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35
#334화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비록 흔하고 낡은 비유였지만, 내게는 쾌조선에서의 사흘이 바로 그랬다.
‘덕분에 시간 많이 단축했지.’
장강수로맹이라는 이름답게 무송과 수룡채의 수적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뛰어난 수부(水夫)였고, 사천을 종횡하는 장강의 하류(河柳)을 제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있었다.
“이제 곧 도착이에요, 노야.”
나는 주름진 적천강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불과 몇 주가 지났을 뿐인데, 가뜩이나 왜소하고 말랐던 몸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오늘처럼 진기도인(眞氣導引)으로 그의 기를 북돋을 때마다 매번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회복은 불가. 현재로서는 늦추는 것이 최선이야.’
이렇게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가 심후한 공력을 보유한 초절정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한 희망은 신의 경지에 다다른 의술을 지닌 한 사람뿐이다.
‘신의(神醫).’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성별조차 확실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인물.
다만 처음 이름을 알린 시점이 사십여 년 전이니, 적어도 환갑이 넘은 연배이지 싶다.
‘제가 반드시 찾아내서…… 깨워 드릴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그때, 가벼운 인기척이 가까워져 오더니 두런거리는 대화가 선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왔다.
“정지, 정지, 정지. 움직이면 벤다.”
“헉, 베지 마세요! 저 아시잖아요.”
“알지. 하지만 내 뒤로는 쥐새끼 한 마리 못 들여보내.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어린놈도 예외는 아니지. 살수(殺手)일 수도 있잖아.”
“의생에게 살수라니요. 그 무슨 망측한!”
“그런데 어쩐 일로 왔지?”
“무, 무송 대협이 말을 전하라고 하셔서요.”
“불가. 대태원진가의 진룡대 부대주 혁무진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쾅! 털썩!
문 모서리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대 태원진가의 진룡대 부대주의 모습에 문경이 입을 딱 벌렸다.
“주, 죽었어.”
“안 죽었다.”
“그, 그래도 저 정도면 머리에 큰 충격이…….”
“됐고. 무송 선배가 무슨 말을 전하랬다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와 혁무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거,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 알았다. 너도 짐 챙기고.”
“저는 이미 준비 끝냈지요.”
문경이 갖고 있던 짐은 단출했다.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작은 봇짐에서 침구(鍼灸)를 꺼낸 녀석은 혁무진의 상태를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용케도 찢어진 곳은 없습니다.”
“돌머리라 그래.”
“역시 무림인들이란…….”
“어쭈, 까분다.”
“으헉.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꿀밤을 먹여 주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움찔 놀라는 문경의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장난이야, 인마.”
“놀랐잖습니까.”
밤낮없이 이동하는 쾌조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의외로 상당한 고역이었다.
틈틈이 운기를 하고 무공에 대한 상념이 끝나면 바람을 쐬기 위해 갑판을 돌아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문경이 눈에 띄었다.
‘항상 다른 사람들 몸 상태를 봐주고 있었지.’
착한 녀석이다. 거기에 더해 실력도 뛰어난 모양이라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수적들까지 수줍게 다가가서 진료를 받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눠 보니까 성격도 밝은 것 같고.’
문경은 의젓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소년처럼 쾌활한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우리 일행의 정체를 듣고는 무림에 관심이 생겼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진 공자님이 화왕 적천강 대협의 제자라고요? 와아!’
‘검성 매종학 대협의 위명은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청 공자님도 엄청난 분이셨군요.’
‘와! 개방! 후개!’
‘진룡대의 부대주요? 아, 예…….’
어쨌건 문경은 그렇게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 속에 녹아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겠지.’
성도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갈라질 인연이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내 어깨 너머를 힐끗거리는 문경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야, 아픕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기웃거려?”
“아뇨, 그냥. 방금 문틈 사이로 누구 발이 보인 것 같았거든요.”
이 녀석 눈썰미가 제법 예리하다. 급하게 가죽으로 덮었는데, 용케도 드러난 부분을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착각이야.”
“아닌 것 같은데…….”
“문경아.”
“예?”
“안에 뭐가 있는지…… 그렇게 보고 싶어?”
음산한 어조에 헉, 하고 숨을 삼킨 녀석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왜, 왜 이러세요.”
“내가 물었잖아. 보고 싶냐고.”
“아뇨. 아니에요! 안 보고 싶어요.”
“왜. 들어와서 봐 봐. 재밌을 거야.”
“히익!”
터덕, 쿵!
뒷걸음질 치다가 혁무진을 밟고 넘어진 문경이 벌떡 일어나 꽁무니를 뺐다.
엉겁결에 등짝을 밟힌 혁무진도 부스스 눈을 떴다.
“어, 어라? 분명 조금 전까지 문경이랑 이야기 중이었는데.”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녀석의 얼굴이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출수(出手)하는 걸 보지도 못하다니.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살수가 틀림없습니다!”
딱!
“으악! 왜 때리십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짐 챙겨라.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혁무진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긴 나는 선실로 돌아가 적천강을 지게에 옮긴 뒤 갑판으로 나왔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쾌조선의 선미에 있던 거한이 고개를 돌려 알은체를 해 왔다.
“어, 후배.”
“응, 선배.”
“……어째 말이 짧아진 것 같네만. 기분 탓이겠지?”
“전적으로 기분 탓입니다. 제가 원래 목소리가 좀 작아서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거한, 무송이 근처에 있던 수하를 불러 지시했다.
“청기 내리고 백기 올려.”
“옙. 두령님.”
갑자기 무슨 청기 백기 게임인가 싶겠지만, 엄연히 수룡채에서 사용하는 신호 방식이다.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보내는 신호라나 뭐라나.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수적이 이렇게 번화가까지 접근해도 되는 겁니까?”
“실례되는 질문이 맞지만, 대답해 주지. 가능하네.”
“어떻게요?”
“보이나?”
무송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선착장을 가리켰다.
우뚝 솟은 목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지나가던 양민들은 쾌조선의 등장에 힐끗 보고 지나쳐 가거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진다.
비록 한참 외곽이라고는 하나, 성도(成都)는 사천성의 도읍이자 중심지.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저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때? 다들 익숙해 보이지 않나?”
“그러게요. 이상할 만큼 별 신경 안 쓰네요.”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어. 황태구, 그 빌어먹을 놈이 내가 오기 전 벌인 짓거리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지.”
뿌드득, 이를 간 그가 말을 이었다.
“인식을 바꿔 놓기 위해 개고생 많이 했지. 뭐, 덕분에 이제는 관(官)에서도 어느 정도 눈감아 주고 있지만.”
“관? 대국의 벼슬아치들 말입니까?”
“맞네. 사실 저들로서도 우리를 대하기 껄끄러웠을 거야. 조정에 정식으로 함대를 요청하자니 부담되고, 그렇다고 해서 매번 날을 곤두세우면 서로 피곤해지니까. 그래서 적당 선에서 타협을 본 거지.”
“타협이라면…….”
“난 황태구와는 다르네. 매번 힘없는 양민들을 죽이는 건 천하의 멍청이나 할 짓이야. 우리 손으로 직접 손님을 죽이는 꼴 아닌가.”
“…….”
“아, 물론 살생을 꺼려서 그런걸세. 재물 때문이 아니고.”
별로 믿음이 안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송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전적으로 재물 때문으로 보인다.
‘돈에 미친 수적이로구나.’
무송이 삥뜯기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다.
어쨌건 닥치는 대로 빼앗고 죽이던 황태구와 달리 온건파인 무송은 관과 협상을 시도했고, 상당한 수완을 발휘했다.
“우리는 활동 반경이 조금 넓어졌고, 관에서는 수적들에게 죽었다는 탄원이 줄었으니 서로 이득 아니겠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들어오는 걸 허용해 줬다고요?”
“당연히 표면적으로는 아니지. 안 그래도 저기 오고 있군.”
그의 시선 끝에는 화포를 장착한 거대한 군함(軍艦)이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도 서로를 구분할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갑주를 차려입은 장년인 하나가 선미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 누구요?”
“장군, 나요! 사람 몇 명을 내려 주기 위해 왔소.”
“사람? 누굽니까?”
“내 후배들이오. 신분은 내가 직접 보증하지.”
수적 두령의 보증이라니. 잘도 먹히겠다.
그때 관리가 힘차게 외쳤다.
“그러시지요!”
……시벌, 잘 먹히네.
그때 무송이 돌연 품에서 뭔가를 꺼내 힘차게 던졌다.
“받으시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봇짐을 잡아챈 관리가 씩 웃었다.
“매번 안 이러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다음에 제가 거하게 한잔 사지요.”
“뭐, 그럽시다. 성주께서는 잘 지내시고?”
“아흐레 전에 득남(得男)하셨습니다.”
“오, 이런 경사가. 돌잡이 때 꼭 가겠소.”
“당연한 말씀을. 성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고생하시구려.”
“무운(武運)을 빕니다. 채주!”
……염병. 나라 꼴 잘 돌아간다.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하자 군함은 왔던 길로 돌아갔고, 쾌조선은 유유히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굳이 닻까지 내릴 필요는 없겠지?”
“예? 아, 예.”
“충격받았나? 원래 세상 사는 법이 다 그렇지. 그나저나 이제야 좀 그 나이대 후기지수 같군.”
하긴, 현실에서는 더한 일도 벌어지는 마당에 뭐가 문제겠냐.
나는 호탕하게 웃는 무송을 향해 꾸벅 포권을 취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고작 이 정도 일 가지고 도움은 무슨. 말만 하게. 나 선화아(船火兒) 무송이야!”
“아아, 역시 최고의 선배님! 장강을 뒤집어 놓으셨다!”
“으하하하!”
나는 껄껄 웃는 무송을 따라 씩 웃었다.
“그럼 나중에 돌아갈 때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선배님?”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무송이 입을 열었다.
“수하들을…… 보내지.”
“감사합니다!”
장강 택시 개꿀.
* * *
쾌조선의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빨라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나는 마치 바다 괴수를 피하는 것처럼 다급히 물살을 가르는 쾌조선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버뮤다 삼각지대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어린 의생이 그곳에 있었다.
“공자님 덕분에 빨리 왔네요. 감사합니다.”
“노 젓고 키 잡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감사는 무슨. 어디에 무슨 일로 가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하게 지내라.”
비록 며칠 동안이었지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인연이었지 않나 싶다.
평소에는 천진난만하면서 내심 속이 깊은 녀석.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아픔을 잘 이겨 낸 모습이 기특하다.
나는 녀석이 좋은 의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헤어지는데 줄 건 없고. 이걸로 노잣돈이라도 해.”
은자 몇 개를 꺼내어 쥐여 주었더니 문경이 깜짝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고, 공자님. 이건.”
“됐어. 형님한테 용돈 받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금액이 너무 큰걸요.”
“그럼 나중에 갚아. 화타, 아니 신의(神醫) 뺨 치는 의원이 되면 태원진가로 찾아와라.”
“신의……요?”
“그래, 기왕이면 최고가 되야지.”
눈을 깜빡이며 손에 쥔 은자와 나를 번갈아보던 문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꼭 그럴게요.”
“그래. 이만 간다. 잘 지내라.”
각자 인사를 건넨 버뮤다 삼각지대와 나는 몸을 돌렸다.
오랜 뱃멀미로 고생한 혁무진이 슬그머니 옆으로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조장님. 힘들어서 그러는데 반나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한나절만 가면 되니까 도착해서 쉬어.”
“경신법을 써야 한나절이잖습니까. 그리고 사천당가(四川唐家) 사람들이 그렇게 무섭다던데…… 숨 쉬는 것도 눈치 보일 겁니다.”
“그럼 쉬지 마. 죽어.”
“아니, 그게 조장님의 오른팔에게 할 말입니까?”
“뭐라고? 왼손 새끼 손가락이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혁무진의 주둥이가 댓발 튀어나온 그 순간이었다.
“저어, 혹시 지금 사천당가까지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
“…….”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샛별처럼 눈을 반짝이는 문경이 그곳에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마침 저도 사천당가로 가는 길이었는데 동행할 수 있다면 이 은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만 번 고쳐 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
“야.”
“예?”
“알겠으니까 닥치고 따라와.”
시벌, 버뮤다 사각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