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49
#348화
오와 열을 맞추어 서 있는 흑의인들. 거대한 동공을 메운 것은 족히 수백을 헤아리는 흑의인들의 머릿수뿐만이 아니었다.
기세.
깊게 가라앉은 눈과 철탑처럼 선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숨 막히는 기세가 동공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아우르는 한 사람의 거인이 우뚝 자리했다.
“삼괴(三怪).”
우우웅.
웅혼한 공력이 실린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자 흑의인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두에 있던 세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걸음 앞으로 나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년인, 서천마군의 발치에 부복하며 외쳤다.
“기련산의 후배들이 서천마군(西天魔君)께 인사 올립니다.”
얼굴, 체형, 목소리.
모든 것이 놀라울 만큼 닮은 세 노인은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들이었다.
어미는 그들을 낳다 죽었고, 아비는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떠났으며, 척박한 청해 땅에 남겨진 삼 형제는 사람들의 멸시를 피해 광활한 산맥 어림에 숨어 살았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던 어느 날, 삼 형제는 돌아왔다. 기련삼괴(祁連三怪)라는 이름으로.
“못 본 사이 많이 늙었군. 이제는 삼노(三老)라 불러도 무방하겠어.”
“아, 아니옵니다. 마군께서 계시온데 저희가 어찌.”
기련삼괴는 한때 청해성을 피로 물들였던 악귀들. 그러나 서천마군의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기련삼괴가 마치 한 사람인 양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 한데 마군. 송구하오나 한쪽 팔이…….”
“이것 말이더냐.”
자신의 텅 빈 한쪽 소매를 바라본 서천마군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목숨값으로 치렀다.”
“그 말씀은…….”
“당문과 아미의 두 늙은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
동공 안의 공기가 격동으로 떨렸다.
독왕과 경천신니가 누구인가. 무림사에 자신들의 족적을 새긴 거인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초절정 고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 명을 달리했다.
기련삼괴와 흑의인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다면.”
“그래.”
서천마군의 눈동자에서 광망이 번뜩였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 * *
지금 나는 눈을 감고 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정신을 집중한다.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형상이 나타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해맑은 웃음 뒤에 발톱을 숨긴 청년의 이름은 청풍이다.
“우선 복호권(伏虎拳)으로 은인의 어깨, 가슴, 배를 차례대로 노릴 거예요.”
어둠 속, 상상으로 만들어 낸 청풍의 신형이 움직였다.
빠르다. 단 한걸음으로 거리를 지우고 달려드는 녀석의 주먹이 흐릿해진다. 쉬쉭, 어디선가 강맹한 파공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 정도는 쉽게 피하지. 대각선으로 반보 물러서며 옆구리를 향해 일 권.”
“난화수(亂花手)로 힘을 흘리며 물러난 후 매화삼십육검으로 응수하겠어요.”
“초식은?”
“천하일단(天下一斷).”
천하일단은 매화삼십육검의 수많은 초식 중에서도 가장 강맹한 축에 드는 절초다.
과거 청풍과 한창 비무를 할 당시에도 저것만큼은 막는 대신 피하는 걸 선택했었다.
“너무 세게 나오는 거 아냐?”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전력을 다해야죠.”
“언제는 은인이라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헤헤. 어쨌든 천하일단이요.”
천하일단.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둠 속, 난화수로 힘을 흘린 채 타격 없이 물러난 청풍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감과 동시에 섬광이 뿜어져 나온다.
쏴악.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횡으로 솟구치는 나오는 검기가 눈앞에 선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튕겨 낸다. 화룡신창 일 초식. 화룡일미(火龍一尾).”
“막을 수 없을걸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겨룬 게 언제였지?”
“으음. 일 년 전쯤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 나한테는 길었어. 하루가 십 년처럼 느껴질 만큼.”
“……!”
“다시 생각해 봐. 내가 막을 수 없는지.”
잠시 말이 없던 청풍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은인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계속하자.”
나와 청풍은 한참을 논무(論武)에 매진했다.
직접 겨룬 것은 일 년이 넘었지만, 성라대연부터 지금까지 서로의 무공과 그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좌로 삼 보. 매화오품지.”
“매화오품지는 훌륭한 무공이지만 급소만 주의하면 상관없어. 따라붙으며 가슴을 향해 멸염신권.”
각자가 그려 낸 모습 속에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이 이어진다.
백, 이백, 얼마 지나지 않아 주고받은 수가 오백 합을 넘겼을 때, 청풍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암향표로 이 보 앞까지 다가서며 매화삼릉검(梅花三凌劍).”
갑자기?
청풍은 나보다 근접전에 취약하다. 화산파의 뛰어난 신공절학을 익혔지만, 문파의 뿌리가 검공에 있기 때문인지 장공에 관해서는 열화문이 약간 앞선다.
그럼에도 이렇게 들어온다는 것은…….
‘허, 그런 건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역시 청풍이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눈을 떴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슬그머니 실눈을 뜬 청풍이 묻는다.
“은인, 왜요?”
“오늘은 여기까지.”
“아앗, 어째서!”
“아쉬워서.”
“네?”
“나중에 직접 겨뤄 보자. 이런 논검이 아니라 진짜 병장기를 맞대고.”
겨우 논검으로 결과를 내는 건 너무 아쉽다. 그러니 후에 서로 전력을 다한 승부를 내보자는 뜻이었다.
청풍은 아이처럼 순수할 뿐, 결코 멍청한 녀석이 아니니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병장기를 왜 맞대요? 부딪치는 거 아니에요?”
“…….”
아냐. 그냥 멍청한 놈일지도 몰라.
섣부른 판단에 후회하는 내게 청풍이 졸라 댔다.
“저 심심해요, 은인. 그냥 계속하면 안 돼요?”
“아, 청 소협. 혹시 그거 들었어?”
“네?”
나는 청풍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사천당문에 전직 황실 숙수님이 계시다는데.”
“황실 숙수, 요?”
“요리를 기깔나게 하신대. 특히 다과류.”
“헙.”
순간 눈동자가 몽롱해진 청풍이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요. 저는 은인과 함께 적 할아버지를 지켜야 해요.”
“괜찮아. 어차피 내가 여기 남아 있으…….”
“그럼 다녀올게요!”
“……어, 그래.”
쐐애애액!
뭐지, 총알 신법인가.
청풍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자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을씨년스러운 한기와 악취가 공존하는 공간. 치료가 시작된 이후 단 한 걸음도 벗어난 적 없는 지하 뇌옥이다.
“이제 겨우 나흘째.”
혼잣말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지하 뇌옥에서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더디게 흘렀다. 햇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곳이라서 라기보다는, 기다리는 사람만이 느끼는 초조와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심정이다.
“그냥 치료실 앞에 있을 걸 그랬나.”
말해 놓고도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치료실 문 앞을 서성여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오감(五感)으로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다가, 견디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지하 뇌옥을 서성일 것이 뻔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나저나 혼자 남겨지니까 너무 조용하네.’
지난 사흘 동안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청풍이 사라지자 왠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다.
당사독의 명으로 궁 노인까지 뇌옥 출입이 불가능해 졌으니, 지금의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된 셈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혼자는 아니구나.’
한창 적천강의 치료에 몰두하고 있을 신의와 문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 뇌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십여 명의 죄수들. 그들이 바로 내 룸메이트다.
‘썩 좋은 룸메이트는 아니지만.’
화장실 물 안 내리고 수시로 애인 데려오는 놈들이 아닌, 하나같이 강호에 흉명을 떨친 마두들이다.
제아무리 갇혀 있다지만 그런 놈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더 귀찮은 건…….
뎅, 데엥, 데에엥.
‘저놈들 밥을 내가 챙겨 줘야 한다는 거지.’
나는 익숙한 종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궁 노인이 자리를 비운 지금, 누군가는 죄수들의 생사와 끼니를 챙겨 줘야 했고 그게 바로 나다.
지금 막 울린 종은 외부에서 식사 시간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하루 한 번이라 그나마 낫긴 한데.’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뇌옥 구석진 곳에서 낡아빠진 나무통 하나와 그 안에 아무렇게나 뒤섞인 음식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상으로 연결된 구멍을 통해서 흘려보낸 것으로, 말이 좋아서 식사지 숫제 짬통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먹이 줄 시간인가 보군.’
사흘 전, 당사독이 먹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었다.
사천당문은 이곳의 죄수들을 개, 돼지처럼 다뤘다.
아니, 오히려 개나 돼지가 낫다. 적어도 가축들에게는 궁 노인이 으스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각종 고문 기구를 들이대는 깜짝 이벤트는 없을 테니까.
“읏챠.”
나는 사육사의 마음으로 짬통을 들고 뇌옥을 돌아다녔다.
굵은 창살 너머에는 강철 사슬에 사지가 구속된 죄수들이 앉아 있었고,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길쭉한 국자로 한가득 퍼서 그들의 앞에 놓인 낡은 사발에 담아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오랜 투옥 생활과 고문으로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죄수들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을 걸고는 했다.
“못 보던 얼굴이군.”
“사흘째 보는데 뭔 개소리야.”
“나를 풀어다오. 하면 네게 천하를 오시할 무공을 전수해 주마.”
“여기 처박혀 있는 거 보면 천하가 무시할 무공 같은데.”
“놈…… 내 이곳을 나가기만 한다면 직접 찢어 죽여 주마.”
“오, 굉장한데. 궁 노인한테 그대로 전해 줘야겠네.”
“제발 그것만은!”
온갖 회유가 끊이질 않았다. 자신의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는 놈도 있었고, 한때 채양보음(採陽補陰)의 수법으로 당문 직계의 정기를 빨아먹었다는 중년의 미부인이 유혹해 오기도 했다.
“아이야. 더 가까이 오지 않으련? 내가 천상을 보여 줄게.”
“크롸롸 아스카. 우에하라 노인.”
“……응?”
“대륙은 섬나라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처먹도록.”
“얘, 얘! 야, 이 자라 새끼야!”
나는 악에 받친 고함을 흘려들으며 마지막 뇌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장 구석지고 음습한 곳에 위치한 그곳에는 머리를 산발한 괴인(怪人)이 있었다.
‘이 뇌옥에서 가장 얌전한 노인네지.’
동시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잘려 나간 사지 근맥과 다른 죄수들보다 몇 배는 무겁고 튼튼한 구속구가 그 증거였다.
덜그럭. 퉁.
정체불명의 음식물이 담긴 사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노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군.”
나는 순간 멈칫했다.
사흘 만에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에 관한 이야기라니, 내가 언제?”
“사흘 전. 궁 가가 그러지 않았더냐.”
궁 가? 궁 노인?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 그럼 혹시 당신이 곤륜파 현판에 오줌을 갈겼다는…….”
“그래. 노부가 바로 천력마(天力魔)…….”
“곤륜파 노상 방뇨범이 당신이었군.”
“…….”
노인, 천력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