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23
#322화
일 년 만에 만난 월화는 오히려 그 전보다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화려한 복장과 매혹적인 미소.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우아하게 다가온 그녀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우리 진 공자님.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지셨네?”
이런 부분은 변하지 않았군.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밀어 냈다.
“여전하시네요.”
“섭섭해. 일 년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야?”
“음. 좀 더 예뻐지신 것 같기도 하고.”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긴 한데…… 좋아요, 이 정도면 합격.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온 보람이 있네.”
특유의 눈웃음을 찡긋거리는 월화의 옆으로 남루한 차림의 청년 거지가 떨떠름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엔 개방도를 상징하는 매듭이 세 개로 나뉘어 묶여 있었다.
즉, 개방의 삼결제자인 셈이다.
“개방 서안 분타를 책임지고 있는 흑걸개요.”
“예, 저는 태원진가의…….”
“이미 알고 있소. 듣던 대로 헌앙하군. 그 얼굴로 구걸하면 하루에 은자 수십 냥은 거뜬히 벌겠는데. 혹시 개방에 입문할 생각 없소?”
“…….”
“뭐, 싫으면 마시고. 그나저나 이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놈이 안 보이는 것 같소만.”
후욱, 후욱.
거센 콧김을 뿜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흑걸개가 표적을 발견하고 외쳤다.
“궁기방! 이 쳐 죽일 놈아!”
저 자식은 언제 저기로 간 거야?
어느새 멀리 떨어진 탁자 밑에 웅크리고 있던 궁기방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앗, 나의 이십 년 지기 왕코가 왔구나.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냐?”
“왕코라고 부르지 말랬지! 그리고 어쩐 일이긴, 천하의 빌어먹을 놈아. 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신당부했건만 기어코……!”
흑걸개가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조각을 맹렬하게 흔들었다.
필요한 정보들을 챙겨서 등왕루로 오라는 내용의 글 아래에는, 지나가던 동네 똥개에게서 뽑아낸 싯누런 털 여덟 가닥이 붙어 있었다.
남들이 보면 저게 뭔가 싶겠지만, 궁기방의 말에 의하면 저게 개방의 팔결제자(八結弟子). 즉, 후개의 표식이란다.
“크흠, 나도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러네.”
“니미럴. 이번 일로 법개(法丐) 어르신이 찾아오면 다 네놈 때문인 줄 알고 있어라.”
“어허, 삼결제자 주제에 말이 많다. 후개 어르신을 보필하지는 못할망정.”
“이거 순 후개가 아니라 후 개새끼일세.”
말은 저렇게 해도 손을 뻗어 궁기방이 빠져나오기 쉽도록 의자를 빼 준다.
대화를 들어 보건대 새끼 거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인 모양이었다.
‘더 잘됐네. 일이 쉽게 풀리겠어.’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영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일그러진 황보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당겨졌다.
“초면이면 인사라도 나누시죠. 두 분 다 섬서성에서 아주 큰 일을 하시는 분들인데.”
화산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종남파가 섬서성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개방과 하오문의 분타주라면 황보엄이 모를 리 없지. 그냥 기분 잡치라고 한마디 더 보탠 거다.
“……네놈.”
내 예상대로 이미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는 황보엄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이, 당장 탁자 옆에 세워 둔 검이라도 뽑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그래, 차라리 뽑아라.’
하지만 황보엄은 노호검객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게냐?”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내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게요. 저도 우리 진 공자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기대가 돼서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불쑥 입을 연 월화를 향해 황보엄이 눈을 치켜떴다.
“하오문이 끼어들 자리가 아닐세. 그대가 어떤 연유로 이 자리에 왔는지는 모르나…… 이쯤에서 빠지는 것이 좋을 것이야.”
“황보 대협. 죄송하지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네요.”
월화가 화사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의뢰를 받아들였거든요. 물론 의뢰인은 여기 계신 진태경 공자님이시고. 맞죠?”
“어우, 그럼요. 점소이를 통해 보낸 선수금은 잘 받으셨어요?”
“당연히 받았지. 그런데 은자 한 냥은 너무 짜다. 나중에 두둑하게 받아 낼 테니까 각오해요.”
도대체 얼마나 두둑하게 뜯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정답게 말을 주고받는 나와 월화를 말없이 노려보던 황보엄의 다음 표적은 흑걸개였다.
“개방은 어쩔 셈인가?”
“황보 대협, 지금 상황이 참.”
이가 바글거리는 머리를 긁적이던 흑걸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소인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것이 개방의 뜻인가?”
화들짝 놀란 흑걸개가 허리를 굽실거렸다.
“예에? 어이구, 아닙니다요. 저 같은 삼결제자 따위가 어찌 감히 개방의 뜻을 대변하겠습니까.”
“그럼 물러가게. 본문과 척을 지기 싫다면.”
“그런데 이게, 저희 쪽에도 방규(方規)라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변명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안 그래? 아니, 안 그렇습니까. 후개?”
궁기방이 황보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어, 그렇지.”
“개방의 후기지수라 하여 노부가 사정을 봐주었건만, 보자 보자 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황보엄이 벼락처럼 외쳤다.
“더 이상의 변명은 집어치워라! 개방은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쿵!
황보엄이 노호성과 함께 탁자 중앙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나직한 울림, 웅혼한 공력을 견디지 못한 탁자가 그의 손바닥 모양으로 뻥 뚫린다.
그리고…….
“허어.”
“이거 참.”
그 순간. 굽실거리던 궁기방과 흑걸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땟국물 가득한 얼굴을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이, 기방이. 우리가 정말 거지이긴 한가 봐. 여기서도 거지 취급을 받는 것 보면.”
“그러게 말이다. 오늘따라 기분도 거지 같은데, 확 그냥 섬서성 거지들 싹 다 불러모을까.”
“그건 분타주인 내가 해야지. 당장 서안에 있는 놈들만 모아도 얼추 천 명은 될걸?”
“삼결 주제에 어딜. 나 팔결이야. 개방에 하나뿐인 팔결! 후개가 부른다고 하면 옆 성에서까지 달려온다.”
“섬서가 아주 거지 소굴이 되겠군. 그쯤 되면 구걸이 아니라 약탈 아니냐?”
“어허, 약탈은 무슨. 내 듣자 하니 종남산에 먹을 게 그렇게 많다던데…… 이참에 먹을 수 있는 건 씨를 말려 버리자고.”
알리바바와 사십 인의 도적도 아니고 궁기방과 일만 거지라니.
개방이 십만 방도를 보유한 대방파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지릴 것 같다.
‘최소 메뚜기 떼.’
일만 거지가 종남산을 휩쓸면 한 달 안에 산이 아니라 사막이 될 거다. 산짐승의 전멸은 당연하고, 먹을 수 있는 풀이며 나무껍질까지 싹싹 벗겨 먹을 테니까.
“네, 네놈들 지금 무슨 망발을…….”
황보엄의 주름진 손이 부르르 떨렸다.
“노부가 그 꼴을 두고 볼 성싶더냐! 너희 두 녀석의 처벌을 방주에게 직접 요구할 것이다!”
“뜻대로 하십시오. 사부님께 죽도록 얻어맞겠지만, 뭐 설마 하나뿐인 제자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허나…….”
슬금슬금 발만 빼던 그 녀석이 아니다. 어느새 궁기방의 목소리는 늪보다 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개방의 후개로서 서안 분타에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후개의 명령을 물릴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오직 두 분, 십만 방도를 이끄시는 용두방주(龍頭幇主)와 방규를 집행하는 법개뿐입니다.”
“……!”
“제 사부이신 용두방주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집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고. 황보 대협께서는 거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겁니다.”
역시 베테랑 거지.
저렇게 멋있으면서도 없어 보이기도 쉽지 않은데, 저걸 이렇게 거뜬히 해 버리네.
‘구걸 좀 하는 놈인가.’
비장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와 없어 보이는 내용으로 좌중을 압도한 궁기방이 흑걸개를 향해 물었다.
“서신으로 일러두었던 것은, 다 챙겨 왔겠지?”
“후개의 명이신데 어련할까.”
흑걸개의 손짓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안 분타의 개방도들이 들고 온 죽간들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 개수가 무려 일백 개.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뭐 하니? 이제 일 시작해야지.”
월화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하오문도들이 종이 뭉치를 죽간 옆에 내려놓는다.
그 개수 역시 개방의 것과 비등한 수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황보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이게 무엇이더냐?”
나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죽간과 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짚이는 것 없으세요? 예를 들면…… 지난 이 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용봉표국의 악재라든가.”
“……!”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과거를 되짚어 보자고요. 거기에 더해서, 잘 오고 있던 천년설삼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는지도.”
두 사람의 기운이 연어처럼 힘차게 퍼드득 뛰었다.
당황에 휩싸인 황보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주화란이었다.
그 어떤 분노도, 흥분도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영롱한 눈동자가 황보엄을 향했다.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군요.”
“알고 있었습니까?”
“모를 수가 없었어요. 내심 짐작하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는 구파일방이니까요.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허공에 맥없이 흩어졌다.
지난 이 년간 종남파는 암중에서 용봉표국의 실패를 조종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고작 이 년 만에 그녀가 표국을 무너트렸다 하겠지만, 그 말은 틀렸다.
용봉표국은 이미 기울어지고 있던 배였고, 주화란은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그 배의 선장이 되었다.
종남파라는 거대한 괴물의 위협에도 지금껏 꿋꿋이 버텨 낸 것은 그녀의 능력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고생 많았습니다.”
내 한 마디에 주화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울음이 아닌 웃음이었다.
“고마워요, 진 소협. 하지만 그 말은 이 표행이 끝난 뒤 들을게요.”
맞다. 주화란의 말처럼 용봉표국의 표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흑걸개와 월화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작하시죠.”
* * *
황보엄은 문득 생각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모든 것이 술술 풀려 가고 있었다. 지난 이 년 동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고 남은 것은 종지부뿐이었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작년 여름, 용봉표국은 금오상단과의 거래가 실패함으로써 은자 천 냥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황철심이라는 자가 비밀리에 개입했는데, 본문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는 종남의 속가로서…….”
황보엄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하오문과 개방이 파악한 정보는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정보를 대조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또 새로운 일들을 밝혀 냈고 정보는 식물의 줄기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건 말도 안 돼.’
석상처럼 굳은 채 같은 생각만을 반복하던 황보엄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솟구친 입꼬리. 사람의 마음을 속속 들여다보는 듯한 투명한 눈동자.
진태경은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모두 저놈 때문이다. 저놈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사람들은 말했다. 태을무정검 황보엄은 그의 두 사형제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틀렸다. 지금 이 순간, 황보엄의 머릿속은 분노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냉철한 독심(毒心)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보다 더한 살심(殺心)으로 가득찼다.
“노옴-!”
스르르릉!
허공섭물.
황보엄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간 검집에서 은빛 선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