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25
#324화
콰아아아!
터져 나온 겁화(劫火)가 채 가시지 않은 초봄의 한기를 살라 먹으며 뻗어 나갔다.
수십 개로 분열되어 어른거리던 태을분광검이 만들어 낸 잔상을 지우고,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검신에 닿았다.
유일한 본질이며 힘의 집약체, 검강과 겁화가 격돌했다.
구구구구궁!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노인과 청년, 두 사람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파가 회오리친다.
바람을 휘감은 푸른 화염이 다루의 천장을 뚫고 용오름 치듯 솟구쳤다.
그 광경에 노인, 황보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화룡(火龍)……!’
황보엄은 자신의 자랑이었던 새하얀 수염이 검게 그을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를 향해 맞댄 병장기 너머, 자신을 노려보는 청년의 타오르는 눈동자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뜨겁구나.’
이 갑자의 공력과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그다.
고강한 무공으로 말미암은 신체는 이미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도달한 지 오래.
하지만 청년의 눈빛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더위라고 부를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분노와 투지.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일말의 냉정함까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새파랗다는 말조차 무색한 어린 아해가…….
“쿨럭.”
주르륵.
황보엄은 메마른 기침과 함께 한 줌의 핏물을 토해 냈다. 그리고 떨리는 눈빛으로 청년의 손에 들린 창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은빛 창날을 휘감은 청백색의 불꽃.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강기(罡氣)였다.
‘아니, 아니다. 놈은 아직 벽을 넘지 못했다. 한데 노부가 어찌…….’
이미 십 년 전, 벽을 넘어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황보엄이었다.
그런데 그 아득한 시간 동안 수련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신이, 아직 절정에 머무르고 있는 어린놈에게 밀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의문에 대한 청년의 답은 짧았다.
“내가 더 강하니까.”
“……!”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맞대고 있던 창날이 엄청난 힘으로 황보엄을 짓눌렀다.
카가가각!
“흡!”
이 갑자의 공력을 쏟아부은 검강? 초절정의 무공?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창날을 통해 전해지는 힘은 인간이 발휘할 수 없는 신력(神力)이었고, 어린 시절 들었던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반고(盤古).’
한 자루 도끼를 휘둘러 세상을 창조했다는 태초의 거인.
눈앞의 청년은 인간의 육신에 신의 힘을 가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은 신력뿐만이 아니었다.
서걱!
초절정 고수의 감각은 일반적인 무림인을 한참이나 벗어나는 법.
그러나 그런 황보엄조차 난데없이 그어진 은빛 선을 피할 수 없었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통증, 이어서 어깻죽지에서 솟구친 핏줄기에 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어느 틈에.’
출수(出手)하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종남파가 자랑하는 극쾌의 검공인 태을분광검도 이와 같지는 않으리라.
팔십 평생 종남파의 무공을 연마한 황보엄이 부르짖었다.
“이럴 수는 없느니라! 이럴 수는!”
콰과광!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리자 검신에 맺힌 강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간신히 압박에서 벗어난 황보엄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청년을 가리켰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알잖아.”
청년, 진태경이 시정잡배처럼 침을 탁 뱉으며 말을 이었다.
“열화문의 십구 대 계승자.”
화르르륵!
투명한 창날에 맺힌 겁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 * *
쐐애애액! 꽈앙!
창날과 검신이 부딪친다.
찰나라고 부를 만한 짧은 순간의 연속. 겁화와 검강이 막아서는 모든 것을 지우며 수십 합을 부딪치고 떨어진다.
쉬쉬쉬쉭! 팡!
까딱, 고개를 비틀었다. 허공을 찌른 검 끝에서 막대한 기파가 터져 나갔다. 삼 장 밖의 기둥이 두부처럼 갈라지며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나뭇조각을 밟으며 몸을 쏘아 보냈다. 가볍지만 무겁게. 부드럽되 거칠게.
그것은 불이 번지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염화일로(炎火一路)의 묘리.’
순간, 붕 뜨는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느려진 세상 속, 나만이 빨려가듯 달려가고 있다. 공기처럼 가벼워진 몸이 총알처럼 쏘아진다.
띠링.
– 깨달음은 여러 방식으로 당신을 찾아옵니다. 끊임없는 수련과 명상, 그리고 생사를 건 싸움.
– [염화일로]의 경지가 칠 성으로 상승했습니다!
– 상당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파아앙!
발끝에서 공기가 터져 나간다. 시스템 알림이 울림과 동시에 내 몸은 황보엄의 코앞에 있었다.
예상치 못한 깨달음과 높아진 속도 때문일까. 창을 뻗기에는 너무 가까워졌다.
나는 물러서는 대신 일장(一掌)을 내뻗었다.
후우웅!
공기를 태우며 나아가는 손바닥. 황보엄이 벼락 같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마주 손바닥을 내뻗었다.
그의 주름진 손바닥에 눈부시도록 푸른 빛이 서린다. 종남파가 자랑하는 벽운천강수(碧雲天剛手)다.
그러나 그가 수강(手罡)을 완성시키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아니.
‘내가 빨랐지.’
후우우웅, 콰앙!
마주친 두 개의 손바닥. 울려 퍼지는 굉음의 뒤로 커헉, 하는 신음이 잇따랐다.
내상으로 안색이 파리해진 황보엄이 이를 악물며 다른 한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파파팟!
다섯 줄기의 지풍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찰나의 순간, 화룡조(火龍爪)로 그의 손목을 낚아채지 않았다면 피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감히 어딜.’
우두둑.
엄지와 검지, 중지를 이용해 틀어쥔 그의 손목을 비틀었다. 억눌린 비명이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태을무정검 황보엄. 그는 얼마 만에 이런 고통을 겪어 보았을까.
무대의 막이 내리면 배우들은 퇴장하는 법이다.
정사대전이라는 무대는 반세기 전에 막을 내렸고, 영웅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 내 눈에 비친 황보엄은…… 영웅이 아니라 치졸한 늙은이다.
‘이건 좀 아플 거야.’
나는 축 늘어진 손목을 놓았다. 동시에 용의 발톱처럼 구부러져 있던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까드득.
수백 근의 철구를 단 채 하루에 수도 없이 한 가지 자세를 반복했다.
하체는 뿌리처럼, 허리는 기둥처럼, 주먹은 정확하고 막힘 없이. 적천강의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위를 부쉈고.’
수백 장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갈랐으며.
‘절벽을 무너트렸지.’
거북이의 그것처럼, 수 없이 터지고 갈라진 손등 위로 청백색 화염이 덧씌워진다.
자세를 취하고, 주먹을 내지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멸염신권(滅炎神拳).’
고오오옹.
극양의 기운이 반경 수 미터의 수분을 모조리 증발시킨다. 가뭄 든 논처럼 쩍쩍 갈라진 황보엄의 입술이 열린다.
“안-!”
“돼.”
대답과 함께 멸염신권을 내질렀다.
초절정 고수의 호신강기가 막아섰으나 그것도 잠시, 그의 전신을 둘러싼 기운을 부숴 버린 일 권이 노쇠한 살과 뼈를 후려친다.
콰지지직!
“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황보엄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세 개의 기둥과 벽면이 무너지고 남아 있던 천장이 와르르 주저앉는다.
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던 그때, 먼지구름 너머로 나를 노려보는 핏발선 눈동자가 보였다.
“쿠, 쿨럭!”
“그냥 누워 있어.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네놈, 네놈이 어찌.”
경악과 혼란, 분노와 치욕감…….
황보엄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종착지는 마침내 하나로 귀결되었다.
‘증오.’
피에 젖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이 주르륵 쏟아졌지만 황보엄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의 눈빛이었다.
“노부는…… 종남제일검이다.”
그 순간, 주위를 감돌던 열풍이 식었다. 이어 차디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한 자루의 검에서 일어난 바람이었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식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건…….”
“태을무형검(太乙無形劍). 똑똑히 보아라. 네놈의 숨통을 끊을 검공이니.”
쉬잉-
검이 움직였고, 바람이 불었다. 검이 바람이었고 바람이 검이었다. 보이지 않은 검격이 바람에 섞여 있었다.
문득, 진한 혈향이 코끝에 맴돌았다고 느낀 찰나였다.
서걱!
옆으로 반걸음. 그 반걸음이 내 목숨을 살렸다.
목덜미에서 흐르는 피를 느낄 새도 없었다. 십여 장 밖에서 황보엄의 검이 진동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검격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를 덮쳤다.
쉭, 서걱!
옆구리가 뜨끔하다. 검격에 실린 기운이 내부를 진탕시켰다.
나는 휘청이는 와중에도 팔을 들어 올렸다.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간 공격이 대들보를 두부처럼 갈랐다.
‘이게 뭐지?’
서걱!
의문을 느낄 새도 없다. 이번에는 가슴이 길게 베였다. 핏줄기가 뿜어져 바닥을 적셨다.
‘보이지 않아.’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기분이다.
이건 근력이나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공, 나보다 더 높은 깨달음을 이룩한 무인이 공력을 폭주시키면서까지 펼쳐 내는 초절(超絶)의 검공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피할 수 있었던 거지?’
순간 뇌리를 잠식한 한 가지 질문.
우뚝 굳어 버린 내 전신으로 수십 개의 검격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넋 나간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동시에 찾아온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무림에서는 눈깔 똑바로 뜨고 살아라. 그럼 칼 맞고 뒈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죽을 위기가 생기면요?’
‘그럼 쓸모없는 눈깔은 뽑아 버리고 마음으로 봐야지.’
‘마음이요? 에이, 그게 어떻게 됩니까.’
‘해 보긴 했더냐?’
네. 했습니다.
아니,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거였군요. 그때 하셨던 말씀이.’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느껴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검격이. 태을무정검 황보엄의 마지막 발악이.
‘가르침 감사합니다. 노야.’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비틀었다. 사지와 미세한 근육 하나를 피아노 음처럼 세밀하게 조율했다.
살에 닿지 못한 검격이 의복을 찢으며 지면을 할퀴었다.
콰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살며시 눈을 떴다. 경악으로 가득 찬 황보엄의 얼굴이 보인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두려움.’
그도 알 것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내게서 느껴지는 공포를.
“오, 오지 마라!”
쉬이익!
한 걸음 내디디며 창을 휘둘렀다. 목을 베어 오던 검격이 창날에 부딪혀 소멸한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쉬쉬쉬슁!
나는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창을 펼쳤다. 튕겨 내고, 가로막고, 마치 살아 있는 적을 처치하듯 꿰뚫었다. 그러면서도 걸음은 쉬지 않았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고, 황보엄은 조급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을 무시하고 최후의 일검을 펼쳤다.
콰아아아!
다루 전체를 먼지로 만들어 버릴 만한 힘이 깃든 검강.
나는 코앞까지 닥친 그것을 바라보다가, 낙뢰처럼 창날을 휘둘렀다.
천격(天格).
화룡의 발톱이 검강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직!
산산이 부서진 검신이 지면을 나뒹굴었다. 넋 나간 얼굴로 자신의 망가진 애검을 바라보던 황보엄이 고개를 들었다.
“너는, 너는 도대체.”
“그러니까 왜…….”
나는 종남파 제일의 무인, 태을무정검 황보엄을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남의 사부를 욕하고 지랄이야.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노인네가. 뒤질라고. 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