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27
#326화
협상은 순조로웠다.
“우선 재작년만 따져 보았을 때, 용봉표국이 종남파의 계략으로 손해를 입었던 피해 액수는 은자로 이만오천 냥에 달합니다. 인정하십니까?”
“이만오천 냥이라니 그 무슨! 노부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하, 이놈의 늙은이 또 시작이네.”
쫘악!
“커헉, 인정! 인정한다!”
물론 순조롭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순조롭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개방은 산더미처럼 쌓인 정보를 정리했고, 하오문은 그것을 바탕으로 주판(珠板)을 튕겼다.
“어디 보자, 작년 일월 십칠 일에 있었던 낙천 상단과의 계약 파기. 이 일에도 종남파가 관여했었구먼.”
“피해 액수가?”
“은자로 따졌을 때 육백하고도 서른두 냥이오.”
개방도와 하오문도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칠백 냥.”
“예?”
“칠백 냥.”
“……예.”
전장 일에 잔뼈가 굵은 중년의 하오문도는 육(六)이라 적었던 글자를 찍찍 긋더니 칠(七)로 고쳤다.
그들의 일 처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문득 옆으로 치워져 있던 죽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뭡니까?”
“아, 그건 작년 오월 육 일에 있었던 일인데…….”
“날짜는 건너뛰고. 피해 액수만.”
“은자로 구백이십육 냥입니다.”
“구백, 뭐요?”
내 표정을 본 하오문도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천 냥입니다.”
“천 냥? 많이도 해 처먹었구먼. 안 끼어든 곳이 없어.”
은자 두 냥이면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다.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하다지만 은자 천 냥은 평범한 양민이라면 삼 대가 호의호식할 수 있는 거금.
혀를 내두르는 내게 하오문도가 말했다.
“저어, 한데 진 소협. 그것은 종남파가 관여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근데 이게 왜 여기 있어요?”
“그건 말이지, 진 공자님.”
기다란 손가락이 내 팔뚝을 쿡 찌른다. 아까부터 내 등 뒤에서 묘한 향기를 뿌리며 서 있던 월화였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료들을 모두 가져와서 그래요. 여기에서 각자의 정보를 대조해 보니 종남파의 소행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 것도 꽤 있었거든. 소국주인 주화란 소저는 잘 알걸?”
“아, 그래요?”
주화란은 이미 죽간을 살펴보고 있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너무 큰 손해를 봐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이건 저희 측 잘못으로 표행이 실패한 거였죠. 안 그런가요, 허 숙부?”
사람들의 시선에 총표두 허준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맞소. 본인이 직접 표행을 맡았고 여기 있는 송 표두도 함께했소. 그러나 불행히도 여러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기한에 맞추지 못했지. 결국 은자 천 냥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송일섬을 바라보는 허준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그리고 마치 이 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벽에 몸을 기댄 송일섬까지.
“흐음.”
“왜 그래, 진 공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래요, 그럼 이건 따로 빼놓는 것으로.”
그때, 죽간을 향해 다가가는 월화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로막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여인의 것이 아닌 무인(武人)의 거친 손.
그 주인은 바로 주화란이었다.
“잠시만요.”
“예, 말씀하십시오.”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종남파의 소행 같아요.”
“……예?”
“……어?”
모두의 어리둥절한 시선 속, 주화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죽간을 집어 들더니 피해액을 계산 중이던 하오문도에게 슥 내밀었다.
“이것도 추가시켜 주세요.”
“주, 주 소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은데.
나와 월화를 번갈아 가며 눈치를 살피던 하오문도가 눈을 질끈 감고 붓을 놀린다.
그렇게 획 몇 번만으로 은자 천 냥이라는 거금을 추가시킨 주화란이 다른 죽간을 집어 들었다.
“자, 그럼 다른 것도 다시 봐 볼까요?”
“…….”
“…….”
“이것도, 저것도, 아, 저기 구석에 있는 것 좀 줘 보세요. 네, 그거요.”
주화란은 전광석화처럼 죽간들을 살피고 액수를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피해 액수는 새끼 치듯 불어났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계산은 정확했고, 사기 행각은 대담했다.
“이 부분도 미심쩍네요.”
“저어, 그것도 총표두이신 허준 대협께서 실수하신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만.”
“아니요. 종남파의 소행이니 추가시켜 주세요.”
“그, 그럼 은자 백오십 냥을 더 추가하도록 하겠습…….”
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은자 이백 냥.”
“예?”
“이백 냥으로 합시다.”
주화란이 고개를 저었다.
“삼백 냥으로 해요.”
“…….”
“…….”
묻고 더블을 불러 버리네. 화통하기 짝이 없다.
이미 반쯤 체념해 있던 황보엄이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외쳤다.
“이, 이런 날강도 같은 연놈을 보았나!”
날강도 같은 연놈?
아무래도 황보엄이 오늘 저녁부터 제삿밥을 먹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제사 준비를 위해 나서려던 그때였다.
“지금 날강도라고 하셨나요?”
주화란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황보엄을 응시했다.
“우리 용봉표국은 합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조차 거부하신다면…… 진짜 날강도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알려 드리지요.”
“네, 네가 감히…….”
“만약 이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면, 종남파 제자들이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주화입마로 쓰러진 아버지 대신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용봉표국을 이끌어야 했던 주화란이다.
종남파의 계략으로 많은 걸 잃고, 떠나보낸 그녀의 한은 가슴 깊이 사무쳐 있었다.
“표두 석도민, 표사 길왕준, 홍석정, 노두삼, 쟁자수 석삼…….”
떨리는 목소리로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의 이름을 읊은 주화란이 젖은 눈동자로 황보엄을 노려보았다.
“도합 서른셋. 이번 표행에서 유명(遺命)을 달리한 이들입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용봉표국의 가족이었지요. 표국의 사정이 기울어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경이 이르렀음에도, 그들은 끝까지 남아 주었습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과거 팀원들을 잃었듯, 주화란도 자신을 믿고 따르던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
“그 어떤 양보도 바라지 마세요. 또한 저를 포함한 용봉표국 전원은 이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
“더 할 말 있으신가요, 대종남파의 황보 대협?”
힘껏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황보엄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를 대신하여 혁소평이 주화란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본문을 대신하여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주 소저.”
“소국주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말뿐인 사과는 거절하겠습니다.”
칼 같은 대답에 혁소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아직 이 사실을 모르시는 사부님과 여러 장로님께도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르셨기를 바라지요, 진심으로.”
종남파 장문인인 풍운검군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천강이 ‘제법 도사 같은 사람’이라 평했던 전대 장문인이 직접 후계로 지목했으니 어느 정도 말은 통하는 사람이길 바랄 뿐이다.
‘용봉표국의 일도 그렇고, 내 문제도 마찬가지고.’
옛 속담에,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 했다.
지금까지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적을 죽였지만, 황보엄은 그저 한 사람의 무림인이 아니었다.
태을무정검이라는 이름은 종남파를 대표하며, 사사로이는 장문인의 사형이기도 하다.
‘제거하려면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지만…… 다음이 문제지.’
종남파는 구파일방에 속할 만큼 강한 문파다.
황보엄의 목을 베었다면 그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나를 말린 혁소평과 이 자리의 모두도 내심으로는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황보엄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반병신 만들어 놓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입맛이 쓰지만 어쩔 수 없지.
황보엄이 오늘 입은 부상에서 완쾌하려면 족히 일 년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건 그가 살아 있고, 회복할 때쯤이면 나는 더더욱 강해져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저쪽에서 먼저 똥을 싸 주는 바람에 일도 쉽게 풀렸고.’
황보엄은 두 가지의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먼저 검을 뽑은 것이 첫 번째요, 태을검대로 하여금 다루를 봉쇄한 것이 두 번째다.
검을 뽑은 건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개방과 하오문뿐만 아니라 화산파까지 얽혀 버렸으니까.’
이번 일로 종남파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질 것이다.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더더욱.
마침내 모든 정리를 끝낸 죽간에 적힌 숫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본 표국이 입은 물질적, 인적 피해와 이번 표행이 실패했을 시 귀 파에 지급해야 했을 막대한 위약금까지. 모두 합하여 은자 사십만 냥입니다. 종남파의 재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주화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궁기방은 놀라서 들고 있던 죽장을 떨어트렸고, 월화는 혀를 내두르며 내게 속삭였다.
“주 소저, 아니 용봉표국의 소국주님 장난 아닌데?”
“은자 사십만 냥이면 어느 정도로 큰 금액이에요?”
“음, 구파일방에 속한 명문 대파의 일 년 예산이 은자 십만 냥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하면 대충 감이 잡히려나?”
“……허.”
“공자님이 잘 몰라서 그렇지, 저걸 한 번에 내놓으면 종남파 기둥뿌리 절반은 뽑아야 할걸?”
현대로 치자면 수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잠깐 말을 잃은 내 귓가로 나긋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좋네. 경국지색에 머리 좋고, 강단도 있고. 우리 공자님 고생 좀 하겠어.”
“예?”
“응? 뭐가?”
“아니, 분명히 방금…….”
“내가? 언제?”
뭐지. 되게 묘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수상쩍은 눈빛으로 월화를 바라보던 그때, 주화란의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보 대협께서 직접 수인(手印)을 찍어 증명해 주시지요.”
어느새 마무리 단계다.
황보엄은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죽을 때까지 저주하겠다는 듯 장내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눈에 담던 그는 피에 젖은 손바닥으로 죽간에 수인을 찍었다.
“이제 되었느냐?”
“충분합니다. 이것으로 용봉표국과 종남파 사이에는 배상금을 제외한 어떤 계약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어 주화란이 깊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본산까지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향후 어떠한 일로도 뵙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너……!”
황보엄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종남파 제자들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이제는 그조차 쉽지 않았다.
되레 피 섞인 잔기침 몇 번을 토해 낸 그가 마지막으로 노려본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한 가지만 묻자.”
“묻는 건 상관없는데, 생각하고 입 여십쇼. 아니면 그 자리에 묻히실 겁니다.”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황보엄이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정녕…… 정녕 벽을 넘었더냐?”
“나 참.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 했더니.”
“노부가 본 것은, 너의 강기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한데 어찌…….”
“우리 사부님이 그러시더라고. 사람은 보이는 만큼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그게 무슨…….”
“거, 나이를 많이 자셔서 그런가. 요점을 파악 못 하시네. 내 경지에 대해서는 알아서 마음껏 생각하세요. 그런데…….”
지금 저자가 느끼고 있을 의문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현실과 무림, 어디에서도 비상식이라는 세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그것이 시스템이고, 나라는 사람이다.
나는 물끄러미 황보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두 가지만 기억합시다. 당신이 나보다 약하고 내가 당신보다 강하다. 그리고 이곳은…… 무림(武林)이다.”
강자지존, 약육강식.
내가 서 있는 땅은 무림이고 무림 위에 서 있는 나는 무림인이다. 팔십 년 세월을 무림인으로 살아온 황보엄은 내 말이 뜻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림, 무림이라 하였느냐.”
탄식과도 같은 중얼거림. 짧은 헛웃음이 지나친 얼굴은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보게 될 거다. 반드시!”
“다음에 조문 갈게요. 반드시!”
반 시진 전이었다면 이라도 빠득빠득 갈았을 텐데, 이제 그에게는 이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기를 풀풀 날리며 돌아선 황보엄이 제자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일갈했다.
“놓아라, 내 발로 가겠다!”
심각한 부상에 비틀거리면서도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황보엄, 무겁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떠나는 혁소평과 그 뒤를 황급히 따르는 종남파의 제자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은원(恩怨).’
무림을 움직이는 커다란 톱니바퀴 중 하나.
오늘의 일이 훗날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미 종남파와는 척을 진 상태였고, 빤히 보이는 술수를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해충은 더 자라기 전에 없애야지.’
해충 퇴치. 그뿐이다.
내가 후련한 마음으로 결론을 내린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남아 있었다. 꼭 잡아야 할 해충이.
그것도 천년설삼을 백년설삼으로 바꾼 대단한 해충이지.
그리고 퇴치를 위해 검을 뽑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스르릉.
낭창한 연검(軟劍)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비화 주화란. 그녀의 붉디붉은 입술 사이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요. 안 그런가요?”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한 사람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