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53
#352화
‘놈들이 오고 있다.’
녹영대원이 내뱉은 두서없는 한마디.
그러나 당사독에게 깨달음은 섬광과 같았다. 그것은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불안감의 실체였고, 지금까지 그가 쌓아 온 연륜이 도출해 낸 결론이었다.
‘흉수는 혼자가 아니다!’
선친과 경천신니를 죽인 외팔이. 놈이 수하들을 이끌고 사천당문으로 오고 있었다.
진정한 배후가 어디인지, 수는 몇이나 되는지, 어떻게 사천을 제집 앞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당사독의 입술 사이로 벼락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일원(一元), 삼당(三黨), 오대(五隊)는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드드드득!
웅혼한 공력이 실린 거대한 외침에 전각이 몸을 떨었다.
다름 아닌 가주전에서 벌어진 이변(異變).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전각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당사독의 호위 무사들이었다.
“가주님!”
쾅!
호위들이 전각을 부수며 뛰쳐 들어왔을 즈음엔, 당사독의 외침을 들은 가솔들이 가문 곳곳으로 가주의 명을 전하고 있었다.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독기와 원한으로 똘똘 뭉친 수백의 당가(唐家)가 집결할 것이다.
그리고…….
‘보여 주마. 당가의 복수가 어떤 것인지.’
들끓는 가슴과는 달리 당사독의 눈빛은 북풍 설한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가주님, 이게 도대체…….”
“죽어야 할 놈들이 오고 있다. 그뿐이니라.”
뜻밖의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호위들을 향해 손을 내저은 그가 녹영대원을 응시했다.
온통 찢기고 피에 젖은 무복은 틀림없는 전투의 흔적이었다.
“어찌 된 일이냐. 보고 들은 것들을 빠짐없이 고하라.”
그제야 가쁜 숨을 가다듬은 녹영대원이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당(金堂) 인근을 수색하던 도중 수상쩍은 무리를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수상쩍은 무리?”
“예.”
“금당이라면 본가에서도 고작 한나절 거리. 이미 개방과 관군이 모든 검문검색을 끝마쳤거늘 어찌하여.”
문득 말을 멈춘 당사독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관군. 관군이었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주를 바라보던 녹영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놈들은 틀림없이 관군의 복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변복(變服)이라.”
툭, 툭.
당사독은 뼈마디만 남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제대로 허를 찔렸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성도의 안전을 확인한 개방과 관군이 수색 영역을 확대한 것이 불과 이틀 전.
놈들은 그물이 헐거워진 틈을 타 성도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겠지.’
정예는 늘 최전선에 투입되는 법. 개방과 관군 중 경륜 있고 눈썰미가 있는 자들은 이미 성도를 벗어났다.
더군다나 이미 수천에 달하는 관군이 열흘 가까이 성도를 배회한 이후가 아닌가. 그런 관군의 복색을 갖추었다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릿수는 몇이나 되더냐.”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여러 무리로 나누어 움직이고 있었으나,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족히 삼백은 되는 듯했습니다.”
“삼백?”
“예. 틀림없습니다.”
조바심 어린 표정으로 녹영대원의 보고를 듣고 있던 수문각주가 득의양양한 어투로 말했다.
“하, 고작 삼백? 죽으려고 환장한 놈들이군. 아니 그렇습니까, 숙부님?”
“…….”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본가의 무인들만 해도 삼백이 넘습니다. 그뿐입니까? 바로 이럴 때를 대비해 철옹성을 쌓은 것이 아닙니까. 놈들은 감히 성벽을 넘지도 못하고 독과 암기에 죽어 나갈 겁니다.”
닫혀 있던 당사독의 입술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닥치거라.”
“예?”
“닥치라고 했다.”
“수, 숙부님.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고작 삼백입니다. 그 정도면 눈 깜짝할 사이에…….”
“고작 삼백?”
탁자를 두드리던 당사독의 손가락은 어느샌가 우뚝 멈춰 있었다.
하나뿐인 조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한심, 그 자체였다.
“네 녀석도 경월년(傾月年)의 혈사를 모르지 않을 터.”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경월년의 혈사는 당문 내에서 금기와 같은 말이었다.
오십 년 전, 사천당문이 수백 년간 자리 잡은 터전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치욕스러운 날이었으니까.
그날 당사독은 하나뿐인 친형을 잃었고, 수문각주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릅니다!”
격앙된 수문각주의 외침에 당사독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대관절 무엇이 그리 다르더냐?”
“마교의 군세는 이천에 달했고, 본가의 무인은 삼백에 불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는 얼추 맞는구나. 어디 계속해 보아라.”
“비록 패배하여 물러나기는 했으나, 겨우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본가와는 달리 마교는 삼분지 일이 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또한 사실이다. 당시 입은 피해로 마교의 사천 장악이 늦어졌지. 본가는 터전을 잃은 대신 더욱 큰 명성을 얻었고.”
“그런데 어찌하여!”
쾅!
수문각주가 내리친 주먹에 철제 탁자가 움푹 패인다. 그는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의 숙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숙부께서는 고작 삼백의 적들을 두려워하십니까. 오십여 년 전, 그보다 몇 배는 많은 마교의 흉적들조차 본가를 넘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전각 내부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분노에 찬 조카의 외침에 대한 당사독의 대답은 짧고, 간단했다.
“그래서, 그게 전부더냐?”
“……예?”
“한심한 놈.”
흔들리는 수문각주의 눈빛에 당사독이 한탄했다.
“경월년의 혈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치욕의 역사이자, 한편으로는 천하에 본가의 힘을 증명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 그렇습니다. 하여 지금까지도 천하의 무림인들이 본가의 무와 의기를 칭송하지 않습니까.”
“으허, 으허허허!”
무지도 이만하면 병이다. 당사독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는 조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을, 놈들이 모르겠느냐?”
“……!”
“정마대전 이후, 본가는 누구도 넘지 못할 철옹성을 세웠다. 가솔들의 수를 늘리고 철저히 무장시켰다. 천하에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느냐? 경월년의 혈사에서 보여 준 본가의 힘과 집념을 모르는 자가 있냐는 말이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폭풍우와 뇌성벽력 앞에서, 수문각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제야 사천당문을 향해 쳐들어오는 삼백 명의 적이 ‘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반면 노회한 가주의 판단은 기민하고, 신속했다.
“당전고(唐戰鼓)를 울려라.”
가주의 명령에 석상처럼 굳어 있던 호위 무사들 사이로 동요가 흘렀다.
“다, 당전고를 말입니까?”
“지금 남녀노소 불문, 모두에게 독과 암기를 지급한다. 은퇴한 원로들은 물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장인이나 여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본가는 이 전투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조, 존명!”
칼날 같은 목소리에 안색이 급변한 호위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잠시 후 당전고의 북소리가 사천당문을 떨어 울릴 때, 모두는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가문이 멸문(滅門)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당사독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지금껏 가문을 이끌며 쌓아 온 경험과 직감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쩌면 경월년의 그날을 뛰어넘는 시산혈해가 사천당문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거칠게 뛰는 웅장한 소리에 수문각주가 중얼거렸다.
“이것이 당문고…….”
당문고가 마지막으로 울린 것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당문고의 소리에 수문각주가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선수를 뺏겼군.”
“수, 숙부?”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수문각주는 볼 수 있었다. 한없이 깊게 가라앉은 당사독의 눈동자를.
그와 동시에 희끗희끗한 신형들이 쾌속한 신법으로 전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가주!”
“적입니다! 놈들이 전고(戰鼓)를 울리며 오고 있습니다!”
“습격하는 주제에 전고라. 대단한 놈들이군. 정말이지 대단해.”
너털웃음을 터트린 당사독을 바라보는 열 명의 시선은 황당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가주, 부디 명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삼십 줄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이, 반백의 중년인도 있었고 당사독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 또한 있었다.
그러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수백 명의 가솔 중에서도 스스로의 무력을 입증한 자들.
그렇기에 당사독은 이들에게 또 다른 이름을 붙여 주었다.
“당문십기(唐門十奇). 딱 맞춰 왔군. 마침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네.”
“가주, 도대체 이 무슨! 지금 당장이라도 놈들을…….”
“글쎄, 자세한 건 저 친구에게 물어보세나.”
당문십기의 시선이 당사독을 따라 움직였다.
높으신 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녹영대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가 아는 것이라면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노부가 묻건대…….”
당사독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 외팔이가 아니었던가?”
“……!”
“……!”
그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마침내 울리기 시작한 당전고의 웅장한 북소리도. 가솔들의 다급한 움직임과 고함도.
변함없이 흐르는 밖의 시간과는 달리 전각 안의 모든 것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 침묵과 경악 속에서, 한 사람만은 시간을 역행했다.
뿌득, 우드드득.
길어지고 짧아지는 뼈. 부풀어 오르는 근육.
피에 젖은 의복이 찢어지며 가슴팍에 수실로 새겨 넣은 당가라는 두 글자가 절반으로 나뉘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녹영대원은 더 이상 이십 대의 청년이 아니었고, 녹영대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눈썰미가 좋군. 독왕이 제법 자식을 잘 키웠어.”
싱긋 웃은 중년인이 왼쪽 팔을 어루만졌다. 마치 뭔가를 떼었다가 붙인 듯, 팔꿈치 어림에서 이어지는 피부의 색깔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자네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자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네. 편하게 마공(魔功)이라 부르세.”
중년인을 바라보는 당사독의 눈동자에 녹색 불빛이 어른거렸다.
“네놈이로구나. 아버님을 해한 것이.”
“독왕 당사문. 명불허전이었네. 솔직히 감탄했어. 한쪽 팔도 그때 잃어버렸지.”
왼 주먹을 쥐었다 편 중년인이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감각이 영 예전 같지 않군. 이래서야 예전처럼 돌아올 수는 있을는지…….”
“걱정 말거라. 노부가 친히 네놈의 목을 베어 더는 신경 쓸 일 없도록 만들어 줄 테니.”
“저희들도 한몫 거들지요.”
구구구궁!
당사독, 그리고 당문십기로부터 흘러나온 막대한 기파가 전각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호흡으로도 즉사에 이를 수 있는 맹독 앞에서도 중년인, 서천마군은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콰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