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65
#364화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일백 년의 세월을 따라 걷는 꿈을.
대륙을 떠돌며 유리걸식하던 부랑아는 스승을 만났고, 무공을 익혀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어느 날 흙투성이의 만두를 입안에 쑤셔 넣던 어린 거지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모릅니다.’
‘장천. 지금부터 네 이름은 장천이다.’
어둡고 차가운 기억들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혈육 같았던 제자는 떠났고 스승은 남겨졌다.
그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실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재미있는 놈이로군. 어디의 누구라고?’
‘진태경. 태원진가의 진태경인데요.’
한 사람을 만났다.
도무지 숨겨지지 않는 삐딱한 말투와 반항적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린놈.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그 녀석이 늘 곁에 있었고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마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노부는 이미 노환에 걸린 몸. 이런 내게 무공을 배울 수 있겠느냐?’
‘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노야를 믿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어둡고 차가웠던 기억에 빛과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그날의 결정을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이 될 화신귀무(火神鬼舞)를 펼치던 그 순간까지도.
‘어떠냐. 화신귀무. 끝내주지?’
‘예. 끝내줬습니다.’
그 한마디로 족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친우의 원수를 갚고 하나뿐인 제자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적은 믿을 수 없게도 다시 일어났고, 기억은 그것으로 끝났다.
모든 것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죽은 것인가. 염라(閻羅)도 망자(亡子)도 보이지 않는 이곳은 어디인가.
‘설마 구천을 떠돌게 된 것인가.’
의문은 곧 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잊었다.
아니, 잊어 가려던 그때였다.
‘노야. 그거 아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 그러나 들어 본 적 없는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늘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깨달았다. 동시에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 견고하던 기억의 둑이 허물어지며 그를 집어삼켰다.
‘나 역시 그러했느니라.’
화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열화(烈火)에 휩싸인 두 손이 허공을 찢었다. 사방천지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깨지고 빛이 스며들었다.
아직 깨어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는 것처럼, 통로는 비좁았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빛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녀석이 나를 부르고 있다.’
화아악!
눈앞을 가득 메우는 새하얀 빛과 함께, 화왕(火王) 적천강은 눈을 떴다.
* * *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거라.”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잠겨 있는 목소리. 그러나 고개를 돌려 마주한 서천마군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품고 있는 열기를. 타오르는 눈동자를.
“노부의 것에서 손 떼라고.”
“화왕……!”
서천마군은 침음성을 흘렸다. 하필이면 지금 같은 때에 구화산의 늙은 노괴가 깨어날 줄이야.
평소와 같은 때라면 모를까, 이미 한쪽 발목이 으스러지고 상당한 힘을 소모한 그다.
반면 상대는 십왕(十王) 중에서도 제일이라 불리는 초절정 고수.
‘좋지 않군. 좋지 않아.’
이대로라면 양패구상(兩敗俱傷)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천주께서 친히 명하신 임무도 실패한 채 이곳에서 죽는 것은 결코 서천마군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무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최대한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서천마군이 손을 뻗었다. 축 늘어진 채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있던 진태경의 신형이 그의 손아귀에 자철(磁鐵)처럼 빨려 들어왔다.
그는 진태경의 목을 움켜잡고 보란 듯이 적천강에게 흔들었다.
“그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거요. 하나뿐인 제자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저벅. 다가오던 적천강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물끄러미 서천마군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런 애미애비도 없는 개호로 썅노무 새끼를 보았나…….”
“……!”
“노부가 했던 말은 똥구녕으로 쳐들었느냐? 분명 말했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걸쭉한 욕설에 순간 정신이 멍해진 것도 잠시. 서천마군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아, 그렇소?”
동시에 진태경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천마군이 손아귀에 힘을 가한 결과였다.
우득.
뼈 어긋나는 소리가 미세하게 울려 퍼졌다. 적천강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네놈이 감히…….”
“내게는 눈과 귀가 많지.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해 주더이다. 천하의 화왕이 제자를 피붙이처럼 아낀다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서천마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자를 잃고 싶지 않다면 자결하시오.”
“자결이라.”
헛웃음을 지은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짖는 소리가 제법이구나. 저잣거리 누렁이에게 배운 것이냐?”
“스승과 제자는 닮는다더니. 제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작게 혀를 찬 서천마군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더 선명하고, 커진 파열음과 함께 축 늘어져 있던 진태경의 발끝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 광경에 적천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놈!”
“마지막이오.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제자를 살리고 사문의 명맥을 보존할 수 있을 거요. 그러나 만약 거부한다면…….”
서천마군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장 이놈의 목을 꺾고 당신과 생사결을 펼칠 거요. 그리고 아마 먼저 쓰러지는 것은 당신이겠지.”
이건 단순한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서천마군은 적천강 역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혈주를 상대하다가 한 달이 넘도록 사경을 헤맨 끝에 이제 막 깨어났으니 당연했다.
“어쩌겠소?”
적천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적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신의 제자를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본 늙은 스승이 입을 열었다.
“약속은…… 틀림없이 지켜라.”
“당연히.”
물론 거짓말이었다. 서천마군은 단 한 사람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사천당문은 물론이요, 화왕 적천강과 저 뒤에서 전투의 여파로 혼절한 신의. 그리고…….
‘산서잠룡 진태경. 이놈은 더더욱 살려 둬서는 안 된다.’
검성의 후인도 그렇지만, 진태경은 특히나 위험한 존재였다.
만약 반 시진, 아니 일각만 더 싸웠어도 놈은 깨달음을 얻어 초절정의 벽을 허물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이 이어지기 전에 진태경을 쓰러트린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천주께서 도우시는군.’
서천마군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됐느냐?”
뜬금없는 말에 서천마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말이오?”
“음흉한 놈 같으니. 못 본 사이 더 괴물이 되었구나.”
“도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
그러나 서천마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이을 수 없었다.
덥석. 우두두둑!
손목에서 시작된 불같은 통증.
다음 순간 서천마군의 부릅뜬 눈동자에 비친 것은, 거인에게 쥐어짜인 것처럼 비틀린 손목과 그것을 갈고리처럼 옭아맨 한 청년이었다.
“진태겨엉-!”
도대체 어떻게!
고통과 의문. 그리고 경악이 담긴 노호성이 지하 뇌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진태경은 듣지 않았고, 듣지 못했다. 취한 듯 몽롱한 눈으로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우지지직!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서천마군의 손목을 잡초처럼 뽑아냈다.
솟구치는 피 분수와 작렬하는 통증.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든 서천마군의 앞에,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말했지.”
화르륵, 붉게 타오르는 겁화를 전신에 휘감은 늙은 스승은 씹어뱉듯이 말을 이었다.
“내 제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콰아아아아!
거대한 불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 * *
몽롱하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혹은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고 멀게 느껴졌다.
‘꿈이겠지.’
맞다. 이건 꿈이 확실하다. 진작 죽었을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아직 깨어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할 적천강이 일어난 것도.
그런데…….
‘이것도 꿈인가?’
띠링.
– [적천강]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 당신은 관련된 모든 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당신이 보여 준 숭고한 헌신과 희생은 보상받을 것입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레벨 업!
– [체력], [근력], [민첩], [공력]을 회복했습니다!
– 총 3번의 레벨 업으로 육체적 부상이 일부 회복됩니다!
띠링. 띠링. 띠링.
경쾌한 종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동시에 따스한 햇볕 같은 기운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
부러진 뼈가 붙고, 살이 아물었다. 망가지고 찢겨 나간 장기와 혈도 역시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우득.
발끝이 허공을 밟았다. 나는 어느새 서천마군에게 목을 붙잡혀 있었다.
분명히 터져 나간 고막은 회복되었을 텐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뭘까. 이 느낌은’
웅, 우우웅.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소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적천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셈이더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노야. 그냥, 그냥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어요.
반가운 얼굴을 향해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문득 목울대를 짓누르는 손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럼…… 풀어야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을 때, 손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나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뻗어 나간 손이 서천마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우두두둑, 단단한 뼈마디가 으스러지며 비명이 터져 나온다.
나는 주저 없이 비틀고, 그대로 뽑아냈다. 파열음에 이어 피 분수가 솟구쳤다.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한 줄기 불꽃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오랜만이구나.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나를 스쳐 지나간 적천강의 손바닥에서 겁화가 이글거렸다.
극성에 이른 화염신장(火焰神掌)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서천마군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
천장을 태우며 솟구치는 거대한 불기둥.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던 불을 꺼트린 것은 묵색 검강이었다.
쉬이이이익!
“죽어엇!”
서천마군의 전신은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피에 젖은 입술과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가 붉게 물든 눈동자.
흡사 광인(狂人)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그의 검에 실린 힘은 하늘도 가를 것 같았다.
후우우우웅!
검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어둠이 불기둥을 가르며 쏘아진 그때.
“으음.”
열양지기를 끌어 올리려던 적천강의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그의 몸속에 웅크린 기운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든 광경을, 나는 텅 빈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몽롱한 시야 속에서 덮쳐 오는 어둠과, 휘청이는 적천강의 신형을.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외마디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곳에 있었고, 동시에 없었다. 모든 것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생생하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눈부신 섬광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내 전신을 관통했다.
지금까지 나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들이 깨지고 무너진다. 취한 듯 흐려 보이던 세상도. 몽롱하던 머릿속도 여름 하늘처럼 맑게 개인다.
그 끝에,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빛이 있었다.
띠링.
– 축하합니다. 당신은 마침내 벽을 넘어 위대한 경지에 발을 디뎠습니다!
–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띠링. 띠링. 띠링.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또렷한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걸음을 뗐다.
공간이 지워지고 그 안에 담긴 자연의 기운이 요동쳤다.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끌어당긴 백염의 창날에서 화룡이 포효했다.
콰우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