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7
#36화
퀘스트
[로그아웃]이제 당신은 이 험난한 무림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더욱더 강해지고, 유명해지십시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
등급 : 메인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일류] 경지 달성 (완료)
Lv.30 달성 (완료)
명성 500 달성 (475/500)
보상 : [로그아웃]
퀘스트창을 껐다. 한겨울인데 식은땀이 날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완전 나가린데.’
조금씩 오르던 명성치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그게 반나절 전의 일이다. 처소를 뛰쳐나가 대선 후보처럼 손이 발이 되도록 악수를 하고 다녔지만 기다리던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아니, 알림이 울리긴 했지.’
삐빅!
– [태원진가]에 당신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한계치까지 명성을 뽑아 먹었으니 적당히 하란 소리였다. 시스템이 보기에도 내 모습이 애잔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루가 속절없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출정식이다.
“시파…….”
내가 작게 욕설을 내뱉을 때 진위경은 단상에 오르고 있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그를 따라 움직인다. 태원진가의 무사와 새로 합류한 중소 문파의 무사들까지. 대연무장에 도열한 무사들의 숫자는 오백이 넘어갔다.
쿵. 쿵. 쿵.
어느 순간, 거대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발을 구르고 누군가는 병장기를 두드린다. 공력을 지닌 무림인 오백 명이 한뜻으로 움직이자 땅이 흔들리고 굉음이 천지를 메웠다.
‘이게 무슨…….’
지금껏 본 적 없는 광경. 개인에서 하나의 군세(軍勢)가 된 그들은 이제 한 사람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위경의 입이 열렸다.
“부정하지 않겠다. 적들은 병력도, 절정 고수의 숫자도 우리보다 앞선다.”
순식간에 침묵이 내리깔렸다. 하지만 시작부터 사기를 깎아 먹을 정도로 진위경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러나.”
평소의 사람 좋은 웃음은 온데간데없다. 지금의 진위경은 절정의 무인인 동시에 태원진가의 수장이었다.
“머릿수만 많은 승냥이에 불과하다. 저자의 무뢰배, 황금에 눈이 먼 낭인과 양민을 약탈하던 마적 떼!”
불길을 토해 내는 외침에 공기가 찌르르 울린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놈들에게는 명분도, 정의도 없다.”
명분. 정의.
항산검문은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잃었다.
두 강자의 전쟁에 눈치만 살피던 산서성의 중소 문파들이 지원군을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사흘 안에 이 전쟁은 끝난다.”
천오백의 무인들이 한날한시에 부딪힌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지옥 같은 싸움이 될 것이다.
“이 중 어느 누구도 생사를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위경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모두를 담았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다음 순간.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최고조에 달한 분위기 속, 진위경은 거인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목숨을 걸고 싸워 살아남아라!”
함성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오백의 병력은 선두, 중앙, 후미로 나뉘었다. 핵심이 되는 전력은 대부분 선두와 중앙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내가 맡은 후미에는 수십 명의 무사가 전부였다.
그중에는 제법 낯익은 얼굴들도 있었다.
“조장님!”
정찰조원들이다. 나는 반가움 반, 의아함 반으로 물었다.
“너희가 왜 여기 있냐? 약왕당에 있는 거 아니었어?”
“본가의 명운이 걸린 싸움 아닙니까. 조금 다쳤다고 빠질 수야 없죠.”
지난번에 몰래 들렀을 때는 팔다리에 금 간 놈도 있던데. 무림인들 터프한 거 보소.
“조장 밑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더니 상부에서도 흔쾌히 허락하더군요. 그날 이후로 저희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닙니다, 하하.”
“어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찰조 임무를 맡아 며칠을 함께했지만 이 중 몇몇은 이름도 모른다. 그럼에도 친근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함께 생사를 함께했다는 동질감 때문이다.
‘하긴, 레이드 세 번이면 의형제도 맺는다는데.’
나는 오래된 헌터 격언을 떠올리며 여덟 명의 정찰조원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
여덟이라고? 내가 잘못 셌나?
나는 끝에서부터 한 명씩 다시 세기 시작했다. 일단 나를 제외하고 아홉 명. 거기에 혁무진과 한엽은 중상이니까 당연히 오지 못했을 테니 일곱이 되어야 하는데…….
“……너 여기서 뭐 하냐?”
보면서도 이놈이 그놈인가 싶다. 찐빵처럼 부푼 얼굴, 옷 밖으로 드러난 살은 울긋불긋하다.
“보면 모릅니까?”
맞다. 정찰조원 중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은 하나밖에 없다.
“혁무진?”
“예. 왜요. 뭐요.”
“너 진짜 혁무진 맞아?”
“이젠 제 얼굴도 못 알아봅니까?”
지금 꼴이면 너희 부모님도 못 알아볼걸…….
아니, 그전에 이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너도 자원했냐?”
“했죠.”
이어 덧붙인다.
“안 받아 줬지만.”
“응?”
“의원한테 말했는데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고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그냥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살고 싶은데요.”
혁무진이 썩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여길 왜 와?”
“제 몸 상태는 제가 압니다. 충분히 싸울 수 있어요.”
“얼굴은 터지기 직전인데.”
“부기 빠지는 과정입니다. 내상은 전부 나았으니 문제없습니다.”
“외상은?”
“가면서 낫겠죠.”
“…….”
“뼈 몇 군데에 금이 가긴 했는데 버틸 만합니, 컥!”
혁무진이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야! 왜 이래?”
“가끔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아, 이제 괜찮아졌네요.”
“…….”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말문이 막힌 내게 혁무진이 말했다.
“아, 한엽 그 녀석은 못 왔습니다. 내상도 안 나아서 짐만 되겠더라고요. 조장? 조장, 지금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이 시급하다.
* * *
겨울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얼마나 걸었을까, 너른 분지(盆地)에 진입한 후에야 야영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어이구, 삭신이야.”
혁무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완쾌된 몸이 아니다 보니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아직 안 늦었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또 그 소립니까?”
“힘들어 보여서 하는 소리지.”
“착각입니다. 사나이 혁무진이 고작 반나절 걸었다고 지칠 놈으로 보이십니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절대 아닙니다!”
“음. 정말 안 힘들어? 멀쩡해?”
“예.”
“그럼 가서 애들 야영 준비하는 거나 도와.”
그 순간, 사나이 혁무진이 눈을 부릅뜨며 주저앉았다.
“큭, 조필에게 당한 내상이.”
“…….”
내상 다 나았다며, 이 새끼야.
이놈을 한 대 때려 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부상자인가?”
달빛 아래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혁무진이 눈을 부릅떴다.
“헉, 소가주님!”
진위경이 사단장이면 혁무진은 이등병이다.
다음 순간, 번개처럼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는 혁무진의 모습에 진위경이 껄껄 웃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 보이는데 누워 있게. 아, 내상은 확실히 나은 것 같군. 내가 보증하지.”
“아, 저, 그것이 아니옵고.”
진위경은 쩔쩔매는 혁무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후 나를 향해 돌아섰다.
“잠시 걸을까?”
나는 진위경을 따라 후미진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가 먼저 입을 뗐다.
“몸 상태는 어떠냐?”
“좋습니다.”
레벨 업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완쾌된 육체는 포인트 분배를 통해 더욱 강해졌다.
문제는 따로 있다.
‘명성치가 안 올라.’
아니, 오르긴 오른다. 정말 쥐똥만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금 속도라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로그아웃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대로라면, 말이지.’
마침 진위경이 왔으니 잘됐다. 아까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임무를 맡고 싶습니다.”
다짜고짜 들어온 직진에 진위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응? 임무?”
“몸도 나았으니 본가를 위해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이런 대사, 이런 거짓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지, 진정 그게 네 생각이냐?”
“예.”
진위경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감동의 물결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은근히 죄책감 드네.’
내가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한 건 명성치를 위해서다. 정찰 임무라도 나가서 공을 세우면 들어오는 명성치.
항산검문의 정찰대와 맞닥트리면 더욱 좋다. 훌륭한 경험치일 뿐만 아니라 남은 명성치를 모두 채울 수 있을 테니까.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면 끝장이다.’
그전에 후딱 로그아웃을 해야 한다. 나는 결의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어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꼬. 고맙구나, 막내야.”
진위경이 촉촉해진 눈가를 소매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 된다.”
“그럼 제게 정찰 임무를, 예?”
“마음만 받으마. 너는 지금처럼 후미를 지켜라.”
이게 뭔 소리야.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꼭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이미 차고 넘친다.”
“아뇨, 그게 아니라.”
“지금껏 세운 전공으로도 본가에 큰 힘이 됐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정찰 임무라도 하나 맡겨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앞에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고…….”
진위경이 허허 웃었다.
“본가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다. 내가 그런 것 하나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만에 하나 놓치고 간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말 그대로 만에 하나일 뿐이다.”
염병.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러다가 정말 명성치를 못 채우게 되면? 그때는 천오백 명이 투입된 대규모 전투를 치러야 한다.
‘좆 됐다.’
낙담한 내 어깨 위에 크고 따뜻한 뭔가가 닿았다. 진위경의 손이다.
“막내야.”
무거우면서도 쓸쓸한 목소리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네 임무는 우리 중 누구보다 막중하다.”
“제 임무가 뭔데요?”
한참 뜸을 들인 끝에 한마디를 토해 낸다.
“살아남아라.”
“예?”
“어떻게든 살아남아. 본가가 패배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란 말이다.”
“…….”
“뿌리가 살아 있다면 나무는 다시 자란다. 둘째와 너는 나보다 훌륭한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살아남아라. 뿌리가 되어라.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와닿는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그게 네 임무다.”
어깨에 얹혀 있던 손바닥이 스르륵 내려갔다. 나는 떠나는 진위경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