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32
#331화
선화아(船火兒). 배에 불을 밝히는 아이.
그것은 뱃사공을 뜻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한 사람을 가리키는 별호이기도 했다.
“채주.”
수하의 부름에 선실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사내가 눈을 떴다.
정광(晶光)이 번뜩이는 눈동자. 억센 뱃사람답게 피부는 구릿빛이었고 몸은 근육질이다. 불룩 솟은 태양혈(太陽穴)은 그가 상당한 경지에 오른 절정 고수임을 알려 주었다.
“무슨 일이냐.”
건조한 입술 사이로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수하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오십 장 밖에 선박이 있습니다.”
“선박? 본 맹의 형제들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천하를 도도히 가로지르는 장강(長江)에는 뺏기는 자와 빼앗는 자만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규모는.”
“오십 남짓입니다. 장사치들의 상선(商船)도 아닌 듯합니다.”
“그렇군.”
“어찌할까요?”
“소란 피우는 일 없이 조용히 처리해라.”
사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조정에서 보낸 군함(軍艦)이라면 모를까. 그가 직접 나서기에는 사안이 워낙 사소했다.
언제나 그랬듯 수하들은 사내의 명령대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내 명상을 방해하다니.’
사내는 괘씸한 마음을 지우고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 어언 십여 년. 그러나 지금의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약탈한 영약도 먹어 보고,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광경을 보여 준다는 아편까지 해 봤지만 모두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힘들다.’
수룡채는 장강수로맹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수채.
막대한 물산이 오가는 사천에 자리한 덕분에 맹 내부에서도 알짜로 소문난 곳이다.
그러나 이제 막 사십 줄에 접어든 사내에게는 더욱 커다란 야망이 있었다.
‘맹주(盟主).’
장강수로맹의 주인. 더불어 장강의 왕이 되는 것이 사내의 목표였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터무니없다며 코웃음 치겠지만, 사내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과 배경이 있었다.
십여 년 전, 이립을 갓 넘긴 젊은 나이로 수룡채의 주인이 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후우우…….”
사내는 길게 호흡했다. 대기에 스며든 자연의 기를 받아들이며 순환시키자 예민해진 감각이 주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축축한 물 내음. 천천히 속도를 줄여 나가는 쾌조선의 움직임. 그리고 수하들의 외침과 웃음소리까지.
– 크하하하! 우리를 만나다니, 아주 재수 옴 붙은 놈들이로군. 선주가 누구냐?
– 저, 접니다요.
– 본 영웅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배를 띄웠으니 각오는 되었겠지?
– 소, 소인이 장강의 영웅님들을 몰라뵙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제 성의라 생각하시고…….
퍽, 우당탕탕!
타격음과 함께 누군가가 나동그라진다. 잇따라 터져 나오는 새된 비명에 사내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소란 피우지 말라 했거늘.’
수련을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는 무인은 어디에도 없다. 제아무리 거칠고 무식한 놈들이라지만 이리도 말귀를 못 알아먹을 줄이야.
눈을 부릅뜬 사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쿵! 콰득! 쿵! 퍼버버버벅!
무지막지한 소리와 함께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제 끝난 모양이군.’
한결 누그러진 사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고 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의문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하지?’
저벅. 저벅. 저벅.
나직하고 울림 있는 발걸음 소리가 선실을 향해 가까워졌다.
이내 문밖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누군가가 하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니? 안 나오고.”
“……!”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
사내의 뇌리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적!’
모든 것은 찰나에 벌어졌다.
빛살 같은 속도로 몸을 일으킨 사내의 신형이 문을 향해 쏘아졌다.
거대한 범선도 부숴 버릴 만한 강대한 기운을 담은 일권(一拳)이 두꺼운 목제 문을 부수며 그 너머의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앙!
쾌조선을 뒤흔드는 굉음과 여파.
사내는 눈을 부릅뜬 채 적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주먹을 막아 낸 그의 손바닥을.
악문 이빨 사이로 끓어오르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너, 누구냐?”
“나?”
청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배 주인.”
사내, 선화아(船火兒) 무송(霧淞)의 눈동자에서 화염이 쏟아졌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감히…… 하늘을 보여 주마.”
* * *
나는 갑판에 대 자로 뻗어 있는 중년인의 다리를 걷어찼다.
“언제까지 하늘만 보고 있을래. 잽싸게 기상.”
몽롱하게 풀어져 있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다.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킨 중년인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 어떻게 파선권(破船拳)을 이렇게 쉽게…….”
“잠깐, 파선권?”
그래, 이제야 생각났다.
분명히 어디에서 본 무공이었는데, 영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궁금하던 차였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중년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 철수랑은 어떤 관계야?”
“처, 철수라니. 누굴 말하는 거요?”
“그 왜, 있잖아. 철수, 철수…….”
슬그머니 끼어든 궁기방이 말을 이었다.
“철수신룡.”
“그래. 철수신룡. 성라대연에서 만났을 때 그놈도 파선권 어쩌구 하더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1차 예선이었을 거다.
파선권을 견식하는 걸 영광으로 알라느니 하는 별 같잖은 소리를 늘어놓길래, 멸염신권으로 절벽을 박살 냈었지.
‘그 후에 기권하고 바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무림에서는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일이지만, 하도 많은 사건을 겪어서 그런지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뭐 어쨌건 눈앞의 중년인은 철수신룡과 같은 무공을 익혔고, 그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보유한 절정 고수였다.
금붕어처럼 눈만 끔뻑거리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대며 물었다.
“마, 막내와 아는 사이였소?”
“막내?”
“당신이 말하는 철수신룡은 우리 세 사형제 중 막내요. 녀석이 셋째. 내가 둘째지.”
어라? 이것 역시 들어 본 적 있다.
철수신룡의 사부에 관해서 사람들이 지긋지긋하게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그럼 혹시……?”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 사부님께서 바로 해상왕(海上王)이라 불리시는 분이오.”
“장보고!”
“……?”
“아니, 별거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왜 존댓말을…….”
“어휴, 당연히 존댓말 써야죠. 강호의 선배님이시자 장강수로맹의 영웅이신데. 선배님도 말씀 편히 하십쇼.”
사실 장강수로맹이나 녹림맹이나, 내 눈에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모인 범죄자 집단이다.
하지만…….
‘해상왕의 제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쾌조선 뺏으려고 제자를 흠씬 두들겨 팼다는 소식을 해상왕이 들으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거다.
그나마 녹림맹의 천력부는 명분이라도 확실해서 저쪽에서 아무 말도 못 하겠지만, 이 경우는 좋게좋게 풀어 나가야 한다.
나는 얼떨떨해하는 중년인을 일으켜 세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옷 지저분해진 것 봐. 어떡해. 드라이클리닝 받으셔야겠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시오?”
“말씀 편히 하시라니까요. 제가 사소한 오해를 좀 하는 바람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는데, 천하의 장강수로맹인 줄 알았으면 좋게좋게 말로 해결했을 겁니다. 아시죠?”
“……정말이오?”
“그럼요. 이 후배가 선배님께 거짓말을 할, 뭐 그런 막돼먹은 놈으로 보이십니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년인의 시선이 슬쩍 위로 향했다.
따라서 고개를 올려보니 쾌조선 위로 우뚝 솟은 깃발이 보인다. 거기에 백 미터 밖에서도 보일 만큼 크게 적힌 글씨도.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
“…….”
“…….”
나는 무겁게 입술을 뗐다.
“제가 문맹이라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
그래, 씨알도 안 먹힐 줄 알았다.
나는 주먹에 힘을 주며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시죠.”
“……그럽시다.”
* * *
쏴아아아아.
쾌조선은 힘차게 물길을 갈랐다. 뱃머리에 앉아 바람을 맞던 청풍이 신나게 달려와 조잘거리며 떠들었다.
“은인! 엄청 시원해요!”
“당연히 시원하지, 아직 초봄인데.”
“물고기도 엄청 많이 있어요!”
“당연히 있어야지, 강인데.”
“건너편 배에서는 엄청 많은 사람이 엄청 많이 맞고 있어요!”
“당연히 엄청 많이 맞, 뭐라고?”
지금 뭘 들은 거지.
귀를 의심하는 내게 청풍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장님이 커다란 노를 휘두를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고 있어요!”
“…….”
중년인, 무송이 수하들을 세워 놓고 줄빠따를 치고 있는 모양이다.
괜히 여객선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개망신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못 본 척해. 당신은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저도 가서 한 대만 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저게 사람 새낀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주위 선원들의 시선을 모른 척한 나는 궁기방에게 말했다.
“마, 알고 있었으면 미리 말해 줬어야지.”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어느 수채에 누가 있는지 어떻게 일일이 다 안단 말이냐?”
기가 차다는 얼굴로 대답한 궁기방이 중얼거렸다.
“애초에 장강수로맹 깃발을 보고도 달려드는 놈이 미친놈이지 이제 와서 무슨.”
“야, 다 들려.”
“들으라고 한 얘기다. 말해 줘도 들어 처먹지를 않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하, 이 자식 이거 많이 컸네. 이런 불순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무진아?”
혁무진이 대답했다.
“우웨에에에엑!”
“……뱃멀미 심하구나. 쉬어라.”
명색이 초일류 고수라는 놈이 아직도 저 모양이다.
난간을 붙잡고 연신 헛구역질을 해 대는 혁무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풍이 베베 꼬았다.
“나도 뱃멀미하고 싶다. 아직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
넌 좋겠다. 해 보고 싶은 게 많아서.
배에 타서 그런가, 오늘따라 버뮤다 삼각지대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러다가 장강에서 표류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대한 체구의 거한, 무송이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횰한 신법으로 갑판에 내려앉았다.
피에 물든 노를 수하에게 던진 그가 다가와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나?”
“아, 예. 편합니다. 선배님.”
무송의 시선이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혁무진을 스쳤다.
“저 친구는 별로 편해 보이진 않는데.”
“괜찮습니다. 전 편하니까.”
“…….”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닐세. 그나저나 성도(成都)까지 간다고?”
“예. 얼마나 걸릴까요?”
“현재 위치가 사천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광안(廣安)이니까…… 지금대로라면 사흘. 바람을 잘 탄다면 이틀이면 충분할걸세.”
그 정도면 경신법을 발휘한 것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빠른 속도다.
일반적인 선박이었다면 훨씬 더 걸렸겠지만, 장강수로맹이 자랑하는 쾌조선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꾸벅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무슨 소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을.”
무송이 지금처럼 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우리 일행의 정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왕 적천강의 제자인 나와 개방의 후개, 검성 매종학의 진전을 이은 청풍. 마지막으로 대태원진가의…… 아, 마지막은 빼자.
“어쨌건 성도까지는 금방이니 편히 쉬면서 기다리게. 사천에 흐르는 강은 이 무송이 꽉 틀어잡고 있으니.”
“이야,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내 명령이 없는 한, 누구도 감히 장강에서 허튼짓을 할 수 없지. 하하하!”
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그 순간이었다.
– 꺄아아악!
– 모조리 죽이고 빼앗아라!
저 멀리, 아련하게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내가 중얼거렸다.
“허튼짓 잘하는 것 같은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송이 외쳤다.
“감히 어느 놈이 장강에서 행패를 부리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