽어야지, 어린 년한테.”
“뭐라? 으허, 으하하하하!”
천력부의 광소가 멎은 것은 잠시 후였다.
“생각보다는 강단이 있군. 마음에 들었다.”
“늙은 산적 놈 마음에 들어 봤자 기쁘지도 않아.”
“혓바닥이 제법 맵구나. 뒷일이 걱정되지 않느냐?”
“도대체 왜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거지?”
“왜냐니. 산적이 죽이고 빼앗겠다는데 별다른 이유라도 필요한 것이냐?”
천력부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주화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녹림맹의 입장도 곤란해질 텐데.”
“곤란해져?”
“우리 용봉표국 또한 정파의 일원. 정파 무림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정파의 일원이라. 그럼 곤란하지.”
천력부가 덥수룩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도록 애써 볼 생각이다. 모든 비밀은 새어 나가지 않으면 그만 아니겠느냐?”
“……!”
살인멸구(殺人滅口).
천력부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주화란은 검파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총표두 허준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백 냥! 길을 터 준다면 은자 백 냥을 주지. 오늘 일은 불문(不問)에 부칠 테니 이쯤에서 멈추게!”
“허어. 백 냥이나? 그것도 은자로?”
“물론. 내가 지금껏 허언을 한 적이 있던가?”
“그건 아니지. 우리가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허 표두라면 충분히 믿을 만해.”
총 표두 허준은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용봉표국에 몸담았다.
용봉표국은 섬서에 기반을 둔 대형 표국. 그곳에서 크고 작은 수백 회의 표행을 성공시킨 그는 흑석산을 자주 넘나들며 녹림의 채주들과 안면을 텄고, 오 년 전 새롭게 채주가 된 천력부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통행료의 다섯 배야. 짓궂은 장난은 그만하고 이만 길을 터 주게.”
“짓궂은 장난이라. 그렇게 보였나?”
너털웃음을 터트린 천력부의 얼굴에 돌연 한기가 서렸다.
“사람을 병신으로 봐도 유분수지. 이봐, 허 표두. 값은 제대로 쳐야지.”
“가, 값을 제대로 치다니?”
“지금 운송 중인 표물에 천년설삼(千年雪蔘)이 있다는 건 우리 산채에서 기르는 개새끼도 알아. 당장 장물로 팔아 치워도 은자 수천 냥은 너끈히 받아 낼 물건이지. 안 그런가?”
“……!”
그 순간, 주화란과 허준을 포함한 몇몇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년설삼은 완전히 소화한다면 능히 일 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 있다는 영약.
종남파에서 비밀리에 의뢰한 천년설삼의 존재는 용봉표국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특급 기밀 사항이다.
그런데 어찌 천력부에 귀에 들어갔단 말인가.
‘우연이 아니었어.’
주화란의 뇌리에 지난 넉 달간의 표행이 스쳤다.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 덤벼들던 산적들과 이름 모를 낭인들.
크고 작은 수십 회의 전투를 치르며 큰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이유는 바로 천년설삼에 대한 정보가 흘러 나갔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누가?’
설마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애써 의심을 억눌렀다.
지난 이 년간 겹치고 겹친 악재에서 그녀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은 바로 주위의 사람들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가장 큰 재산.
용봉표국이 과거의 위상을 잃고 점점 기울어지는데도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실패를 겪는 자신에게 아낌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런 이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의심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화란은 공허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그녀만큼이나 큰 배신감을 느낀 채 굳어 버린 총표두 허준. 그리고 천년설삼의 존재를 아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용봉표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세 명의 표두. 이른바 용봉삼표(龍鳳三鏢)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석칠. 노필중.’
마흔 줄에 접어든 두 명의 중년 표두를 스친 주화란의 시선이 마지막 한 사람을 향했다.
‘송일섬.’
송일섬은 용봉삼표의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제 갓 이립을 넘긴 젊은 나이의 그는 십 년 전 용봉표국에 표사로 입문하여 승승장구했다.
간혹 거친 성미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뛰어난 무공으로 표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에 젊은 나이임에도 용봉삼표로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송일섬에게는 무성한 뒷말이 따라다녔다.
‘낭인 출신이래. 그것도 해결사.’
‘보수만 받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다더군.’
‘그뿐인가? 아가씨를 깊이 연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 지난번 시비인 미향이가 알려 줬는데, 틈만 나면 내원으로 들어와 정원을 서성거린다더라고.’
‘표국에 들어온 이유도 아가씨 때문이라던데……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국주님께서 표사 사윗감을 원하지 않았나.’
주화란도 알고 있었다. 송일섬을 둘러싼 공공연한 소문을. 그리고 그들의 말이 대부분 사실임을.
가끔 느껴지는 송일섬의 노골적인 시선에 마음이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 표행에 그를 기용할지 고민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설마 송 표두가…….’
주화란의 시선이 송일섬의 얼굴에 머무른 바로 그 순간, 사나워 보이는 그의 굵은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번쩍, 쐐애애애액!
“화란아!”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송일섬의 소맷자락에서 한 자루의 비수가 튀어나온 것. 동시에 총 표두 허준이 다급하게 주화란의 앞을 가로막은 것.
마지막으로…….
푹!
“커헉, 크르륵.”
이십여 장 밖. 목에 비수가 꽂힌 흑석채의 산적 하나가 풀썩 고꾸라진 것.
피거품을 토해 낸 산적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은 장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침묵을 깨트린 것은 송일섬의 한 마디였다.
“문답무용!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라!”
사나운 외침이 밤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가자 주화란과 허준, 그리고 용봉표국의 모두는 깨달았다.
이미 협상은 물 건너갔다는 것을. 뜻하지 않게 선공을 당한 수백의 적들과 목숨을 건 일전을 펼쳐야 한다는 것을.
“송일섬! 이게 무슨 짓이냐!”
총 표두 허준의 창노한 외침에 송일섬이 유엽도(柳葉刀)를 들어 어깨에 척 걸쳤다.
“뭐 하는 짓이긴. 이제 와서 그걸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지 않소?”
“네놈……!”
“그의 말이 맞아요.”
주화란은 덤덤한 목소리로 검파를 잡았다.
애석하게도 송일섬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력부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손 쓸 새도 없이 수하 하나를 잃은 그의 부릅뜬 눈에서는 화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조리 도륙을 내 주마.”
츠츠츠츠!
늘어트린 거대한 도끼에서 붉은 기가 넘실거렸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속해 있는 녹림맹. 그중에서도 서열 이십 위의 절정 고수가 바로 천력부였다.
우두머리의 기세에 힘입은 오백 명의 녹림도 또한 산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전부 죽여!”
“이 자리가 네놈들 무덤이다!”
그 성난 외침을 들으며 주화란은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곳이 마지막 표행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남아 있는 칠십여 명의 인원 중 쟁자수를 제외한 표사의 숫자는 고작 사십여 명.
모두가 오랜 표행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천력부와 오백의 녹림도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조건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두두.
수백의 발걸음에 땅이 진동한다. 피하고자 했으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남은 건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뿐.’
한 사람이라도 살려 보내야 한다.
주화란이 고개를 바로 하려던 그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캄캄한 밤하늘에 수놓아진 많은 별 중에서도 유독 밝게 빛나던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 광채를 뿌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모두 싸우지 마세요!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싸우면 큰일 나요!”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이내 수백 명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홱 돌아갔다.
온통 어둠에 잠긴 세상.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네 사람의 신형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이내 두런두런 들려오는 목소리들.
“쟤들 뭐야?”
“산적 같은데요. 한쪽은 표국 사람들 같고.”
“아니, 누가 봐도 산적이긴 한데. 왜 하필이면 이 오밤중에 여기에서 싸우고 있냐고.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보다 바빠 보이는데요?”
“무진이 맞은 지 오래됐니?”
“아뇨. 한 식경 전에 맞았는데요.”
빡!
“기방아. 쟤들 누군지 아냐?”
“물론.”
“도와줘요, 스피드 개방.”
“깃발을 보아하니 용봉표국이로군. 다른 한쪽은 천력부가 채주로 있는 흑석채고.”
“둘 다 처음 듣는데. 이상하게 천력부는 귀에 익네.”
“용봉표국은 한때 강호 십대 표국에 이름을 올린 곳이고, 녹림 서열 이십 위권의 절정 고수다. 한 자루 도끼를 귀신처럼 다루는…….”
“아니, 잠깐만. 설마 그 천력부?”
“천력부를 알고 있나?”
“분명히 죽였는데…… 환생 버스라도 탔나. 기다려 봐. 잠깐 얼굴 좀 보고 올게.”
“은인! 환생 버스가 뭐에요?”
“심심하면 횡단보도 건너 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그리고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터벅거리는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림자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저게 뭐야.’
‘새파랗게 젊은 놈인데? 등에는 웬 지게를 매고 있지?’
그것은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두운 밤, 병장기를 든 채 대치 중인 수백여 명의 사람들. 그리고 달빛을 받으며 산보 하듯 걸어오는 지게를 맨 청년.
저벅, 저벅. 턱.
“바쁘신데 잠깐 실례.”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때가 꼬질꼬질한 산적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주화란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몸을 배배 꼬더니, 마지막으로 천력부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고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 새끼 아닌데?”
“……!”
“……!”
폭탄 같은 한 마디에 수백 쌍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녹림맹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절정 고수인 천력부에게 새끼라니…….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던 그때,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다.
“아, 네가 걔구나. 진짜 천력부.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 근데 너도 뭐, 소문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천력부의 안광이 불처럼 솟구쳤다.
“이, 이런 미친놈이!”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도끼가 청년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쐐애애액! 쾅!
웅축된 기(氣)의 격돌.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도끼날을 막아낸 것은 낭창한 연검이었다.
다급하게 공격을 막아 낸 주화란의 팔목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 또한 절정에 이른 검수. 그러나 타고난 힘과 경륜을 지닌 천력부를 당해 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흡! 소협. 어서 도망……!”
“이 어린 년이 감히!”
카가가각!
두 날붙이가 맞물리며 불똥이 튀었다. 서서히 짓눌러 오는 거대한 도끼.
허준과 송일섬이 주화란을 돕기 위해 쇄도한 그때, 굳은 듯이 서 있던 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한마디만 해 줘요.”
“……네?”
“도와주세요. 그 한마디만.”
제정신인가?
순간 주화란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천력부의 공격에 반응하지도 못한 청년. 그녀가 연검으로 막아 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양단되어 죽었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별개로 그녀의 입은 한마디를 토해 내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보였다.
청년의 입가에 맺힌 희미한 미소가.
이어 그녀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퀘스트 수락.”
화르륵!
난데없이 불어닥친 열풍(熱風)에, 주화란은 한없이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