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50
#349화
잠시 침묵하던 노인, 천력마가 입술을 뗐다.
“……노상 방뇨범이라니. 노부를 그런 욕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
아, 내가 실수했구나.
한때 천하에 흉명을 떨친 마두께서 듣기에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노상 방뇨범보다 적절한 단어를 제시해 주었다.
“음, 아니면 오줌싸개?”
“이, 이놈이…….”
“싫으면 새 나라의 지린이.”
“노부는 지리지 않았다!”
“그럼 싼 이. 한여름 밤의 오줌. 피쳐링 곤륜파.”
“……!”
나는 별다른 대꾸도 못 하는 천력마를 보며 혀를 찼다.
“노인네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말을 걸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듣고 싶지도 않고 말 섞기도 싫으니까 밥이나 처먹고 실컷 싸쇼. 똥이든 오줌이든. 둘 다 같이 하시든가.”
“자, 잠깐.”
거참. 귀찮게 구네.
배식을 마치고 막 뇌옥을 나가려던 나는 짜증 섞인 얼굴로 돌아섰다.
“왜, 뭐.”
“물어볼 것이 있다.”
“그쪽이 물어볼 게 있으면, 내가 꼭 대답해 줘야 하나?”
하지만 왠지 모를 절박함에 사로잡힌 천력마는 굴하지 않았다. 한때 옷이라고 불렸을 넝마 쪼가리를 걸친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신교, 신교는 지금 어찌 되었느냐?”
“신교?”
“그래, 천마신교 말이다!”
“아아, 마교.”
양 진영에서 부르는 명칭이 달라 순간 헷갈렸다.
나를 포함한 무림인 대다수에게는 느그 마교지만, 같은 편인 마교도 입장에서는 우리 신교일 수밖에 없다.
특히 눈앞의 천력마는 마교도 중에서도 상당한 흉명을 떨친 마두가 아닌가.
“왜, 오래 갇혀 있었더니 고향 생각나서 그래?”
“말해다오.”
“그건 어렵지 않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잘 몰라.”
“……뭐라?”
“저 멀리 처박혀 있는 마교가 뭘 하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중에 마교 출신 신입이 옆방 쓰게 되면 물어보시든지.”
천력마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넌 화왕의 후인이 아니더냐. 한데 본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
“단전이 망가졌다고는 하나, 아직 듣는 귀는 있느니라.”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정정하기도 하셔라. 어디까지 알고 있지?”
“화왕이 이곳에서는 부상을 치료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흠.”
제법 눈치가 빠른 늙은이다.
청풍이 몇 번 적천강의 이름을 언급하긴 했어도, 다른 죄수들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고 들었다고 해도 상황을 유추하기 어려운 대화였다.
‘말은 아끼고, 귀는 열어 둔다 이건가.’
조금의 틈만 보이면 온갖 회유를 일삼는 다른 죄수들과는 다르다.
나는 눈앞의 늙은이에게 약간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마교에 관한 소식을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 거지? 이미 잡혀 온 지 오래됐으면서.”
“어언 사십여 년이 되어 가지.”
“그때는 이미 정마대전도 끝났을 무렵인데. 그럼 대충 어떻게 됐는지 알지 않아?”
“대충?”
천력마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교에 대해 노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도 오줌 좀 싸셨나 보네.”
“한때 대천마신교의 장로였던 노부이니라. 지엄하신 교주의 명을 받들어 청해성을 복속시키고 성전(聖戰)의 포문을 연 것도 노부였지.”
“성전은 개뿔이.”
퉁명스러운 대답과는 달리 나는 내심 놀랐다.
‘이거 생각보다 거물인데?’
그동안 이것저것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마교에는 십대 장로인지, 칠대 장로인지 하는 거마(巨魔)들이 있다고 들었다.
곤륜파 현판에 오줌을 갈긴 시점에서 보통 마두가 아닐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지하 뇌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추레한 늙은이가 마교의 장로였을 줄이야.
“노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모양이군.”
“당연하지. 그게 언제적인데. 천력마라는 별호도 오늘 처음 들어 봤어.”
“……허허. 벌써 세월이 그리되었나.”
나는 자조 섞인 헛웃음을 흘리는 천력마를 보며 뇌옥 벽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그래서, 사십 년 전 마교의 장로셨던 분께서 나한테 뭘 묻고 싶으신 걸까?”
“최근 본교에 대해 알고 있는 소식들을 가감 없이 모두 말해다오.”
“글쎄. 어째 꺼림칙한데.”
“노부는 어느덧 구순(九旬)을 넘겼고 영육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미 죽을 날을 받아 둔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이다.”
“온갖 악행을 저지른 마두의 부탁이겠지.”
“악행이라…… 노부가 저지른 살생에 관한 죄는 달게 받겠다. 하나 도대체 무엇이 마(魔)라는 말인가? 본교와 너희는 각자의 신념에 기대어 오랜 세월을 반목했고, 명운을 건 싸움에서 패배했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야.”
천력마는 또렷한 목소리로 한탄하듯 말을 이어 갔다.
“고작 그것으로 누가 바르고 틀린가를 말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때의 천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과 같았다. 만일 너희가 먼저 감숙과 청해를 넘어 본교에 도달했다면, 천하의 대의와 발본색원(拔本塞源)이라는 초라한 변명을 앞세워 교민들을 학살했겠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아해야.”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는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공이 전폐당한 채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이 아닌, 한때 일군(一群)을 이끌고 천하를 휩쓸던 장군이자 초절정 고수의 그것이었다.
“노부는 똑똑히 보고 겪었다. 죽고 죽이는 전쟁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악해질 수 있는지. 성전을 부르짖던 본교의 교도도, 멸마를 외치던 구파일방의 장문인도 예외는 아니었느니라. 심지어는…….”
그 순간. 불타오르던 안광은 사그라들었고, 씁쓸한 목소리만이 잿가루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본교의 교주께서도 그러하셨지. 처음의 신념을 잃고 타락해 버리고 말았어. 그래, 어쩌면 너희 정파인들의 말처럼 본교는 마교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천력마의 말을 듣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그가 했던 말들은 내가 최근 깨달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선인도, 악인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오랜 세월 이어진 반목.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앞에서 화섭자를 쥔 채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마교와 정파 무림.
마침내 불을 붙인 것은 마교였으나, 정파가 먼저 불을 붙였다면 어땠을까.
노호검객, 태을무정검이 무공을 모르는 마교의 양민들을 가만히 놔두었을까?
‘그럴 리가.’
문득 그 두 사람과 천력마가 겹쳐진다. 누가 흰색이고 누가 검은색인가. 흘러간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것인가.
빌어먹을, 모르겠다.
질끈 입술을 깨문 나는 차가운 벽면에서 등을 뗐다.
“나한테 그런 거 말해 봤자 소용없어.”
천력마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미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만큼 덧없는 것도 없으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마교에 빠삭하지도 못하고. 차라리 아는 거 많은 거지가 나 대신 여기 있었다면 원하는 소식을 전해 줬을지도 모르지.”
“혹시, 본교가 패망했느냐?”
“글쎄, 그건 아닌 모양이던데. 들어보니 어떻게든 명맥은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야.”
근래에 암천이라는 이름이 너무 두드려져서 그렇지, 정파 무림의 영원한 숙적 포지션은 기본적으로 마교다.
거기에 더해 암천과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마당이니, 하남에 있는 무림맹 총단에서는 지금쯤 마교와 암천에 관한 조사에 한창일 것이다.
“정마대전 당시 엄청난 타격을 받아서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고 듣긴 했지.”
중원(中元)이 괜히 천하의 중심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풍부한 자원 물산과 인구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피해를 상당 부분 복구한 정파 무림과는 달리, 마교는 엄청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천산산맥으로 쫓겨나야 했다.
“……그랬겠지. 본교의 역량을 총동원한 전쟁이었으니.”
작게 뇌까린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허허. 한때 천하의 절반을 집어삼켰거늘, 이제는 초라하기 그지없구나. 교주께서 기련삼괴(祁連三怪)나 음양쌍귀(陰陽雙鬼)와 같은 흉적들을 받아들였을 때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았어야 했는데. 하기사, 그때부터 교주께서도 변하기 시작하셨지.”
“음양쌍귀?”
“네 녀석은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그런 놈들이 있었…….”
“어, 나 아는데?”
“응? 음양쌍귀를 안다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련삼괴는 잘 모르겠는데, 음양쌍귀는 알지.”
“노부의 별호도 들어 본 적 없다는 녀석이 어찌 음양쌍귀를 안단 말이냐?”
“그거야, 뭐.”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한 판 붙은 상대의 별호 정도는 기억해 두는 편이라서. 특히 그 정도쯤 되는 고수는.”
“……뭐, 뭐라? 음양쌍귀와 한판 붙어?”
“정확히는 양귀 한 놈만. 우리 노야, 아니 스승님이 양귀를 죽였지. 음귀는 웬 미친놈한테 죽어서 친구 따라 저승 갔고. 그나저나 이 시벌 놈들이 무슨 하남을 고담 시티로 아나…….”
“……!”
내 중얼거림에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던 천력마가 허겁지겁 말을 쏟아냈다.
“으, 음양쌍귀라니! 그놈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무림에 나왔단 말이냐? 그것도 하남이라니? 본교가 소림을 급습했단 말이냐!”
“소림에서 개판 친 건 맞는데. 마교의 소행은 아니었지.”
“그, 그럼. 그럼 누구의 소행이란 말이더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천력마는 현재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말을 섞는 외부인이라고 해 봤자 궁 노인 하나뿐이니.
‘하긴, 그 노인네가 친절하게 알려 줄 성격은 아니지.’
친절하게 힘줄을 끊으면 모를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사실을 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천력마는 죽을 때까지 지하 뇌옥을 못 벗어나는 처지.
특급 기밀이었던 암천의 존재도 여러 유력 문파를 통해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는 지금, 문제 될 건 없다.
“그,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말해다오, 어서!”
“잠깐 기다려 봐.”
아, 그렇지.
마침내 적절한 단어를 찾아낸 나는 스스로의 능지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걔들, 이직했어.”
“……?”
“이직인지, 회사 내 부서 이동인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죽기 전까지는 마교가 아니라 암천이라는 곳에서…….”
결론적으로,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후다닥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으이!”
“……입에 든 거 다 삼키고 얘기해.”
“으이! 으이! 이어 드어 보에오! 마이어요!”
“뭘 자꾸 으이거려. 남천동 사는 서장 찾니?”
“으이!”
“그래. 사우나도 하고 밥도 같이 묵고 다 했겠지.”
“지짜 마이어요!”
양 볼 가득 군것질거리를 잔뜩 쑤셔 넣고도 부족했는지, 품에는 종이로 싼 음식들이 한가득이다.
잘 구워진 오리 다리 하나를 꺼내어 덥석 물려던 나는, 잠시 잊고 있던 사람을 향해 내밀었다.
“하나 줄까?”
그리고 마침내 마주할 수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천력마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