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41
#340화
중년의 여승, 묘령사태(卯嶺師太)는 파리한 안색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 신니께서…… 입적하셨습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불길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달려온 청성파의 두 장로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묘령사태, 그게 무슨 말인가? 신니께서 입적하시다니!”
“그럴 리 없네! 그럴 리가 없어!”
신니가 누구를 뜻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적천강의 기억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 전대의 고수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성격이 아주 화통했다. 적들 앞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았고 무공도 뛰어났어. 굉도, 그 게으름뱅이 땡중보다도 나을 때가 있었지.’
정마대전 당시 마교는 그녀를 혈나찰(血羅剎)이라 부르며 두려워했고, 중원 무림은 경천신니(驚天神尼)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과거의 영웅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 그 후에도 그녀는 아미산에 남아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아미파 유일의 초절정 고수이자 존경받는 장문인.
그런 경천신니가 죽었다.
‘독왕에 이어 경천신니까지.’
참 빌어먹을 일이다.
나는 줄곧 입 안에서 맴돌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흉수가 누굽니까?”
“……!”
“……!”
묘령사태, 궁기방과 혁무진. 그리고 청성파의 두 장로.
다섯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해 쏠린다. 다섯 쌍의 눈동자에 담겨 있는 감정은 놀라움이었지만, 어디에서 기인했는가는 달랐다.
“흉수라니.”
“서, 설마 경천신니께서 누군가에게……?”
청성파의 두 장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경천신니의 입적 소식에 놀란 탓에 미처 살피지 못했던 묘령사태의 현재 모습을.
검붉은 핏물이 말라붙은 의복과 푸른 안색.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푹 떨궜다.
“역시 진 소협은 알고 있었군요.”
역시?
내 눈빛에 궁기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경천신니를 시해한 흉수가…….”
“사천당문의 그놈과 동일인이거나 연관되어 있겠지. 내 생각도 그래.”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장로들이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흉수를 알고 있었다니. 사천당문에도 변고가 벌어졌단 말인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게. 어서!”
이제는 숨길 수 없다.
어쩌면 독왕이 살해당했을 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입술을 뗐다.
“며칠 전, 독왕 당사문 대협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해야겠지만요.”
“……!”
“가주이신 만독수라 당사독 대협은 복수를 천명하셨고, 지금쯤 가솔들과 함께 놈을 추격 중일 겁니다.”
하지만 희생자는 독왕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충격에 빠진 장로들을 뒤로하고, 묘령사태를 똑바로 직시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중년인이었어요. 한쪽 팔이 없는.”
“외팔이란 말입니까?”
“네. 그는, 그는…….”
묘령사태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귀(惡鬼), 그 자체였어요.”
* * *
쉬쉬쉬쉭!
거센 바람, 한 걸음을 뻗을 때마다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품에 끌어안은 여승의 무게는 놀랄 만큼 가벼웠고, 맞닿은 몸을 통해 느껴지는 기운은 위태로웠다.
‘이런 몸 상태로 여기까지…….’
묘령사태는 자신의 이야기를 미처 다 끝내지도 못한 채, 한 바가지의 피를 토하며 혼절했다.
한 걸음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는 궁기방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태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가?”
“심각해. 우선 급한 대로 공력을 불어넣어서 생기를 돋우긴 했지만…… 이걸로는 무리야.”
궁기방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분명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태께서도 버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셨다.”
“그래도 말렸어야지, 이 자식아.”
“……도저히 말릴 수 없었어. 미안하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어 버렸다.
나도 안다. 궁기방과 혁무진이 아니라, 내가 직접 갔어도 묘령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을.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쥐어짜 낸 그녀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장문인과 세 분의 장로님까지. 모두 악귀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우리는 웃으며 멀어지는 놈을 쫓을 수 없었어요.’
불교의 성지로 불리는 아미산에 악귀가 내려온 것은 불과 사흘 전이라고 했다.
여느 참배객처럼 산을 오른 악귀는 경천신니가 기거하는 거처를 찾았고, 때마침 그 자리에는 세 명의 장로가 있었다.
그리고 벌어진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전투. 봉우리가 무너지고 아미산이 몸을 떨었다고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변고를 알아차리고 달려간 묘령사태가 목격한 것은, 이미 숨을 거둔 네 사람의 여승과 한 마리의 악귀였다.
‘그리 볼 것 없다. 아미의 불법(佛法)보다 내 살법(殺法)이 강했을 뿐이니.’
‘어, 어찌 이런 짓을!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소!’
‘우습구나. 너희가 말하는 부처와 하늘은 모두 거짓이요, 허상이다. 내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보여 주마.’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흉수는 묘령사태에게 일장(一掌)을 격중시킨 뒤 사라졌고,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아미파에 두 청년이 찾아왔다.
궁기방과 혁무진으로부터 청성파가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미산을 내려왔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도와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악귀를…… 쿨럭!’
의식을 잃던 마지막 순간까지 부르짖던 묘령사태의 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외팔의 중년인. 전대의 초절정 고수인 경천신니와 세 장로를 단신으로 죽일 만큼 가공할 무위(武威)의 소유자.
놈은 어떤 목적으로,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그리고 놈이 독왕 당사문을 살해한 그 흉수와 동일인일까.
‘만약에 동일인이 아니라면?’
생각에 거기에까지 미치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만약 두 사건의 흉수가 각각 다른 인물이라면…… 사천 땅이 사지(死地)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다.
막힘없이 나아가던 발걸음이 무거워지던 그때, 청성파의 두 장로가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네.”
“자네에게는 미안하네만, 지금으로서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문이 염려되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사천당문에 이어 아미파까지 당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다음이 청성파의 차례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
“곧장 청성산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더 나이가 많은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노부는 제자들 일부를 인솔하여 아미파를 도우러 걸세. 사제는 나머지 제자들과 함께 본산으로 귀환할 것이고. 자네는?”
“묘령사태께서 입은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해서요. 의원을 찾은 다음, 사천당문에 연락을 취할 생각입니다.”
현재 문파의 상당수가 빠져나간 사천당문과 청성파는 무주공산(無主空山)과 같다. 만일을 대비해 경고해 줘야 한다.
사문이 같은 입장에 처한 장로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일단은 묘령사태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하게. 사천당문에는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 놓지.”
“감사합니다.”
“천만에. 무운(武運)을 빌겠네.”
“저 역시.”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한 우리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두 장로가 제자들을 인솔하여 각각 북쪽과 동쪽으로 사라지자,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한 넷뿐이었다.
‘아, 적천강과 묘령사태도 있었지.’
환자를 고치러 사천까지 왔는데, 신의는커녕 환자가 한 명 더 늘었다.
‘뭐지, 몰래 카메라인가.’
시벌, 그럴 리가 있나.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차 걸음을 떼려던 그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흙을 밟으며 올라오는 사뿐한 걸음걸이와 경쾌하게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 산길을 따라 올라오던 소년 하나가, 마침내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어어?”
낯익은 얼굴. 소년의 이름은 문경이었다.
나는 불과 며칠 만에 다시 만난 녀석이 반가웠지만, 그보다는 앞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문경아.”
“다들 이곳에는 어쩐 일로…… 네?”
“너, 의생 맞지?”
아직 기억하고 있다. 쾌조선의 갑판에서 진료를 봐주던 녀석의 모습을.
정확히 어떤 치료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수적들의 말에 의하면 제법 실력도 뛰어난 수준이다.
“네에. 그렇긴 합니다만…….”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한 문경의 시선이 내 품에 안긴 묘령사태를 향했다. 그것으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졌다.
녀석이 품에 들고 있던 행낭에서 침구(鍼灸)가 든 목갑을 꺼내며 성큼 다가왔으니까.
“우선…… 환자 상태부터 볼까요.”
* * *
스스슥.
맥을 짚고, 침을 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촌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물 흐르듯 매끄럽게 처리했음에도, 문경의 얼굴에는 그늘이 깔려 있었다.
“……어때?”
결과가 썩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경이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좋지 않아요. 정말로.”
“최소한의 치료는 된 거지?”
“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경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녀석은 나이도 어리고, 의술에 발을 들인 기간도 그만큼 짧으니까.
내가 원했던 것은 바로 그 최소한의 치료였다.
“고생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최대한 빨리 성도로 가서 방법을 찾으면…….”
“정말 그럴까요?”
“뭐?”
“한 달 후면 살이 문드러지고, 넉 달 후에는 뼈가 녹아내릴 겁니다.”
“잠깐만. 인마, 너 지금 무슨 소리…….”
그러나 문경의 나직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반년을 보낸다면 그때부터는 산송장과도 같은 모습이 되겠지요. 길어야 일 년, 장기가 썩어 들어가면 그제야 숨이 끊길 겁니다.”
“……뭐?”
“성도로 간다 한들 마땅한 방도는 없을 거예요. 민간에서 찾을 수 있는 의원들은 고관대작들이나 앓는 부인병(婦人病)만 다룰 수 있지요. 그리고 사천당문은…….”
두 번 놀랐다.
묘령사태가 입은 부상이 그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침착하게 이어가는 문경의 낯선 모습에.
“저잣거리에 당문의 무인들이 서쪽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그들이 돌아오려면 족히 며칠은 기다려야 할 터. 그때는 늦습니다. 지금 상처를 입은 지 얼마나 되셨나요?”
혁무진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사, 사흘 좀 넘었나.”
“사흘…….”
작게 신음을 흘린 문경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흑수인(黑手印)은 무시무시한 사공입니다. 칠주야를 넘기면 돌이킬 수 없어요.”
덥썩!
거기까지였다. 인내심이 바닥 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의 멱살을 잡아챘다.
“네가…… 네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아직 십 대에 불과한 소년 의생이 이 자리의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사공(邪功)을 입에 담았다.
내가 알고 있던 문경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해. 어서.”
서늘한 내 기세에 꿀꺽, 침을 삼킨 문경이 대답했다.
“전부 스승님께서, 스승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스승님?”
“네, 네에. 콜록!”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줄기 깨달음.
어느새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린다.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