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24
#323화
그 모든 일은 찰나에 일어났다.
대기에 스며들어 있던 기운이 요동쳤고, 탁자에 기대 놓았던 검이 한 사람의 손아귀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슈아아악!
눈부신 빛줄기가 눈 앞을 가렸다. 더할 나위 없이 빠르고 정확한 일격.
검신을 감싼 푸른 기운의 결정체가 휘황한 빛을 뿌린다. 그 빛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검강(劍罡).’
초절정이라는 위대한 경지에 발을 디딘 자들에게 허락된 권능.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보다 강력한 그것이 내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한없이 느려진 세상 속, 내가 움직임과 동시에 검강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콰아아아!
모든 것이 갈라졌다. 탁자도, 의자도,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다루의 바닥도.
뒤이어 검강이 불러온 광풍이 주위를 휩쓸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굉음이 사방을 집어삼킨다. 그 너머로 노인의 부릅뜬 눈동자가 보였다.
“네, 네놈이 어떻게…….”
나는 순간적으로 품에 끌어안았던 주화란을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 내며 대답했다.
“어떻게 피하긴. 보이니까 피한 거 아니겠습니까.”
“……!”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초절정은, 검강은 인외(人外)의 영역이라고.”
황보엄의 주름진 얼굴 위로 감출 수 없는 충격이 드리운다.
“그, 그렇다면 설마 네놈이……!”
“글쎄요.”
흐릿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쯤 황보엄의 머릿속에는 벼락이 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만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공이 아닌 신체의 능력 자체가 인외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해야 옳겠지.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초절정 고수(물리)?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로운 형태의 초절정 고수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하니까 되던데요.”
황보엄이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믿을 수 없다! 너 같은 어린놈이 어찌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이냐!”
“믿을 수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 이런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다니. 제정신이세요?”
“그건…….”
덜컥 굳은 황보엄의 눈동자가 좌중을 훑었다.
다행히 나만을 정확히 노렸기에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경악과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정파가 어쩌고, 대종남파가 어쩌고 하더니 꼭지 한 번 도니까 마두가 따로 없네. 차라리 이참에 종간나 파로 이름 바꾸는 게 어떻습니까.”
“놈……!”
검 자루를 쥔 황보엄의 손아귀가 부르르 떨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갈등하던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종남파의 제자들은 명을 받들라.”
“예, 옛!”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석상처럼 굳어 있던 서른 명의 태을검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포권을 취하는 그들의 머리 위로 황보엄의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 즉시 출입구를 봉쇄하라. 그 누구도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사, 사숙!”
“그, 그것은…….”
“무엇 하느냐! 노부의 명을 어길 셈이더냐!”
황보엄이 노호성에 태을검대가 멈칫거리던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예, 어길 셈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황보엄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혁소평, 네놈이 감히…….”
낯익은 녀석이었다. 종남일룡 혁소평.
그는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눈빛으로 황보엄을 응시하며 말했다.
“멈추십시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청드립니다.”
“무어라?”
“이건, 지금 사숙께서 보이는 모습은…… 대종남파의 제자가 할 짓이 아니지 않습니까.”
“닥치지 못할까!”
콰아아아!
다시 한번 휘몰아친 광풍에 혁소평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그러나 녀석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혁소평과 머뭇거리는 서른 명의 태을검대를 번갈아 바라보던 황보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이놈들이.”
그리고 다음 순간, 황보엄이 품에서 자그마한 동패(銅牌)를 꺼내어 혁소평의 발아래에 던졌다.
“네 사부가 노부에게 맡기고 간 본문의 장문령부이니라. 이래도 거부할 생각이더냐?”
“……!”
장문령부는 한 문파의 정점에 선 강력한 권위의 상징.
스승의 동패를 확인한 혁소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사숙께서는, 참으로 여전하십니다.”
“양자택일해라. 파문(破門)인지, 아니면 존명(尊命)인지.”
“파문…….”
혁소평의 회한 어린 시선이 나와 주화란에게 닿았다.
이내 쓴웃음을 지은 그가 동패를 향해 큰절과 함께 머리를 찧었다.
쿵! 쿵! 쿵!
“제자 혁소평, 장문령부의 명을 받드옵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 찢어진 이마에서는 핏줄기가 흐른다.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무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혁소평이 다루의 입구를 막아섰다. 서른 명의 태을검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내가 혀를 찼다.
“이 정도면 선을 넘은 게 아니라, 아예 지우셨는데? 이거 뒷감당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화산파와 개방, 하오문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다. 제아무리 종남파라고 하지만 오늘의 후폭풍은 거셀 터.
그러나 이미 꼭지가 돌아 버린 황보엄의 눈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저들은 무사할 것이다. 단, 네놈을 제외하고 말이지.”
“아하. 우선 나부터 처리하고 뒷수습을 하시겠다?”
“그래. 드디어 네놈의 주둥이를 찢을 수 있게 되었구나.”
“왜 이렇게 못 찢어서 안달이 나셨을까, 우리 영감님. 태원진가와 열화문이 무슨 빙다리 핫바지도 아니고.”
“열화문?”
황보엄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 줄기 전음이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 새끼 호랑이가 위기에 처했건만, 대호(大虎)는 깨어날 줄 모르는구나.
“……!”
– 노부가 모를 줄 알았더냐, 어리석은 아해야. 내 이미 화왕의 병세가 깊음을 알고 있었느니라.
극소수만 알고 있었던 비밀이 새어 나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나를 보는 황보엄의 웃음이 짙어졌다.
– 화왕 적천강, 그리고 네놈. 참으로 지긋지긋했지. 이참에 열화문과의 악연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악연을 정리한다고?
황보엄의 한마디에 문득 멍해졌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나?
복잡했던 머릿속이 일순간 깔끔하게 비워졌다. 그리고 하나의 생각만이 남았다.
“미안한데…… 모두에게 부탁 하나만 합시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백무성과 청풍, 궁기방과 흑걸개, 월화와 혁무진. 마지막으로 주화란까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건조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입구를 막아.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먼저 입구를 막은 것은 황보엄이지만, 그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태을무정검 황보엄.”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전에서 끓어오른 극양의 기운이 하얀 김이 되어 흘러나온다.
“당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어.”
고작 이 정도로 적천강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됐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대가는, 지금부터 치르게 될 것이다.
“들어와, 이 좆 같은 늙은이야.”
찰나를 쪼개고 쪼갠 시간 속, 황보엄과 나는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콰아아아아!
* * *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천지 사방을 뒤덮은 검기의 그물은 촘촘하고 강대했다.
일 년 전 상대했던 노호검객과 전날의 혁소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검초가 쉬지 않고 뻗어 나온다.
쉬쉬쉬쉬쉭!
눈이 부실 만큼 빠르고 파괴적이다. 스치기만 해도 살과 뼈가 갈라지고 죽음에 이르게 될 터였다.
이건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었다.
‘그랬겠지. 일 년 전의 나였다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생각난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뜻하는 그 말조차도 내게는 부족하다.
혹독하고도 끊임없는 수련의 나날 속에서 나는 강해졌다. 아니, 그건 진화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너 같은 놈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허탈함이 가득한 적천강의 얼굴이 검기의 그물 위로 덧씌워진다.
나는 나직하게 웃으며 창, 백염(白炎)을 그어 올렸다.
촤아아악!
백염의 창날에 어린 극양의 기운이 그물을 찢었다.
물고기는 찢어진 그물 사이로 도망치겠지만, 나는 물고기가 아닌 한 마리의 상어였다. 그물을 던진 어부는 그 사실을 간과했음이 분명하다.
늙은 어부의 주름진 얼굴에는 경악으로 가득했다.
“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손에 들린 창이 용의 꼬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화룡일미(火龍一尾).’
화아아악! 꽈앙!
푸르게 타오르는 창과 검이 부딪친다. 굉음과 함께 막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온다.
힘을 아끼고자 했던 걸까. 그랬다면 황보엄의 선택은 단단히 어긋났다. 아무리 공력의 소모가 극심했어도 검강을 사용했어야 옳다.
“흡!”
부릅뜬 눈. 인외의 경지에 접어든 근력과 무공 본연이 가진 난폭함에 노인의 신형이 휘청인다.
“이, 이게 무슨 무공……!”
열화문의 개파사조는 당대의 천하제일이라 불렸다.
그는 열화신공을 창안하여 문파의 뿌리로 삼았고, 그 뒤를 이은 열여섯 명의 문주들은 열화신공이라는 뿌리로 각기 다른 가지가 되었다.
화룡신창(火龍神槍)도 마찬가지였다. 5대 문주가 창안한 이 창술은 극도로 파괴적이고 거칠었다. 그야말로 화룡의 움직임과 같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야.’
후우우웅!
나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는 동시에 때렸다.
푸른 화염이 난폭하게 날뛸 때마다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꼬리 다음은 발톱이다.’
천하의 누구도 용이 싸우는 모습을 본 이는 없다.
그러나 화룡신창을 배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용이 발톱을 휘두른다면, 바로 지금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고오오옹.
극양의 기운이 창끝을 휘감는다. 앞서 황보엄의 난동으로 사방에 엎질러져 있던 찻물은 증발된 지 오래다. 옥색 다기는 가마에서 만들어지던 그때처럼, 표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황보엄이 벼락처럼 외쳤다.
“노옴!”
이미 팔순에 가까운 나이. 그러나 초절정의 영역에 들어선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고강한 공력과 일 갑자가 넘는 세월 동안 익혀 온 종남파의 절기가 빛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쐐애애액!
천하삼십육검이 그물이라면, 이건 숨통을 끊기 위한 작살이다.
수십 개 잔상을 흩뿌리며 엄청난 속도로 가슴을 베어 오는 그의 검을 보며 한 가지 무공이 뇌리를 스쳤다.
‘태을분광검(太乙分光劍)’
종남파가 자랑하는 최고의 절기 중 하나.
적천강은 태을분광검을 설명하며 극쾌의 검공이라 했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었지.
‘노부가 노망이 나서 그런가. 난 왜 네 녀석이 검보다 빠를 것 같지?’
적천강이 깨어난다면 대답해 주고 싶다.
당신의 말이 맞았노라고. 또 열화문의 무공이 태을분광검을 깨트렸노라고.
‘천격(天格).’
화룡이 발톱을 휘둘렀다. 하늘에서 내리그어진 일격은, 태을분광검이 만들어 낸 잔상을 지우며 낙뢰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
겁화의 기둥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