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4
#33화
“죽여 주십시오.”
풀어헤친 머리카락,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청년이 무릎을 꿇었다. 청년의 이름은 이소광. 죽은 이소군의 형이자 항산검문의 소문주였다.
“보고해라. 네 입으로 직접.”
서늘한 음성에 막사 내의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항산검문의 중진이며 오랜 세월 강호를 종횡한 고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한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버님…….”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혈랑검 이천백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소광은 떨리는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생존자는 저를 포함한 스물셋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백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세 명의 절정 고수도 잃었다. 이것만으로도 문책을 피하기 어려운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네가 받은 명령이 무엇이냐?”
“……태원진가의 지부 섬멸과 정양까지의 진격입니다.”
“그다음은.”
“길을 봉쇄하고 본대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혼주까지 나아간 이유가 무어냐?”
“정보를,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정보?”
“예. 일문일살 조필이 진태경을 혼주까지 추격하여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한데…….”
“태원진가의 추격대에 쫓기고 있으니 도와 달라고 했겠지.”
이소광은 고개를 떨궜고, 이천백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정보를 누가 전했느냐?”
“조필 휘하의 낭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철썩!
이소광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그 위로 불길 같은 이천백의 눈빛이 쏟아졌다.
“내 아들로 태어난 것에 감사해라.”
결국 항산검문으로 복귀하라는 처분을 받은 이소광이 물러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제는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볼 때였다.
“현재 상황은?”
“이백의 병력을 잃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급하게 끌어모은 낭인들이라 생각만큼 큰 피해는 아닙니다. 문제는…….”
“절정 고수를 셋이나 잃었다는 거지.”
이천백은 속이 쓰렸다. 이십 년 세월을 함께한 항산쌍귀. 그리고 거금을 들여 고용한 조필도 죽었다. 절정 고수는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존재다.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
“더 끌어모으게. 흑시(黑市)에서 낭인들을 사 오건, 마적 놈들을 고용하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출이 너무 큽니다. 지금쯤 혼주에서의 일이 다 알려졌으니 몸값을 올리려 들 테고요.”
“믿을 만한 놈들도 아닙니다. 특히 마적들은 인간 백정 같은 자들 아닙니까. 그런 놈들을 고용했다가는 차후에도 본문의 평판이…….”
하지만 이천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잘됐군. 전부 고용해.”
“문주!”
“이곳에 모인 머릿수만 물경 오백입니다. 두 배가 넘는 병력에 절정 고수의 숫자도 밀리지 않습니다.”
“내 아들놈도 그렇게 생각했지. 결국 혼주에서 개박살이 났고.”
“그건…….”
“인간 백정이건 뭐건 신경 쓰지 말고 총력을 기울여. 이 전쟁에서 지면 평판이 아니라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이천백의 불호령에 중진들은 설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무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혼주에서의 패배도 패배지만, 진태경이 일문일살 조필을 죽였다는 소식에 동요하고 있습니다.”
진태경. 원수의 이름을 들은 이천백은 속이 뒤틀렸다.
‘그런 멍청한 소문을 믿는 놈들이 있단 말인가?’
진태경, 그 한심한 놈이 아들을 독살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절정 고수를 잡았다니. 속내가 뻔히 보이는 계략이다. 이천백은 태원진가의 비열함에 치가 떨렸다.
“그따위 헛소문을 퍼트리는 놈들을 색출해 내라. 한 놈도 빠짐없이!”
몇 놈을 본보기 삼아 목을 벤다면 사기는 떨어지겠지만 붕괴는 막을 수 있다. 지금은 억누르고 나아갈 때다.
“사흘이다. 사흘 후, 태원으로 진격한다!”
무림의 은원(恩怨)이란 그런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쓰러지기 전까지 은원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모두 빼앗아 주마. 너희가 그랬던 것처럼.’
* * *
“대단한 회복력이군요.”
의원이 혀를 내둘렀다. 정신을 차린 지 이틀째. 지난 밤 사이 딱지가 떨어지고 뽀얀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의원 생활 십 년 만에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내가 보기에도 경이로운 회복 속도다. 화염신장의 열기로 녹아내린 살갗, 골절된 뼈와 깊은 검상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아, 거기에 더해 내상도.
‘아마 레벨 업의 효과겠지.’
현실에서도 비슷한 효력을 내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소위 힐러(Healer)라 부르는 극소수의 헌터들이 사용하는 치유 마법이 바로 그것이다.
‘완전 치유까지는 무리인가?’
다소 아쉬웠지만 차라리 잘됐다. 레벨 업 한 번에 모든 상처가 회복됐다면 의심을 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의원은 괴물 보듯이 나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허어어. 괴이한 일이로다. 백년설삼의 효능이라 보기에는 너무 과한데…….”
“백년설삼?”
무협 소설에서 본 기억이 있다. 백 년 묵은 산삼. 뭐 그런 거 아닌가?
‘그게 갑자기 왜 나와?’
어리둥절한 내게 의원이 설명했다. 그는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NPC중 하나였다.
“작년 이맘때쯤에 약왕당 창고가 털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하. 듣자마자 감이 온다.
그때 도난당한 약재 중 백년설삼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범인은 보나 마나…….
“약왕당주께서 노발대발하셨죠.”
의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백년설삼이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니까요. 한 번에 이십 년 공력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을 훔쳐 드셨으니.”
“이십 년 공력이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내 통제를 따르지 않았던 제삼의 공력.
‘그거였구나.’
동시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마지막 순간, 스킬을 쓰면서 백년설삼의 이십 년 공력 중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순전히 내 통제에 따른 것이 아닌 폭주였기 때문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그걸 일회용으로 쓰다니.’
구겨지는 내 표정을 오해한 의원이 황급히 말했다.
“물론 공자님께서 큰 뜻이 있으셔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거겠지요.”
큰 뜻은 염병. 몸보신이나 하려고 먹었겠지.
백년설삼의 공력 덕분에 살긴 했지만 역시 아깝다. 아까워 죽겠다.
“거의 회복되셨으니 거동에는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그럼 전 이만.”
의원이 허둥지둥 자리를 뜨자마자 시스템창을 열었다.
‘상태창 오픈.’
띠링.
상태창
[Lv.30 진태경]직업 : 이류 무인
명성 : 410
칭호 : 4개 (칭호 효과 적용 중)
– 명가의 자제 (모든 능력치 +5, 명성 +50)
– 가문의 수치 (모든 능력치 –5, 명성 –50)
– 초보 수련자 (수련 속도 +10%)
– 승부사 (일대일 승부 시 전투 관련 능력치 10% 향상)
근력 : 115 체력 : 120
민첩 : 116 지력 : 15
매력 : 15공력 : 15년
잔여 포인트 : 0
보는 순간 뿌듯함이 밀려온다.
‘많이 컸다.’
산적 나부랭이한테 벌벌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나름대로 고수다. 조필을 잡으면서 레벨이 껑충 뛰었고 막대한 명성치도 얻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아 있는 백년설삼의 기운을 일부 흡수한 덕에 추가로 얻은 4년의 공력, 거기에 더해서…….
스킬창
[일섬]등급 : 절정
경지 : 이 성
제한 : 진태경
효과 : 체력과 공력을 소모하여 강력한 일격을 날린다. 정도에 따라 일정 시간 무기력 상태에 빠진다.
새로운 무공, 아니 스킬도 생겼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스킬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소모되는 양과 힘을 조절할 수 있다.’
힘껏 찌르기. 지금은 일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스킬은 남발이 불가능했다. 순간적으로 몇 단계 위의 파괴력을 낼 수 있지만 그 한 방으로 모든 힘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아니, 원래 조절이 가능한 스킬이었을지도.’
현실에서의 나는 F급 헌터다. 신체 능력도, 몸에 지닌 마나도 보잘것없다. 하지만 이 게임, 무림에서만큼은 다르다.
15년의 공력과 2, 30레벨 차이의 NPC들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무림인인 것이다. 힘을 담아내는 그릇이 달라지니 본래 있었던 활용도가 드러난 셈이다.
‘또 강해졌다.’
혁무진한테 탈탈 털리고 무공을 익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절정 고수를 잡았다.
창밖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이름을 연호한다.
무슨 산서잠룡이니, 가문의 영웅이니 하면서.
‘영웅이라.’
살면서 저런 말을 들어 볼 줄이야. F급 헌터 나부랭이인데다 안전 제일이 삶의 모토인 나와는 인연이 없던 단어다.
나는 가만히 누운 채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희고 부드럽던 도련님의 손바닥에는 어느새 굳은살이 빼곡하게 박여 있었다.
‘이 손으로 조필을 쓰러트렸단 말이지.’
내가 쓰러트린 자들을 모두 합하면 수십이 넘어간다. 산적부터 낭인, 일류라고 평가받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절정 고수, 일문일살 조필조차 쓰러트렸다.
문득 위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고 했지.’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분명히 강자다. 지금껏 상대한 적들로부터 살아남았고 영웅으로 불리고 있으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 보자면…….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현실의 나는 초라하다.
3평 남짓한 고시원 원룸에서 먹고 자며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다. 영웅이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매일 살아남기를 기도하며 싸우는 최하급 헌터 진태경.
그게 나였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달라.’
F급 헌터 진태경은 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해냈다. 최소한…… 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을 적들의 손에서 지킬 수 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영웅으로 불린다.
이곳의 모든 게 가상에 불과하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NPC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게임이 무섭다니까.’
게임 중독 현상인가?
어느새 무림인 진태경으로 사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곳은 게임이니까.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나가야 할 때다. 불가능이 가득한 그곳, 현실로. 그곳에 가족이 있고 진정한 내가 있다.
‘퀘스트창 확인.’
띠링.
퀘스트
[로그아웃]이제 당신은 이 험난한 무림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더욱더 강해지고, 유명해지십시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
등급 : 메인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일류] 경지 달성 (미완료)
Lv.30 달성 (완료)
명성 500 달성 (410/500)
보상 : [로그아웃]
로그아웃. 반짝거리는 네 글자를 보는 순간 숨이 막힌다.
이제 로그아웃까지 남은 조건은 두 개. 명성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다. 나에 관한 소문이 퍼져 나갈수록 계속해서 오를 테니까. 문제는 따로 있다.
“일류.”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대체 뭐가 필요한 거지?
레벨도, 능력치도, 명성도 아니라면…….
‘공력? 아니면 무공의 경지를 더 올려야 하나?’
그때 문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소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맞다. 모를 땐 물어보는 게 최고다. 그런 의미에서 절정 고수인 진위경은 최고의 과외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