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26
#325화
전율.
그건 이 자리의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화산, 개방, 종남, 하오문과 용봉표국까지. 잘게 떨리는 수십 쌍의 눈동자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퍽!
“좋게 말할 때.”
퍽!
“멈췄어야지.”
퍽!
“어디서 선빵을, 선검을 날려?”
뻐억!
마지막 타격음은 유난히도 컸다. 커억,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신형이 털썩 쓰러졌다.
온통 피범벅이 된 얼굴. 한때 숱한 여인들의 방심(芳心)을 흔들었던 날렵한 콧대는 풀썩 주저앉은 지 오래였고, 팔순 나이가 무색하던 고른 치아는 이제 앞니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의 사부를 가지고, 패드립을, 시발 거.”
뻐억!
마지막 앞니 하나가 허공을 훨훨 날아 다루 구석에 떨어졌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들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일어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막 강호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약관 언저리의 청년이, 종남파 제일의 고수이자 장문인의 사형을 옴팡지게 두들겨 패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감히 눈으로 좇을 수도 없었던 두 사람의 공방을. 그리고 공방 끝에 쓰러진 노인과 홀로 우뚝 선 청년을.
“화룡(火龍)…….”
누군가가 신음처럼 중얼거린 그 두 글자가 사람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산서잠룡. 그것이 지금껏 무림에 알려진 청년, 진태경의 무명(武名)이었다.
하지만 틀렸다. 잠룡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고, 산서가 아닌 천하의 창공을 누빌 것이다.
한 마리의 화룡이 되어.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백 점 맞아 봤던 과목이 도덕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노인 공격 제대로 한다. 일어나.”
아니, 화룡이 아니라 광룡(狂龍)이었나?
그을음과 핏물로 엉망이 된 황보엄의 수염을 머리채인 양 휘어잡는 진태경의 모습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던 서른 명의 태을검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인이 누구인가. 사문의 존장(尊丈)이자 장문인의 사형인 태을무정검 황보엄 아니던가.
“자, 잠깐!”
“사조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
그 가운데에 유난히 우렁차고 강한 힘이 실린 외침이 있었다.
“놈! 사백님을 놓아드리지 못할까!”
태을검대를 이끄는 대주이자 종남파의 이대 제자인 황천(黃泉)이 황급히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선 그 순간이었다.
스르릉, 철컥.
“……!”
황천의 눈이 접시처럼 팽창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목젖에서 멈춘 서늘한 검날. 싯누런 죽장(竹杖)은 가슴을 짚고 있었고, 검집을 반쯤 빠져나왔던 검신은 누군가의 검에 걸려 더는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절정 고수인 황천을 순식간에 제압한 세 남녀가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그 검, 뽑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싸움을 원하신다면 저와 용봉표국이 상대해 드리지요.”
“타구봉법으로 맞으면 제법 아플 거다. 아직 오 성까지밖에 못 익혔지만.”
화산일학 백무성, 은비화 주화란, 그리고 개방의 후개 궁기방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국주를 지켜라!”
“곤란해. 이제 다 끝나 가는데 이대로면 곤란하지.”
총표두 허준과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냉막한 인상의 송일섬이 용봉표국의 표사들을 이끌고 종남파의 제자들과 대치했고…….
“개방의 거지새끼들에게 분타주가 명한다. 저 황구(黃狗)만도 못한 놈들에게 개몽둥이 맛을 보여 줘라!”
“같은 거지면서 새끼가 뭡니까.”
“어이구, 간만에 살풀이 한번 거하게 하겠구나.”
“조금이라도 다치면 분타주 책임이오. 구걸 못 한다고 구박이나 하지 마시오.”
흑걸개와 개방의 방도들이 허리춤에 매단 몽둥이를 기세 좋게 꺼내 들었으며.
“너희들은 괜히 끼어들어서 다치지 말고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적으렴.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을 테니까.”
“저어, 종남파를 적으로 돌리실 셈입니까?”
“응? 중요한 고객을 왜 적으로 돌리니. 이거 종남파에 팔 건데. 엄청 올려쳐도 살 수밖에 없을걸?”
“아아, 역시!”
“그림도 그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옙!”
크게 한탕을 노리는 월화와 하오문 문도들은 눈앞의 광경을 빠짐없이 글과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와! 살면서 이런 상황 처음이에요!”
“이놈들! 대태원진가의 진룡대 부대주이자 조장님의 오른팔인 이 혁무진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강 건너 불구경하던 청풍과 혁무진까지.
일이 뜻하지 않게 흐르자 황천의 얼굴이 당황과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모두 당장 멈추시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멈추기 싫다면?”
“……!”
황천은 숨을 들이켰다.
종남파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의 어깨 너머, 차가운 불꽃이 일렁이는 한 사람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잖아. 멈추기 싫으면 뭐 어쩔 거냐고.”
빈정거리는 진태경의 입가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믿지 못할 신위(神威)을 목도해서일까? 시선을 마주하고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기세. 그것은 실로 압도적인 기세였다.
‘이, 이토록 젊은 나이에 어찌.’
황천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종남 제일의 고수를 쓰러트린 저 청년에게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괴물, 저자는 괴물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괴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뛰어나다 자부했던 무공이 이처럼 하잘것없이 느껴질 줄이야. 진태경의 기세에 압도된 황천이 연신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였다.
“사제, 이만 물러나거라. 다른 분들도 검을 거두시오.”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눈앞을 가로막는 한 사람의 등.
익숙한 뒷모습에 황천이 눈을 부릅떴다.
“혁 사형……!”
종남일룡 혁소평. 종남파의 미래라 불렸고, 주색에 빠진 지금도 그 명성을 잃지 않은 종남 최고의 후기지수.
황천의 앞에 선 그가 굳은 눈빛으로 진태경을 응시했다.
수십 개의 병장기가 겨누고 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춰 주시오.”
“의미가 없어? 멈춰 줘?”
피식, 진태경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작은 너희가 했어도 끝내는 건 나야.”
“알고 있소.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요.”
“부탁이라. 주둥이 뚫렸다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그러다가 진짜 뚫리는 수가 있거든.”
“이미 승패는 명백한 바, 강자의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청하는 거요.”
놀랄 만큼 정중한 그의 태도며 음성보다도, 그 말이 담은 내용에 종남파의 제자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뒤에서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황천이 고개를 쳐들며 외쳤다.
“사형! 강자의 아량이라니요, 그 말씀은 사백님과 대종남파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사제.”
“예, 예?”
황천의 말을 끊어 낸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이어지는 말은 서슬 퍼런 칼날과 같았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사형?”
황천뿐만 아니라 태을검대의 모두가 얼빠진 표정으로 혁소평을 바라보았다.
혁소평은 그런 사제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맹인(盲人)이 아니었다면 보았을 것이다. 또한 농인(聾人)이 아니었다면 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
“음지에서 용봉표국을 집어삼킬 계략을 꾸몄으니 이는 당당한 명문 대파의 처사가 아니다. 하여 본문은 이미 위엄(威嚴)을 잃었다.”
목소리는 가라앉았고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혁소평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이토록 명백한 증거 앞에서 과오를 인정하지는 못할망정 살심을 품고 검을 휘둘렀으니, 이는 본문에 남아 있던 한 줄기 신망마저 끊어진 것이다. 한데 우리 중 누가 감히 위신을 입에 담는다는 말이냐. 본분을 잊고 주색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 아니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존심만 지키려는 너희?”
황천은 고개를 푹 숙였다. 비단 그뿐만이 아닌 서른 명의 종남파 제자들 모두가 입을 다물고 허리춤에 걸린 검갑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그들은 혁소평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는 사문에 대한 자부심이 허물어짐에 허탈함과 치욕감을 느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만큼은 생생하게 주위에 전해졌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우린 대종남파가 아니었다.”
마지막 한마디.
회한 어린 눈빛으로 사제들을 바라보던 혁소평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말을 끝까지 기다려 준 한 사람을 향해 깊숙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종남 제자 혁소평이 감히 청합니다. 본문이 저지른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사과드리니, 부디 이번 한 번만 아량을 베풀어 그를 살려 주십시오.”
마치 무림의 전대 고수를 대하듯 지극히 공손한 태도.
그러나 포권을 받은 상대방은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었다.
잠시 후, 고개 숙인 혁소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태경의 입술이 열렸다.
“이런 개 같은 노인네를 살려 두기에는 입맛이 영 껄끄럽긴 한데…… 좋아, 한 번만 봐주지.”
혁소평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경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 한 대만 더 때리고.”
빠악!
* * *
다루 내부는 망가졌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폭삭 내려앉은 지붕, 온갖 집기들은 나와 황보엄이 벌인 싸움의 여파로 가루가 되었고, 무너진 벽면에서는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흘러 들어왔다.
“세상에, 등왕루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찌 된 일인지 아는 사람 없나?”
“나도 정확히는 모르오. 한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 시진 전쯤에 종남파의 태을무정검이 제자들을 이끌고…….”
서안은 섬서성의 중심지. 등왕루가 제아무리 구석진 곳에 있었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몰려든 양민들은 수십 쌍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마주해야 했다.
“거기까지.”
“무림의 일이니 관여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오!”
병장기를 찬 무림인 수십이 인의 장막을 치고 접근을 막아서자 몰려든 양민들이 주춤거리더니 저 멀찍이 물러난다.
나는 내부의 상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종남파 제자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애쓴다, 애써.”
대종남파의 위신이고 뭐고 이미 작살난 마당에 조금이라도 지켜 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참, 짠하고 병신 같았다.
나는 등받이가 부서진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지만 끝낼 건 끝내야죠. 이제 야만적인 폭력 대신 대화로 합의점을 찾아봅시다.”
“…….”
“…….”
어우, 따가워. 나는 사방에서 우수수 날아와 꽂히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한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서, 황보 대협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황보엄이 즉각 대답, 아니 신음했다.
“흐으, 흐으으…….”
양팔이 골절되고 한쪽 다리는 부러졌다. 거기에 족히 일 년을 요양해야 할 내상을 입은 데다, 코뼈와 이빨도 아작이 났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으으.”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황보엄의 손목을 붙잡았다.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약간의 공력을 불어넣자, 창백했던 혈색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환자분, 환자분 정신 차리세요. 주사, 아니 협상 시간입니다.”
“흐으, 진태경. 너어…….”
“그 유행어 오십 년 전에 지났어요.”
“네놈, 네놈을 본문이 가만둘 성싶더냐…….”
“음.”
어떡하지,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같은데.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번개처럼 손을 날렸다.
쫘악!
“커헉!”
따귀를 얻어맞은 황보엄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려는 그를 붙잡은 혁소평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 잘못 아니다. 저 인간이 자꾸 매를 벌잖아. 제발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데 어떡해.”
“그래도 고정하시오. 이 이상은 목숨이 위험하오.”
“너도 고생이다. 성격 꼬라지 보니까 너한테도 그렇게 잘해 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안 그래?”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소. 이분은 사부님의 사형 되시는 분이며, 본문의 제자요.”
복잡한 표정을 보니 뭔가 사연이 있긴 한 모양이다.
지금 보면 생각 외로 멀쩡한 놈인데……. 술 먹고 난동 부리던 이유가 그 때문인가?
순간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뭐,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으니까.
“자, 그럼 협상을 해 보자고. 주 소저도 준비 끝났죠?”
“네? 네, 네.”
“요구 조건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거 꿈인가?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는 얼굴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른 주화란이 입을 열었다.
“본 표국은 이번 일에 대한 배상으로 종남파에게 계약 무효와 위약금을 요구…….”
황보엄의 갈라진 목소리가 이어지려던 말을 가로챘다.
“거절한다. 본문은 그 어떤 배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주화란을 향해 눈짓했다.
“주 소저, 잠시만요.”
“네?”
“진짜 잠깐이면 됩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황보엄의 뺨을 후려갈겼다.
쫘악!
“커헉!”
“사백!”
“다시 묻는다. 배상해, 안 해.”
황보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본문은…… 그 어떤 배상도 하지 않…….”
쫘악!
“커헉! 그 어떤 배상도.”
쫘악!
“커허억! 그 어떤 배상도 하겠다!”
“오케이, 배상! 오케이! 땡큐!”
협상, 참 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