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14
#313화
화산일학 백무성.
섬서 땅에, 아니 무림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천검진인의 적전 제자이자 어린 시절부터 화산파의 미래라 불려왔던 백무성이다.
귀가 밝고 말 많은 호사가(好事家)들 사이에서는 검성의 막내 제자에 관한 소문이 돌았지만, 그런 그들조차 백무성이 훗날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듣자 하니 화산신룡의 무위가 이미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뛰어넘었다더군. 역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다워.”
“그래도 차기 장문인은 누가 뭐라 해도 화산일학이지. 백무성은 그릇이 달라. 장문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타고났다고.”
“그건 그렇지. 무공이 부족해, 아니면 사람이 부족해? 그가 아니라면 누가 장문인이 된단 말인가?”
서안루의 일 층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대화의 주인공이 자신들의 등 뒤로 지나가고 있음을.
“백 대협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협이라니, 과분한 말씀 거둬 주십시오.”
“아닙니다. 대협을 대협이라고 부르는 것뿐인데 무엇이 과분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호위장의 뜨거운 눈빛에 백무성은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에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검성 매종학의 은거 이후 주춤했던 화산파의 입지가 올라갈수록 백무성의 부담감도 더해 갔다.
‘장문인이라니.’
삼십 대 초반에 불과한 백무성에게는 멀고도 무거운 이름이었다.
내심 고개를 내젓던 그때 호위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입니다.”
“여기는…….”
“섬서 제일이라 자부하는 저희 서안루에서도 단 한 곳밖에 없는 별채지요.”
옥석(玉石)으로 장식한 정원, 온갖 고급스러운 집기로 가득 찬 내부를 둘러본 백무성이 난색을 표했다.
“죄송합니다만, 별채를 이용할 만큼의 돈이 수중에 없습니다. 대신 조용한 방 하나만 내어주시겠습니까?”
“하하, 역시 듣던 대로 검소하시군요.”
호위장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주(樓主)께서 누누이 말씀하시길, 화산파에서 손님이 오시거든 일체의 비용도 받지 말고 극진히 모시라 하셨습니다.”
“루주께서 말입니까?”
“예, 작년 가을에 종남파와 모종의 문제가 있었는데, 화산파의 도움으로 잘 해결되었지요. 매화삼절(梅花三絶)의 다른 두 사제분께서 큰 활약을 해 주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폐관 수련 도중에 벌어진 일이라 잘 몰랐습니다.”
“사실 저도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 근무하게 된 지 이게 겨우 달포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하하.”
백무성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년간 그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천고의 기재라 할 수 있는 청풍, 그리고 진태경과의 만남은 백무성에게 있어 큰 충격인 동시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일 년간의 폐관 수련을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
수련 도중 얻은 깨달음은 백무성을 전보다 더 강하고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화산파의 위치 또한 일 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종남의 속가제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관부조차 문제가 생기면 화산을 먼저 찾을 정도였다.
‘만약 사부님께서 보낸 서신이 사실이라면 그럴 수밖에.’
지금으로부터 닷새 전, 스승인 천검진인이 보낸 전서응에는 놀라운 소식이 적혀 있었다.
소림에서 벌어진 혈겁, 법왕 굉도의 죽음. 그리고 수십 년만에 부활하는 신(新) 무림맹의 맹주로 검성 매종학이 물망에 오르내린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하간 주위에서 온통 난리입니다. 제 벗들도 물어보더군요. 자식이 무공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화산파 속가제자로라도 들어갈 수 없겠느냐고요.”
호위장의 은근한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백무성이 쓰게 웃었다.
얼핏 봐도 불혹은 넘어 보이는 나이. 자식을 화산파에 입문시키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백무성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글쎄요, 인연이 닿으면 그리될 수 있겠지요. 허나 굳이 무공을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나이에는 건강하게 자라는 것으로 족한 것을.”
“……그렇습니까.”
호위장의 실망한 표정에 백무성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귀하가 곧 불어닥칠 혈풍(血風)을 알고 있다면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았을 겁니다.’
소림의 혈겁에 관한 소문은 이미 알음알음 새어 나갔다.
그러나 암천의 존재는 여전히 극소수만이 아는 특급 기밀. 그 몇 안 되는 이들에 속한 백무성은 직감했다.
곧 무림에 피바람이 불어온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수천, 수만의 병장기가 주인과 함께 땅을 뒹굴 것이다.
부모 잃은 자식의, 자식 잃은 부모의 통곡이 사방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을 겁니다. 내가, 화산이.’
무림에 속한 모두가 백무성과 같은 마음일 터.
갑자기 무거워진 그의 분위기에 호위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총관은 어디 있느냐! 총관!”
“소협, 총관께서는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고정하시고…….”
“고정? 내가 이따위 홀대를 받았거늘, 지금 고정하게 생겼느냐!”
“마, 말씀드렸다시피 별채는 이미 찼습니다. 특실로 안내해 드릴 테니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시끄럽다! 내 오늘은 반드시 별채를 써야겠으니 당장 비켜라!”
“아이고, 소협!”
쾅! 우지끈!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점점 가까워지는 고함. 호위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제 수하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별말씀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무리 손님을 까다롭게 가려 받더라도 서안루 또한 기루다. 꽃밭에 온갖 벌레가 끼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나저나 정오밖에 안 되었는데, 꽤 취한 것 같군요.”
“종종 있는 일이지요. 어느 대갓집 자제인 것 같은데, 잘 수습해서 돌려보낼 터이니 백 대협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무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글쎄요. 여기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평범한 대갓집 자제는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의문을 표하던 호위장이 멈칫했다. 멈추지 않는 소란과 더불어 빠르게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림인!’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 속,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내원을 지키던 호위 무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멈추십시오!”
“이곳부터는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서안루는 고관대작들도 드나드는 만큼 호위의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류 무인들인 그들조차 취객의 난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낭인 출신 밑바닥 삼류들이 어딜 감히…….”
“헛!”
쉬쉭, 퍼버버벅!
무사들의 짧은 경호성, 빠르고 강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자 별채 밖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비틀비틀, 거친 걸음걸이가 침묵을 몰아내며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저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순식간에 일류 무사 여섯을 쓰러트리다니.’
고수, 그것도 절정 고수다.
호위장이 굳은 얼굴로 검파에 손을 가져가려던 그때, 백무성이 작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제가 나서야 할 것 같군요.”
“백 대협, 그건…….”
“괜찮습니다. 몇 차례 면식이 있는 사이니, 제 체면을 봐서라도 물러나 주겠지요.”
“그 말씀은…….”
“선대부터 내려온 인연이 있습니다. 아, 물론…….”
백무성이 볼을 긁적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 썩, 화목한 인연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
그때 호위장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종남파라는 세 글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떠오른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호, 혹시?”
서안루의 호위장이 된 지 이제 겨우 보름 남짓. 하지만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종남파라는 출신만큼이나 대단한 성미의 소유자.
표정을 일그러트린 호위장이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꽈앙!
단단한 흑목(黑木)으로 만들어진 별채의 문이 박살 나며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의 청년을 향해 백무성이 싱긋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그와 동시에.
“당신이 왜 여기 있지?”
종남일룡(綜南一龍) 혁소평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 *
“와아! 와아아!”
“제발 소리 지르지 마.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은인! 저기 당과!”
“그놈의 당과는 시부럴 거. 당과 안 질려?”
“네!”
“그럼 그냥 아예 가게를 차려!”
“그럼 당과 장수 아저씨랑 사천까지 같이 가도 돼요?”
“아니, 미친…….”
“저기 소면 팔아요! 소고기로 육수를 냈대요!”
청풍 너란 새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새끼…….
나는 길거리 좌판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던 청풍의 뒷덜미를 재빨리 낚아챘다.
“제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람답게만 살자. 사람답게!”
“당과, 소면…….”
“아, 조금만 참으면 배 터지게 먹여 준다고!”
“정말요?”
“몇 번을 말했잖아. 그러니까 제발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와라. 응?”
물론 내 돈으로 먹이는 게 아니라 화산파 돈이지만, 엎어치나 메치나 거기서 거기지 뭐.
‘원래는 여기도 그냥 지나갔어야 했는데.’
본래 일정대로라면 서안에 들를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떠나기 전 화산파 장문인인 천검진인으로부터 서안에 들러 달라는 부탁도 받았고, 청풍의 고향이니 겸사겸사 지나가게 되었을 뿐이다.
칠주야 가까이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않은 채 강행군을 했으니 하루만이라도 대접받으며 푹 쉬고 싶기도 했다.
‘화산일학 백무성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일 년도 넘었다.
적천강을 따라 안휘로 떠나기 전, 백무성이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언제든지 섬서에 오면 연락 주십시오. 제가 제대로 대접하지요. 하하.’
풀 코스로 모신다는 말에 이놈 혹시 부산 사람인가 싶었지만 아주 허언(虛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그나저나 서안루가 어디야.”
지나가던 행인을 붙잡고 물어본 바에 의하면 대로를 따라 쭉 걸으면 된다고 했는데, 뭔 놈의 거리가 이렇게 붐비는지 도무지 끝이 안 보인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 때가 시커멓게 낀 손가락이 저 멀리 보이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곳이 서안루다.”
“어디? 어, 진짜네. 어떻게 알았냐?”
미래의 왕초 거지 궁기방이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최고의 구걸 장소거든. 남아서 버리는 음식도 산해진미 수준이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드나들다 보니 적선도 많이 한다. 거지라면 모를 수 없는 곳이지.”
“…….”
알고 보니 개방의 핫 플레이스였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안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 열 명이 동시에 드나들어도 될 만큼 커다란 정문에 도착하자, 서안루 소속으로 보이는 호위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뭐야. 쉬는 날이에요?”
“그게 아니라. 영업 도중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통곡하기 직전의 청풍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호위 무사에게 말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오늘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백무성이라고. 이름 대면 알 거랬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금은…… 예? 지금 백무성 대협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화산일학 백무성이요.”
청풍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백 사질! 어디 있나요, 백 사질! 내 꼬르륵 소리 들리나요!”
그런 우리를 번갈아 보던 호위 무사가 굳게 닫혀 있던 정문을 잽싸게 열어젖혔다.
“지금 즉시 별채로 모시겠습니다!”
뭐야 이거.
갑자기 반응 왜 이래.
‘백무성이 노쇼라도 했나?’
내 예상은 틀렸다. 거의 날 듯이 달려가는 호위 무사를 따라간 그곳에는, 거의 초토화 된 별채와 검을 빼 든 백무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이거 완전.
‘진짜 풀코스네.’
드러워서 무림인 못 해 먹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