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18
#317화
“아.”
깜빡이는 긴 속눈썹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주화란은 잠에서 깬 후에도 침상에 누운 채 한참이나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그녀와 용봉표국은 마침내 서안에 닿을 수 있었다.
천력부가 이끄는 흑석채는 이번 표행의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그들은 안전한 번화가를 지나 서안의 후미진 객잔에 행낭을 풀었다. 객잔에는 침상은 물론 따뜻한 음식과 목욕물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화란은 모든 표물을 빠짐없이 점검한 다음 쓰러지듯 잠이 들었었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이곳은 안전하다. 산길을 막아서는 산적도, 정체를 숨기고 무리 지어 습격하던 낭인들도 없다. 이번 표행의 주목적이었던 천년설삼(千年雪蔘)을 종남파에 넘기기만 하면 끝이다.
용봉표국은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모두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서른세 개의 유골함과 함께.
‘서른셋…….’
주화란의 눈동자가 문득 희미하게 깜빡였다.
서른세 개의 유골함, 서른세 사람의 얼굴, 그들과 울고 웃었던 기억이 눈앞을 스쳤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옷소매로 눈가를 문지른 주화란이 자신을 두 뺨을 강하게 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흐트러진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온다.
“이제 시작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표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종남파와 약조한 기한까지는 사흘이 남았고, 그 안에 천년설삼을 무사히 전달해야만 표행이 끝난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
주화란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품 안을 더듬었다. 단단히 밀봉된 목곽(木槨)을 꺼내어 확인한 뒤에 다시 집어넣어 끈으로 고정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천고의 영약, 천년설삼이 목곽 안에 들어 있었다.
“흐트러지지 말자, 주화란. 이제 겨우 한 걸음이야.”
주화란이 스스로를 향해 다짐하던 그때였다.
“화란아, 일어났느냐?”
문밖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옷매무새를 다듬은 주화란이 대답했다.
“네, 허 숙부. 들어오셔도 돼요.”
“그럼 잠시 실례하마.”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총표두 허준이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정보다 빨리 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씀은…….”
“종남파가 서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구나.”
“종남파가요?”
“그래. 그것도 태을무정검(太乙無情劍)이 직접 왔다고 들었다, 하하하.”
웃음을 머금은 허준과는 달리, 주화란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종남파가, 그것도 태을무정검이 서안까지 직접?’
귀환이 앞당겨졌으니 원래라면 허준처럼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 종남파가 보여 온 오만무례한 태도를 생각할수록,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허 숙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응? 이상하다니, 무엇이 말이냐?”
“예정된 기간까지는 아직 사흘이나 남았어요.”
“사흘밖에 안 남은 거지. 서안에서 종남산까지는 천천히 이동해도 이틀이면 충분하다.”
“숙부께서 종종 그러셨죠. 무림에는 우연이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무림이라고.”
“화란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허준의 눈빛에 주화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종남파는 우리 용봉표국을 은연중에 적대해 왔습니다. 이번 표행이 실패하는 걸 누구보다 원하고 있을 거예요. 일부러 어려운 조건을 내걸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하지만 받아들였지. 훌륭하게 해냈고.”
종남파가 요구한 조건은 까다로운 것이었다. 오죽하면 종남파의 이름에 혹해서 몰려든 다른 표국주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의뢰를 포기했을 정도다.
그들이 원하는 기한 내에 천년설삼을 운송해 주지 못하면, 표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위약금으로 물어내야 하니까.
하지만 주화란은 고심 끝에 종남파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이유는 단 하나, 용봉표국의 비상(飛上)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천년설삼에 관한 정보가 유출된 것이 원인이었다.
주화란은 바보가 아니다. 아직은 경륜이 부족할 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생각할 줄 아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지금까지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의심이 서서히 실체를 갖추는 기분이다. 주화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어쩌면 종남파가…….”
“그만.”
주화란의 말을 가로막은 허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만하거라.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나, 그 이상은 터무니없다. 아니, 위험하기까지 해.”
“하지만.”
“종남파에 관한 소문은 익히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표국을 키우기 위해 우리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 화란이 네가 말하려는 것은…… 위험한 억측이야.”
“허 숙부…….”
“숙부로서, 용봉표국의 총표두로서 부탁하마. 너와 표국을 위험에 빠트리지 말아라.”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늘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의숙부다.
그런 그가 작심한 듯 굳은 얼굴로 말을 쏟아내자 주화란은 더 이상 종남파에 관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는 주화란의 어깨를 허준이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말이 심했다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제가 좀 과민했나 봐요.”
“그럴 만도 하지. 종남파가 안 하던 짓을 했으니. 당주나 총관도 아닌 태을무정검을 보낼 줄이야.”
종남파 장문인의 두 사형 중 한 사람.
늘 본산에 머무르며 두문불출하는 태을무정검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종남제일검(綜南第一劍).’
종남파가 배출해 낸 초절정 고수. 천하삼십육검의 극의를 이뤘다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검공의 소유자가 바로 태을무정검이었다.
장문인인 풍운검군에 비견될 만한 거물이 직접 나선 것에는 분명 큰 의미가 있을 터였다.
주화란은 그것이 가장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하필 태을무정검일까요?”
“마음이 급해서겠지. 종남이 천금을 들여 천년설삼을 구했던 이유가 노호검객의 내상 때문이니 말이다. 하나뿐인 사형이 그리되었으니 그 속이 오죽하겠느냐?”
일견 듣기에는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주화란은 수년 전, 아버지인 주호군에게 들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셨지.’
그녀의 아버지는 군자검이라 불릴 정도로 인자한 사람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관대한 주호군이 그리 말할 정도라면 태을무정검은 그의 검공만큼이나 날카로운 인물이 분명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자.’
생각을 정리한 주화란이 허준에게 물었다.
아직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을 향한 질문이었다.
“송 표두는 어떻던가요?”
“아, 그게 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허준이 대답했다.
“믿을 만한 표사들을 시켜 밤낮으로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화란이 너도 알다시피 어젯밤은 모두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시선을 뗐군요.”
“면목이 없구나. 더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다.”
멋쩍게 시선을 피하는 허준의 모습에 주화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출신도 명확하지 않고 세간의 평가도 좋지 않은 송일섬은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특히 진태경을 만난 직후부터는 그를 향한 의혹이 짙어지고 있었다.
‘잘 지켜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허준은 분명 좋은 사람이다. 삼십여 년을 용봉표국에 몸담으며 주호군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종종 보여 주는 허술한 면모들이 크고 작은 실수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차피 천년설삼은 그녀의 품 안에 있다.
주화란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종남파가 어디에서 접선하자고 하던가요?”
“서안에서 서쪽 끝에 있는 등왕루라는 다루(茶樓)에서 정오까지 만나자고 하더구나.”
등왕루라면 주화란도 간혹가다가 들렀던 유명한 다루다.
보는 눈도 많고 분위기도 조용하니 표행을 마무리 짓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일각 후에 출발할 테니 준비해 주세요.”
* * *
백무성이 서안루로 찾아온 것은 한창 짐을 싸고 있던 때였다.
“정말 바로 떠나십니까?”
“저도 며칠 더 묵고 싶긴 한데, 아시다시피 일정이 좀 빡빡하네요.”
“아쉽군요. 가능하다면 본산에 모시고 싶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들를게요. 그때 화산 구경이나 한번 시켜 주세요.”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제대로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또 나왔다. 풀코스 발언.
사실 풀코스는 기대도 안 한다. 다음에 만날 때는 이번처럼 누군가와 박 터지게 싸우고 있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호탕하게 웃는 백무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말이라도 꺼내 봐야 하나. 용봉표국과 종남파에 관해서.’
잠시 고민하던 그때 백무성이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
“진 소협?”
“아, 아닙니다.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시벌, 모르겠다.
어차피 종남파나 용봉표국이나 따지고 보면 내게는 생판 남일 뿐이다. 어떤 분쟁이 있더라도 그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이런 문제까지 신경 쓰는 건 괜한 오지랖이다.
‘여긴 무림이니까.’
나는 내심 중얼거리며 적천강을 지게에 앉혔다. 그리고 모피를 집어 하나씩 그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왜 주화란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스치듯이 보고 지나친 송일섬이라는 놈도 함께.
‘지금 생각해 보면 수상쩍은 놈이었어. 궁기방보다 더 구린내가 풍겨.’
용봉표국과 종남파의 관계를 알게 되니 그놈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녀석의 레벨은 무려 110. 이 정도면 십봉룡 정도는 뼈째로 발라 버릴 수 있는 실력이다.
얼굴을 보니 기껏해야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어느 문파의 누구일까.
‘혹시 종남파가 보낸 암살자? 아냐, 그건 너무 갔나.’
단순히 주화란의 미모에 반해서 눌러앉은 놈인가?
아니, 그랬으면 본인 실력을 감출 이유가 없잖아. 주인공이 힘을 숨김. 뭐 그런 거야? 힘을 숨긴 찐따가 구해 주면 더 멋있어 보이나?
‘주화란. 말은 몇 마디 안 섞어 봤지만 착해 보이던데. 말투도 시원시원하고.’
그 나이에 절정까지 무공을 익혔을 만큼 무재도 뛰어나다.
그리고 또, 또…… 그래. 웃을 때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가 예뻤다.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도.
지금 생각해 보니 고양이를 닮은 외모다. 나 예전부터 동물 중에는 고양이가 제일 좋았는데.
“저기, 조장님?”
“어, 응?”
고개를 돌려보니 혁무진이 날 해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녀석뿐만 아니라 궁기방, 청풍, 심지어 백무성까지 그렇다.
“뭐야, 다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음. 그게요.”
혁무진이 조심스럽게 손으로 지게를 가리켰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저러다간 적 대협께서 질식사하실 것 같은데요.”
“헉!”
나는 어느새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피를 휙휙 내던졌다.
혼수상태에서 그분을 뵈러 갈 뻔한 적천강이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 은인! 저랑 똑같네요!”
“지금 나한테 욕한 거지?”
“앗. 아아. 그런 거 아닌데…….”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청풍을 무시하고 다시 모피를 쌓았다. 왜소한 적천강의 체형이 금방 감춰진다.
나는 바람이 충분히 통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지게를 짊어졌다.
“자, 준비 끝났으면 슬슬 출발하자.”
우리는 서안루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로 붐비는 서안의 번화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백무성이 입을 열었다.
“배웅이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허락하지 않으시겠지요?”
“어차피 나중에 볼 얼굴인데요, 뭘.”
“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이만. 강녕하십시오, 청풍 사숙.”
“잘 가요, 백 사질!”
결국 말은 꺼내지도 못하는구나. 그래, 이걸로 된 거다.
훈훈한 분위기 속, 나 혼자 찜찜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그 얘기 들었나? 종남파의 태을무정검이 서안에 있다는군.”
“뭐? 태을무정검이? 대체 무슨 연유로?”
“난들 아나. 서쪽에 있는 등왕루로 가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어. 듣기로는 용봉표국과 만난다는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천천히 멀어진다.
나는 청풍에게 물었다.
“청 소협.”
“네, 은인.”
“차 마셔 봤어?”
“네! 마셔 봤어요!”
“아냐. 당신 아직 차 안 마셔 봤어.”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