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31
#330화
자정 무렵.
용봉표국을 나선 네 사람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함께 마중 나온 용봉표국의 식솔들은 몸을 떨었지만, 주화란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조금만 더 기다리면 누군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짙은 어둠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떠났군.”
기척도 없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표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주화란은 동요하지 않았다.
“네, 떠났네요.”
“아쉬운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별수 없어.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고. 그게 순리인 거지.”
“순리…….”
작게 중얼거린 주화란이 천천히 돌아섰다.
“송 표두는 어느 쪽인가요?”
“나?”
피식 웃은 송일섬이 어깨에 짊어진 행낭(行囊)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어느 쪽일 것 같나?”
“그게 술에 취해 잠든 척했던 이유인가요?”
“자그마치 십 년이야. 이 정도면 도리는 다했다고 보는데…… 아직 부족한가?”
“네.”
“……!”
“부족합니다. 아직 도리를 다하지 않으셨어요.”
망설임 없는 주화란의 대답에 송일섬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부족하다고? 십 년 동안 용봉표국을, 널 지켰는데도 말이냐?”
“제 조부께서 베푸신 구명지은(救命知恩)에 비할까요?”
“너……!”
송일섬의 목소리를 키우며 걸음을 내딛자, 주위에 있던 표사들이 흠칫 놀라며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그의 출신 성분에 숨겨진 내막을 듣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 송일섬은 아직까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특히 그와 함께 용봉삼표에 속한 또 다른 두 명의 표두는 적의마저 드러냈다.
“목소리 낮추게. 그게 신상에 이로울 게야.”
“소국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우리는 아닐세.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영 수상쩍단 말이지.”
두 표두가 굳은 얼굴로 송일섬을 가로막은 그때였다.
“그만. 물러가세요.”
주화란의 덤덤한 목소리에 두 표두가 말을 더듬었다.
“소, 소국주.”
“하지만 이자는 아직 혐의를 완전히 벗지 않았……!”
“물러나라 했습니다.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자리로 돌아가 남은 일들을 처리하세요.”
“으음…….”
“아, 알겠습니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두 표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른 표사들을 데리고 천천히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송일섬이 주화란을 향해 혀를 찼다.
“충성스러운 건지, 멍청한 건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는군.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적아(敵我)를 구분 못 하다니.”
“전제가 틀렸어요.”
“뭐?”
“저들은 송 표두의 생각처럼 충성스럽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으니까요.”
순간 송일섬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혹시?’
깨달음은 찰나였다.
타고난 싸움꾼이자 천생 무인인 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까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한 송일섬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원, 요지경이 따로 없군.”
주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적으로 표행과 계약을 망치고, 혼란한 틈을 타 자금을 빼돌렸으며 교묘하게 장부를 조작했습니다. 허 숙부가 이 모든 것을 홀로 했을 리 없죠.”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관된 거지?”
“정확한 숫자와 신상은 지금부터 파악해야겠지만…… 최소한 두 사람은 포함시켜야겠죠.”
주화란의 시선이 서서히 멀어지는 두 표두의 뒷모습을 훑고 송일섬에게 닿았다.
“이참에 뿌리 뽑을 겁니다.”
“차라리 총표두를 죽인 자리에서 밝히지 그랬나?”
“혼란이 가중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것조차 제힘으로 해내지 못하면, 용봉표국의 소국주가 될 자격이 없겠죠.”
“자신은 있고?”
주화란이 물끄러미 송일섬을 응시했다.
“지금 들고 계신 행낭, 일 년 후에 다시 꺼내시는 건 어떨까요?”
“나를 이용해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겠다?”
“송 표두. 지금 전 누구든 벨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검이 필요합니다. 마침 적임자가 제 눈앞에 있고요.”
“거절한다. 그리고 이제 표두라고 부르는 것 따윈 집어치워.”
“그럼 추혼객(追魂客)을 고용하는 건 어떤가요?”
“뭐?”
주화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천하의 추혼객이니 비용이 제법 나가겠지만…… 과거의 인연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감안해 주시겠죠?”
“그것으로 구명지은을 갚아라?”
“그랬다면 더 큰 걸 요구했겠죠.”
“아까는 표왕께서 베푼 구명지은에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더니?”
“그거야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제 조부께서도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사람을 구한 것뿐이라고.”
“하!”
송일섬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십 년 전, 빛바랜 옥비녀를 들고 찾아온 앳된 청년에게 군자검 주호군이 건넨 말이 떠올라서다.
‘비록 한 대(代)를 건너 만났으나, 이제라도 찾아와 주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네. 전 대의 인연에 얽매이지 말고 자네의 삶을 살게.’
‘예?’
‘선친께서 말씀하셨지. 당신께서 한 일은 사람이 사람을 구한 것뿐이라고. 내 생각도 그와 같다네. 그리고…… 이리 훌륭히 장성해 주어 고맙네.’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송일섬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부모는 요절했고 하나뿐인 유일한 버팀 막이던 조모마저 운명했을 때, 그는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이 혼자서 헤쳐나와야 했다.
시체 더미에서 병장기를 찾아 훔쳤고, 정당한 대가를 빼앗으려는 낭인의 목을 베었으며 숱한 생사결을 통해 자신을 입증해 왔다.
‘뭔가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낭인으로 살아온 송일섬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설령 주호군이 누군가를 없애고 싶어 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랬을 것이다. 기분은 더럽겠지만 항상 해 왔던 일이니까.
지금까지 해결한 수많은 의뢰,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호군은 달랐다.
그는 송일섬이 천애 고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만난 ‘어른’이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엉겁결에 한마디가 튀어나온 것은.
‘십 년.’
‘응?’
‘십 년 후 떠나겠습니다. 비록 배운 것이라고는 사람 죽이는 것밖에 없는 몸이지만, 행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국주님과 아이만큼은 지키겠습니다. 수십 년 전 표왕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송일섬은 맹세를 지켰다.
용봉표국의 표사가 되어 명령에 충실히 따랐고, 표국에 머무르는 동안은 국주의 부탁에 따라 그의 여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켰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아름다운 규수로 장성하자 그와 관련하여 이상한 소문이 돌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국주가 쓰러져도, 표국이 무너져도 송일섬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저 도리를 다할 뿐.’
송일섬은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화란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달포 후 떠난다.”
“……!”
“네가 배반자들의 정체를 알아내면, 내가 앞장서서 솎아내 주마. 달포면 충분할 것이다.”
주화란의 표정을 본 송일섬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함양(咸陽)에 들러 영약을 구해 오는 것뿐이니.”
“영약……이요?”
“그래. 그것이라면 국주님의 병세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천년설삼은 힘이 너무 과하여 역효과가 날 수 있지만, 이번에 구한 영약은 확실히 효력을 볼 수 있을 거야.”
“어, 어떻게 그만한 영약을…….”
“됐어. 입 아프니 더는 묻지 마라.”
송일섬이 손을 내저었다.
이 년이 넘도록 수소문한 끝에 어렵게 구한 영약이다. 천년설삼 같은 희대의 영약은 아니었지만 주화입마에 빠진 국주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 적격이었다.
덕분에 추혼객으로 벌었던 막대한 재산을 모조리 털어 넣어야 했지만, 재물이야 모으면 그만이다.
“그거 알아?”
송일섬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어. 네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송일섬은 지금까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랬던 그가 누군가를 지키게 된 것은, 용봉표국에 들어온 이후였다.
“송 표두…….”
젖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던 주화란이 송일섬의 좁혀진 미간을 보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 송 대협.”
“언제까지 헷갈릴 셈이냐.”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그럼 이참에 직책 하나 만들지 그래.”
“네?”
“총표두는 싫다. 표행도 젬병이고, 사람도 다뤄야 하니까.”
“네, 네?”
“호위당주. 그래, 그걸로 하면 좋겠군.”
주화란이 어어, 하는 사이 송일섬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문밖이 아닌, 자신의 거처를 향해서.
“행낭은 싸지 말걸.”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흘리며 멀어지는 송일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화란의 입가에 보조개가 패었다.
* * *
쏴아아아.
팽팽한 돛대와 물살을 가르는 선미.
그렇게 바람처럼 나아가는 쾌조선(快調船)에는 구릿빛 상체를 드러낸 사내들이 밧줄을 당기고, 노를 저었다. 갑판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머릿수만 족히 오십에 달했다.
그런 쾌조선이 다섯 척이니, 족히 삼백에 달하는 병력인 셈이었다.
“더, 더 빨리!”
“이놈들아. 그리 굼떠서 어찌 수룡채(水龍砦)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느냐!”
수룡채는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에 속한 대형 수채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장강의 영웅들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지만, 양민들이 부르는 이름은 영웅과는 썩 거리가 멀었다.
“수적! 수적이다!”
“아니, 저 썅노무 새끼들이 왜 여길!”
다섯 척의 쾌조선을 발견한 선주(船主)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대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장강수로맹의 수룡채다. 저들의 쾌조선은 따라잡을 수도 없고, 전투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일진 제대로 꼬였군.’
틀렸다. 이제 그나마 조용히 넘어가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선주는 낙담한 얼굴로 지나가던 막내 선원을 불렀다.
“야!”
“예, 선주.”
“승객분들께 전해라. 돈 좀 내라고.”
“예?”
“돈 걷으라고! 통행료 내야 할 것 아냐!”
상대가 장강수로맹인 것은 불행이자 다행이다. 한 번 잡히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만,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지는 않으니까.
천하에 널리고 널린 잡졸 수적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 장강수로맹 측의 주장이었지만, 어차피 저놈이나 이놈이나 똑같기는 매한가지였다.
“후우…… 오늘 장사 제대로 공쳤구먼.”
선주가 한숨만 푹 내쉬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기요.”
“으헉! 깜짝아! 뉘쇼?”
“승객인데요.”
“아니, 그건 나도 알지.”
선주는 갑자기 나타난 청년을 바라봤다. 허리에 검을 찬 것을 보아하니 무림인인 것 같긴 한데…….
‘왠지 모르게 어벙하게 생겼네. 주둥이가 툭 튀어나온 게 말도 많을 것 같고.’
천하에 널리고 널린 게 삼류 무인이다.
저런 놈 한둘 겪어 보나. 선주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왜 왔소? 돈 걷은 것 때문이라면 할 말 없으니 자리로 돌아가시오. 괜히 객기 부렸다가 삼도천 건너지 말고.”
빠르게 가까워지는 쾌조선을 바라보던 청년이 물었다.
“수적입니까?”
“보면 모르겠소? 그중에서도 장강수로맹의 수룡채요. 사천 땅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장강수로맹…….”
“도망쳐도 소용없소. 저놈들 쾌조선은 절대로 못 벗어나. 눈에 띄면 그걸로 끝이야, 끝!”
“저 배. 많이 빠른가 봐요?”
“그걸 말이라고…….”
짜증 난 얼굴로 대답하려던 선주가 헙, 하고 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청년의 등 뒤로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림자가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짊어진 지게 위에는 가죽 더미가 높이 솟아 있었다.
멀뚱멀뚱 선주를 바라보던 거한이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진아.”
“예?”
“저거 뺏어 타자.”
선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