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57
#356화
사천당문의 지하 뇌옥은 그 자체로도 어둡고 축축한 곳이다.
드문드문 걸려 있는 횃불은 반딧불이보다 불빛이 희미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정물이 가득 고인 바닥은 걸을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로 지금처럼.
“냄새 한번 고약하군. 아무리 뇌옥이라지만 이런 곳에 사람을 가둬 두다니.”
“사람? 여긴 짐승을 사육하는 곳이야. 사천당문 놈들이 정마대전 당시의 마두들을 붙잡아서 온갖 고문을 자행한다는 얘기도 못 들어 봤나? 그러니 이런 곳이 있는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철벅, 철벅.
들려오는 목소리는 두 개지만, 발소리는 여러 개다.
나는 조용히 기감을 끌어올려 놈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열다섯.’
무리의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선두의 두 사내가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어째 죄수들이 보이지 않는데? 철창만 있고 안은 텅 비어 있어.”
“여기 갇힌 자들은 전부 정마대전 시대의 노괴(老怪)들이니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지. 하물며 이런 곳에서 고문까지 받았는데 오죽하겠나.”
“그것도 그렇군.”
놈들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하 뇌옥의 1세대 입주자 중 상당수가 저세상 사람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곳에는 아직 십여 명의 죄수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가 죄수들을 점혈해서 따로 옮겨 두었다는 것까지 예측하지 못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데, 차라리 위로 올라가서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기에는 아직 반도 안 돌아본 것 같네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여기서 더 들어가 봤자 뭐가 있겠나? 어차피 다른 녀석들이 와서 샅샅이 뒤져볼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천주(天主)께서 내리신 명을 잊었단 말인가? 만약 이곳에 당문의 핏줄이 숨어 있기라도 한다면…….”
“어지간히 병신이 아니고서야 지하 뇌옥에 숨어 있을 이유가 없지. 아직 전투가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왜 이곳에 숨는단 말인가. 차라리 포위망을 뚫고 도주를 시도한다면 모를까.”
“흐음…….”
작게 침음성을 흘리던 사내가 이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 우리는 지엄하신 천주(天主)의 명을 받드는 몸. 마군께서도 솔선수범하시는 마당에 일을 허투루 처리할 생각인가?”
“후우, 제기랄.”
“군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게.”
얼굴도 모르는 저 암천의 무인은 알지 못했다. 방금 그 한마디로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그의 단호한 말투에 다른 사내가 투덜거렸다.
“거 참. 사람이 융통성이라는 게 있어야지, 계속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다가는 제명에 못 죽어.”
“재수 없는 소리. 늘 대충대충 사는 자네보다는 오래 살 테니 걱정 말게.”
“내기할까?”
“좋아, 못 할 것 없…….”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의 수명 내기는 대충대충 사는 놈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그마저도 찰나의 시간 차이에 불과했지만.
푸푹!
완벽한 기습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복도. 캄캄한 길목에서 기척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한 놈의 눈에 박아 넣음과 동시에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미리 진흙을 발라 빛을 없앤 검날이 살과 뼈를 갈라 냈다.
서걱, 철퍽!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한 두 절정 고수의 시신이 썩은 통나무처럼 무너져 내린다.
졸지에 피와 구정물을 뒤집어쓴 흑의인들이 넋 나간 눈동자로 우두머리들의 시신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남은 숫자는 열셋.
나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목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제 열둘.”
“……!”
텅 비어 있던 놈들의 눈동자에 한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 * *
“길 막혔지? 여기가 원래 구조가 좀 개 같아. 혹시 탈옥하려는 놈들이 있을까 봐 이렇게 만들어 놨다더라고.”
“히익!”
나는 코너에 몰린 쥐새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론 쥐새끼라고 부르기에는 덩치가 상당했다. 그런 덩치에 비해 겁이 많았던지, 누구보다 빨리 도망친 놈이기도 했다.
“자, 이제 친구들 따라서 지옥 가자.”
“아, 악귀!”
“미친놈. 네가 하면 로맨스고, 내가 하면 불륜이냐?”
털썩.
흑의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아직 손에는 병장기가 들려 있지만, 내게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놈이 택한 방법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사, 살려…….”
“조, 좆 까.”
우두둑.
나는 망설임 없이 흑의인의 목을 꺾었다. 혀를 빼문 놈의 머리통이 기이한 각도로 기울었다. 틀림없는 즉사다.
“꼭 사람이 일을 두 번 하게 만들어요.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할 거면서.”
한숨과 함께 놈을 둘러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기습을 했던 위치로 돌아가는 건 금방이었다.
애초에 흑의인이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뿐더러, 지난 열흘 동안 지하 뇌옥의 미궁 같은 구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새끼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자꾸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흑의인들이 지하 뇌옥에 침입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대략 삼십 분 전, 일곱 명의 흑의인이 먼저 침입했고 나는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처치했다.
사천당문을 도와 적들의 머릿수를 줄인 셈이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것은 놈들의 침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황이 불리해.’
지하 뇌옥은 당문의 내당 외곽에 있는 곳. 이는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외당이 뚫렸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혹시 청풍도…….’
나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청풍은 지옥 한가운데에 떨어트려 놔도 살아 돌아올 녀석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빌어먹을, 차라리 로그아웃이라도 되면 가능성이 조금은 생길 텐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퀘스트 시작과 동시에 시스템은 로그아웃 기능을 막아 버렸다.
게다가 지금 당장 로그아웃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섣불리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삼십 분 사이 두 차례의 침입이 있었다. 잠시 현대에 머무른 사이에 놈들이 들이닥친다면…… 나는 물론이고 적천강과 신의까지 끝장이다.
‘여기서 놈들을 막는 수밖에.’
놈들은 다수고, 나는 혼자다.
그러니 조금 전처럼 최대한 기습의 묘리를 살리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힘을 비축해야 한다.
‘들어오자마자 시체가 널려있으면 말짱 황이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차례차례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임시 시체 보관소로 지정한 곳은, 지하 뇌옥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끼이이익.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본 게 한 식경 정도 됐나?”
“…….”
“외로울까 봐 신참들 데려왔어.”
빛 한 점 흘러들어 오지 않는 뇌옥의 중앙.
구속구를 주렁주렁 매단 노인, 천력마가 나를 타오르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왜, 뭐.”
“……!”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할 말 있으면 해 보든가.”
“……!!”
“아, 맞다. 점혈.”
마혈과 아혈을 짚어 뒀으니 아무 말도 못 할 수밖에.
다가가서 혈을 풀어 주자 그제야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냐!”
“보면 몰라? 시체 옮기고 있잖아.”
“아, 그러니까 그 시체를 왜 여기에 옮기냐고!”
“고함 지르지 마라. 한 번만 더 큰 소리 내면 아혈이 아니라 사혈을 짚는 수가 있다.”
“……!”
이제 좀 조용해졌군.
나는 조용해진 천력마를 뒤로하고, 가져온 시체들을 뇌옥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툭, 데구르르르.
“거기 떨어진 머리통 좀 주워 줄래?”
“……지금 노부에게 한 말이냐?”
“아, 맞다. 구속구 차고 있었지.”
“후욱, 훅.”
천력마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콧김을 내뿜었다. 그 와중에 사혈을 짚이기는 싫은지, 목 끝까지 차오른 고함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
“네놈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정리 끝. 간다.”
“……!”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지난 며칠 내내 구워삶으려고 해도 묵묵부답이던 천력마다.
정마대전에서 시체라면 질리도록 봤을 인간이 징징거리는 건 이유가 있기 마련. 정곡을 찔린 천력마가 말을 더듬었다.
“어, 없다.”
“그럼 됐고.”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마지막이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입술을 달싹거리던 천력마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왜 노부만 여기에 남겨 둔 거지? 다른 죄수들은 어디 있나?”
“알 거 없어.”
“그럼 이 시신들은 도대체 무엇이냐?”
대수롭지 않은 듯 물어보지만, 슬쩍 눈치를 살피는 걸 보아하니 이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지난 수십 년간 뇌옥에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고문 기구를 든 궁 노인밖에 없었는데, 난데없이 벌거벗은 시체가 스무 구 가까이 쌓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문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냐?”
“생겼지.”
나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암천이 쳐들어왔거든.”
“……!”
며칠 전에 봤던 그 표정이다.
나는 암천이라는 두 글자에 우뚝 굳어 버린 천력마를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외당은 이미 뚫렸고 내당에서 격전이 이어지고 있을 거야. 생각보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누구라고 하더냐?”
“뭐?”
“네 녀석도 포로들을 심문했을 것 아니냐. 노부는 놈들을 이끄는 자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다.”
“제법 예리한데.”
안 그래도 처음 뇌옥에 침입한 일곱 명 중 하나를 족쳐 보긴 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다가 스스로 심맥(心脈)을 끊어 자결하는 바람에 그리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한 사람의 별호를 들을 수 있었다.
“서천마군(西天魔君).”
촤르륵! 철그럭!
단 네 글자.
그러나 그것이 천력마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언제나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으로 구속구에 매달려 있던 그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심지어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지금…… 서천마군이라 했느냐?”
“아는 사람인가 보군.”
“노, 놈이 아직 살아 있단 말이냐? 하면 교주는! 교주께서는 어찌 되셨느냐!”
이 노인네, 갑자기 왜 이래?
나는 당황해서 대꾸했다.
“……지금 시간이면 아침 먹고 있지 않을까.”
서천마군이라는 별호도 처음 들어 보는데, 내가 마교 교주를 어떻게 알아. 마교 공식 트위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끝끝내 이리되었구나. 허허, 허허허!”
뜻 모를 말을 횡설수설하더니, 이제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한다.
그런 천력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털어놔. 마교와 암천이 무슨 관계인지. 서천마군은 뭐 하는 시벌 새끼인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천력마의 공허한 시선이 나를 향한다.
“놈은, 네가 서천마군이라 불리는 그는 본교에 존재하는 네 명의 호교사자(護敎使者)중 하나였다. 교주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했던, 그리고 현혹시켰던 자.”
“그렇다면…….”
“어느 날 그는 스스로를 서천마군이라 칭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결국 이리되었어. 허허, 으허허허!”
천력마가 광소를 터트린 바로 그 순간.
콰앙! 구구구궁!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지하 뇌옥이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