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36
#335화
현실의 쓰촨성처럼, 이 세계의 사천도 광활한 면적을 자랑했다.
산서, 하남, 섬서. 이 세 개의 성(城)을 합쳐야 사천의 면적과 비견될 정도니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사스가 대륙.’
이토록 드넓으니 한 성에 세 마리의 호랑이가 공존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구파일방에 속한 아미파(峨嵋派), 청성파(靑城派).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천당문(四川唐門). 혹은 당가(唐家).
사천에 웅크린 세 마리의 호랑이 중 하나이자, 성도에서 가장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니 첫 방문지로는 적격이었다.
‘세 문파의 협조를 얻고 개방까지 합세한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궁기방이 전방을 가리켰다.
“거의 다 도착했군. 사천당문이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눈 앞에 펼쳐진 너른 분지(盆地). 그 위로 높게 솟아오른 석벽이 보였다.
아직 거리가 있어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얼추 십여 미터는 훌쩍 넘어갈 것 같은 높이였다.
“뭐야, 웬 성을 세워 놨어?”
“역사를 통해 배운 게 있으니까.”
“역사?”
“지난 정마대전 때 큰 곤욕을 치렀거든. 마교 놈들이 사천을 점령할 당시, 많은 혈족이 죽고 당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당가타(唐家陀)까지 불타 버렸지.”
“본진 개털렸네.”
“꼭 그렇지도 않다. 후퇴하며 온갖 극독(劇毒)을 풀어놔서 멋모르고 쳐들어간 마교 놈들도 떼죽음을 당했으니. 혹시 사천당가의 가훈이 뭔지 알고 있나?”
“어, 북부는 기억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넌 아무것도 몰라. 궁 스노우.”
미친놈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궁기방이 입을 열었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만 배로 갚는다.”
“캬, 지리네.”
“지렸지. 사천 점령 당시 마교에 붙었던 사마외도(邪魔外道) 놈들은 칠공으로 똥오줌을 지리면서 죽었고.”
“독살?”
“독살, 암살, 독자적으로 추격대를 보내서 추살하기도 하고. 온갖 방식으로 죽었지. 천운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몇 있겠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거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저놈이 당문에서 보낸 암살자가 아닌가, 혹시 찻잔에 독을 탄 게 아닌가. 심리적 압박감이 만들어 낸 감옥에 갇혀 평생을 신경 쇠약에 시달렸을 테니까.
한 손에는 검, 다른 한 손에는 은수저를 들고 방구석에서 벌벌 떨었겠지.
“독과 암기에 관한 한 사천당문은 천하제일이다. 폐쇄적이고, 집요한 것으로는 누구도 못 따라가. 이번 성라대연 때 혹시 사천당문에서 온 사람 본 적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사람도 못 본 것 같다.
심지어 남궁세가처럼 성라대연에 사문의 후기지수가 참여하지 않은 문파에서도 요직의 인물들을 보냈었는데…… 사천당문에서 누가 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없는 것 같은데?”
“없지?”
“어, 진짜 없어.”
“그게 사천당문이다.”
개썅마이웨이, 노빠꾸.
느낌 빡 온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편으로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이러다가 단칼에 거절당하는 거 아냐?’
협조를 구하기 위해 검성 매종학의 서신까지 가져왔지만, 어째 불안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애써 그런 마음을 억누르며 신법을 발휘하고 있을 때, 궁기방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편이 좋겠군.”
“굳이?”
“갑자기 빠르게 다가가면 사천당문에서 좋아하지 않을걸.”
“좋아할 수도 있잖아.”
궁기방이 몇 걸음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바위에는 피처럼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허락 없이 접근하는 자. 혈채(血債)를 치를 것이다.]“걸어가자. 나 아까부터 걷고 싶었어.”
“…….”
“야, 가끔은 이렇게 주위 풍경도 살피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그래야지. 그게 사람 사는 건데.”
나와 궁기방, 그리고 혁무진은 신법을 멈췄지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찬 바람과 함께 한 사람의 신형이 정면으로 쏘아졌다.
쉬이이익!
“와아아아! 안녕하세요!”
“청풍, 이 미친놈아!”
“전 청풍이라고 해요!”
손을 힘차게 흔들며 쏘아지는 녀석의 등에는 비슷한 체구의 소년이 업혀 있었다.
애처롭게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문경에게 청풍이 말했다.
“의생님, 인사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제발 하지 마…….
이상한 거 시키지도 말고, 시킨다고 따라 하지도 마.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낚아채기 위해 발을 뻗었지만, 사천당문의 답장은 그보다 빨랐다.
쐐애애애액! 쾅!
석벽 위에서 맹렬하게 쏘아진 것은 성인 남성의 키만 한 거대한 창이었다. 정확히 청풍의 발 앞에 박힌 창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웬 놈들이냐!”
처처처척!
웅혼한 공력이 실린 외침과 함께 석벽 위로 나타난 수십여 개의 쇠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많은 화살촉 사이, 눈을 부릅뜬 중년인이 우리를 향해 재차 외쳤다.
“외인(外人)은 정체를 밝혀라!”
청풍이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풍인데요!”
“소, 소인은 문경이라 합니다. 부, 부디 자비를 베풀어 병장기를 내려 주신다면 그 은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읍읍!”
그만해, 이 트롤 새끼들아…….
양손으로 황급히 문경과 청풍의 주둥이를 틀어막은 내가 석벽을 향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애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저는 태원진가의 진태경이라고 합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
뭔가를 생각하던 중년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화왕 적천강 대협의 제자라는 그 산서잠룡 진태경?”
“예. 그게 접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뒤따라온 궁기방을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오성과 한음 빌런……이 아니고 개방의 후개인 궁기방입니다.”
“적천강 대협의 제자에 개방의 후개라.”
여전히 미심쩍은 말투와 표정이었지만, 중년인의 경계심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우리를 겨누고 있던 쇠뇌가 밑을 향해 내려갔다.
“본가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나?”
“가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가주님을?”
“예, 중요한 일입니다.”
중년인은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건 동네방네 떠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검성 매종학이 바보도 아니고, 굳이 전서구가 아닌 친필 서신을 써서 직접 전달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가주께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시네. 현재 본가는 일체의 외인도 받지 않고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고 물러나게.”
“말씀만 전해 주시면 됩니다.”
“불가(不可). 내게 이러한 명을 내리신 분이 바로 가주님일세.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면 미리 연락을 취하지 그랬나.”
아니, 뭐가 이렇게 단호박이야.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그런 생각은 궁기방도 마찬가지였는지, 녀석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사천당문이 폐쇄적인 곳이라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동감이다. 냅다 쇠뇌부터 겨누는 태도와 처음의 그 삼엄한 태도는 전시 상황에서나 보일 법한 것이었다.
‘손님 대접 한번 거하게 받는군.’
하지만 협조를 구하러 온 처지에 불평만 할 수는 없는 법. 모든 패를 까진 않더라도 절반 정도는 보여 줘야 당가주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잠시 망설이던 나는 중년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검성 매종학 대협의 서신을 갖고 왔습니다.”
“……!”
“가주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효과는 확실했다. 검성 매종학은 무인들의 우상이자 신(新) 무림맹의 맹주가 될지도 모르는 거물 중의 거물.
최근 일이 년 사이 이름을 알린 우리 같은 애송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으음.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침음성을 흘리며 석벽에서 모습을 감춘 중년인이 돌아온 것은 촌각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그의 첫마디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주께서 허락하셨네.”
중년인의 말이 끝난 순간.
그그그긍.
거대한 철문이 기음을 토해 내며 천천히 아가리를 벌렸다.
* * *
철문을 통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앞서 했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생겼다. 분명해.’
사천당문의 혈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그들의 삼엄한 행동과 긴장한 눈빛, 분위기가 바로 그 증거다.
외당(外堂)을 벗어나 내당(內堂)으로 진입하자 이질감은 더더욱 커졌다.
깡! 깡! 깡!
쉴 새 없이 망치로 뭔가를 두드리는 장인들,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짝을 지어 돌아다녔고 병장기와 암기가 실린 상자들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움직인다.
그런 모습에 나와 궁기방은 서로를 향해 전음을 주고받았다.
– 야, 이거 나만 느낌 쎄하냐?
– 그러게 말이다. 아무리 봐도 전투를 준비 중인 것 같은데.
– 혹시 마두라도 발견된 거 아냐? 정마대전 때 사천당문에 불 질렀던 놈 중 하나라든지.
– 나도 잘 모르겠다. 우선은 입 다물고 모른 척하는 게 좋겠군.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말해 줄 생각이 있었으면 진작 해 줬겠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전음이 내게만 들렸다는 거다.
“와아!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혹시 전쟁이라도 하세요?”
“……!”
“……!”
순간 세상이 정지한 줄 알았다.
주위에 있던 사천당문의 장인이며 무인들이 모든 행동을 멈추고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수백 개의 시선이 암기처럼 전신을 꿰뚫는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청풍 같은 새끼랑 엮였을까.’
일 초. 이 초. 삼 초. 여기가 바로 정신과 시간의 방인가.
입 안이 스핑크스 앞발 부근의 모래알만큼이나 건조해졌을 무렵, 우리를 안내하던 예의 중년인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뭣 하는가? 하던 일들 계속하지 않고.”
그제야 멈췄던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힐끗 바라본 중년인이 우리를 향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다들 입이 무겁게 생겼군. 마음에 들어.”
언뜻 듣기에는 칭찬이다.
하지만 무병장수하고 싶으면 입 닥치라는 소리로 들리는 건 왜일까.
‘왜긴. 시벌.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지.’
독과 암기의 이미지여서 그런가.
분명히 나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인데, 중년인을 포함한 당가의 사람들에게는 뭔가 위험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숨을 참게. 저건 독무(毒霧)야. 냄새부터 고약하지.”
“……아, 예.”
위험한 냄새가 저 냄새였나.
나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청발놈을 노려보며 중년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사이 우리는 다섯 개의 문을 지나쳤고, 여섯 번째 문 앞에서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가주전에는 병장기를 들고 갈 수 없네.”
중년인의 말에 따라 모든 무기를 맡긴 뒤에는 가주전을 지키는 무인들에게 수색까지 받아야 했다.
‘엄청나게 삼엄하네.’
그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암기를 찾기 위해 내 몸을 더듬던 호위 무인이 흠칫 놀라며 외쳤다.
“여기 암기가 있습니다!”
“암기가 아니라 물건이에요.”
“예?”
“제 거라고요. 그 왜, 있잖아요. 그거.”
“……!”
이런 수치 플레이라니.
내가 가주전에서 저걸 꺼내느니, 차라리 독 묻은 암기를 꺼내겠다. 그편이 훨씬 편하게 죽을 테니까.
마지못한 내 허락에 실물을 확인한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 굉장하군.”
“……그냥 아무 말 마시고 통과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알겠네. 하지만 굉장한걸.”
“아, 제발.”
내 애원에 섞인 진심을 읽은 그가 통과를 지시하려다 말고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깜빡할 뻔했군. 거기 있는 자네는 빠지게.”
아, 그래. 저 녀석이 있었지.
중년인이 말한 ‘자네’는 바로 문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듣자하니, 본가에 약방문(藥方文)을 얻으러 온 의생이라지?”
엉겁결에 여기까지 끌려온 문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일행을 잘 만나서 운이 좋군. 사람을 붙여 줄 테니 가서 볼일 보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넙죽 허리를 숙인 녀석이 무인 하나와 함께 사라지자, 중년인이 앞장서서 우리에게 손짓했다.
“들어가도록 하지.”
푸른 돌로 이루어진 스무 개의 계단.
그리고 그 끝에 자리한 문 하나.
“숙부님, 접니다.”
중년인의 말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들어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