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71
#370화
사천당문은 예로부터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어지간히 이름난 명사조차 쉽게 드나들 수 없고, 출가외인(出嫁外人)이 가문의 무공과 기밀을 누출할까 염려한 탓에 데릴사위를 들여 당씨 성을 잇게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백 년을 존속한 사천당문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불과 칠 주야 전의 일이었다.
“거기, 기둥 똑바로 세워!”
“셋 세면 당긴다. 자. 하나, 둘-!”
단단한 체구의 인부들이 밧줄을 당기고, 돌과 목재를 실어나른다.
너른 부지 위,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주춧돌 위로 건물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 나갔다.
거기서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서는 수십의 승려들이 모여 염불(念佛)을 외었다.
“원아진생무별염 아미타불독상수 심심상계옥호광…….”
파르라니 깎은 머리, 정기가 서린 눈빛을 한 승려의 정체는 아미파의 여승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수많은 목관이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그대들의 절개와 넋을 잊지 않겠습니다.”
몇 번의 낮과 밤이 바뀌었지만, 불길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삼문혈사(三門血史)에서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은 그만큼 많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천당문이 입은 인명손실은 극심했다.
“후우…….”
“묘령사태, 피곤해 보이시는데 잠시라도 쉬시는 것이…….”
“아닙니다. 명진 도장.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계속하시지요.”
파리한 안색의 중년 여승을 바라보던 도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검을 찬 무림인들이 수십여 개의 목관을 들고 줄지어 걸어왔다.
그중에는 청성파의 도사도 있었고, 중소 문파의 제자들도 있었으며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은 한 무리의 의원들이었다.
“갑자기 환자가 피를 토했다니. 안정된 것 아니었나?”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여기 있겠소? 심각한 내상을 입은 건 분명한데 도무지 무슨 증상인지…….”
“빨리 흩어져서 신의를 모셔와라!”
아미의 여승과 청성의 도사, 개방의 거지들과 크고 작은 문파에서 파견한 무인들. 거기에 더해 목수, 석공과 의원을 비롯한 양민들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가 사천당문의 경내를 누비며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높이 솟은 전각. 활짝 열린 창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젊은 거지, 궁기방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군. 그것도 사천당문에서.”
그러자 침상에 누워 있던 혁무진이 대꾸했다.
“보지만 말고 가서 좀 도우십쇼. 후개라고 농땡이만 피우지 말고.”
“농땡이?”
눈을 부릅뜬 궁기방이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새하얀 붕대로 칭칭 감긴 상반신. 한쪽 다리에는 임시로 부목을 댔다. 삼괴를 상대하면서 얻은 영광의 상처였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이게 농땡이야? 어?”
“궁 소협만 다쳤습니까?”
콧방귀를 뀐 혁무진이 보란 듯이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궁기방과는 달리 전신이 붕대로 감겨 있는 그의 모습은 목내이(木乃伊)를 연상케 했다.
“이 정도는 다쳐야지 아, 이 녀석 고생 좀 했구나. 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
궁기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히 크게 다치지 않은 건 자신의 무공이 더 높았다는 반증인데, 왠지 모르게 진 기분이다.
“난 붕대를 다섯 번이나 갈았다!”
“전 살아 있는 게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거야 몸이 하도 지저분하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참다못한 의원이 궁 소협 때 밀어 주다가 지쳐서 실신했다던데. 사실이에요?”
“…….”
“됐습니다. 더 말 섞어 봤자 입 냄새만 나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음에는 이빨도 좀 닦아 달라고 하십쇼. 궁 소협이랑 대화할 때마다 저잣거리 똥개 엉덩이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에요.”
실로 악랄한 혓바닥이 아닌가.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궁기방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삼괴가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어? 선 넘네?”
“도대체 너 같은 놈이 어떻게 그 격전에서 살아남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정 궁금하면 우리 조장님이랑 이 년만 붙어 다녀 보시든가.”
“……그건 사양하지.”
늘 티격태격하는 궁기방과 혁무진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의견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진태경에 관한 문제였다.
세상의 온갖 평지풍파(平地風波)를 합쳐 놓은 듯한 존재. 그 어떤 위기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과 집념.
그리고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의 무위를 갖춘 진태경을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하나 더 있긴 하지.’
‘그래, 저놈.’
같은 생각을 떠올린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미미, 회오리치기!”
취리릭!
“잘했어, 미미! 이번에는 공중 날기!”
취릭?
“아, 이건 안 되는구나. 그럼 이번에는…….”
혁무진과 궁기방은 생각했다. 뱀에게 공중을 날라고 시키는 저 괴상한 청년이, 정말 검성의 후인이자 기련삼괴 중 가장 강하다는 일괴를 단신으로 쓰러트린 화산신룡이 맞는지.
“저기, 궁 소협.”
“왜.”
“원래 살짝 맛이 가야 초절정 고수가 될 수 있는 겁니까?”
“……몰라. 이제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궁기방은 대답을 회피했다.
그의 스승도 제법 괴팍한 축에 드는 성격이지만, 진태경이나 청풍만큼은 아니었다.
검성과 화왕을 보면 제자들이 스승을 닮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저 뱀은 도대체 뭐예요?”
“저렇게 큰 뿔이 달린 뱀은 이무기 빼면 하나뿐이야. 천년독각사.”
“어렸을 때 본 영물백과(靈物百科)에서는 온통 검은 빛을 띤 엄청난 독물이라던데.”
청풍이 외쳤다.
“미미. 엎드려!”
취릭!
“저걸 보면 독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 같은데.”
“제 말이요.”
“그런데 청 소협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별로 다치지도 않았더만.”
“아까 밖에서 큰 소리 나는 거 못 들었습니까? 그거 청 소협이 도와준답시고 나섰다가 전각 부순 거래요.”
“……아.”
동시에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은 나란히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구 할에 달하는 건물이 파손되는 와중에도 용케 형태를 유지한 전각은, 중요한 환자들을 모아 둔 임시 의방(醫方)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 온 탕약 냄새를 맡던 혁무진이 문득 중얼거렸다.
“꿈 같네요.”
“그러게.”
삼문혈사가 일어난 그 날로부터 어언 칠 주야.
사천 무림이 결집하여 펼친 천라지망에 사천 곳곳을 피로 물들인 암천의 흑의인들은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혔고 감쪽같이 사라졌던 삼괴마저 정체 모를 괴인에 의해 붙잡혔다. 그로써 짧은 전란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은데. 궁 소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여기서 끝나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닌 모두가 느끼고 있는 위기였다.
고작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하남과 사천이 피로 물들었다.
곧 삼문혈사에 관한 소식이 대륙 끄트머리까지 퍼진다면 천하인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어느새 암천이라는 먹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바야흐로 부정할 수 없는 난세(亂世)의 시작이었고, 영웅들은 그러한 난세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었다.
혁무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닫혀 있는 문 너머를 향했다.
“궁 소협이 생각하기에 조장님께서 언제쯤 깨어나실 것 같습니까?”
“글쎄, 나라고 방도가 있나. 우선 문경의 말에 의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문경이가 나이에 비해서 실력이 좋긴 하지만 조장을 맡기기에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신의도 바쁘시니까 그런 거겠지. 적천강 대협께서도 기력을 회복 중이시고, 당사독 대협 같은 중환자들도 워낙 많다 보니까 어쩔 수 없다.”
“이해는 합니다. 이해는 하는데, 아무리 신의의 제자라고 하지만 문경이는 좀……. 그 어린 것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려 섞인 혁무진의 말에 청풍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어어, 하지 마세요. 죽어요.”
“청 소협?”
“방금 하셨던 말, 문 할. 아니 문경이 앞에서는 특히 하지 마세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
혁무진과 궁기방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청풍이 갑자기 헙, 하고 숨을 삼켰다.
“미미야! 어디 갔어, 미미야!”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라진 천년독각사를 청풍이 애타게 찾던 그 순간,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억눌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컥! 야, 이 뱀 새끼야!”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동시에 한 사람을 부르는 여러 개의 이름이 전각 밖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은인!”
“조장님!”
“진태경!”
그 외침에 밖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방금 들었나?”
“혹시 깨어나신 건가?”
“이 소식을 장문인께 알려라! 어서!”
* * *
악몽을 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 한 마리의 뱀이 천천히 목을 조 여오는 꿈을.
숨이 막혔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커헉!”
취릭.
“……?”
취릭? 이거 뭐여, 시벌.
삼 초간의 사고 정지.
마침내 악몽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목에 칭칭 감겨 있는 뱀의 뿔을 잡아챘다.
“야, 이 뱀 새끼야!”
천년독각산지 미미쨩인지, 이름이 뭐였건 상관없다. 오늘부터 이 새끼 이름은 뱀술이다.
“넌 오늘부터 이슬만 먹고 산다. 참이슬.”
붕붕 휘둘러 힘차게 바닥에 내리찍으려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박살 나며 한 사람이 뛰쳐 들어왔다.
“은인-!”
청풍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골이 울린다.
녀석의 등 뒤로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혁무진과 한 발로 콩콩 뛰어오는 궁기방이 보였다.
“조장님!”
“진태경!”
“……너희는 꼴이 왜 그 모양이냐.”
혁무진이 힘차게 몸을 튕기며 대답했다.
“삼괴. 그 미친 노괴가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궁기방이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살아남은 것이 천운이다. 혁무진 저 미친놈이 흙에 돌을 섞어서 삼괴에게 던졌거든. 때마침 칠선자가 나서서 막아 주지 않았다면 오체분시 됐을 거다.”
“……?”
아니, 삼괴는 또 누구고 칠선자는 누구야. 김선자는 나 고등학생 때 학생주임 이름인데…….
‘이런 미친놈들.’
지하 뇌옥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나는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감쌌다.
분명히 신의의 거처에 처박혀 있으랬는데, 그새를 못 참고 기어 나와 죽자고 싸운 모양이다.
목숨을 건졌기에 망정이지, 죽었으면 어쩔 뻔했나.
“너희들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
“……?”
“뭐, 왜?”
이놈들 표정이 왜 이래?
청풍을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문제 있냐?”
“당연히 있지.”
“조장님이 시키셨잖아요. 가서 아미파 구원하라고.”
첫 번째 대답은 궁기방이고, 그다음은 혁무진이었다.
둘다 헛소리라 나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예. 분명히 문경이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혹시 머리 다치셨어요?”
그럴 리가.
눈을 뜨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강대한 기운.
눈 앞에 펼쳐진 시야와 나를 둘러싼 대자연의 기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초절정…….’
당장이라도 이 힘을 시험해 보고 싶다. 지금쯤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시스템 메시지도.
물론 그전에 이런 헛소리를 계속 듣는 대신 한 가지를 물어봐야 했다.
“다들 무사하냐?”
내가 말한 ‘다들’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는 녀석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환하게 웃은 청풍이 대답 대신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은인께서 직접 확인하세요.”
나는 홀린 것처럼 천천히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따스한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이상할 만큼 조용한 공기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나를 반긴다.
“아.”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여승, 도사, 목수와 같은 장인으로 보이는 이도 있고 새하얀 의복을 걸친 의원도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시선에 담긴 감정은 하나였다.
‘경외.’
다음 순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예를 취했다.
누군가는 포권을 취하고, 누군가는 작게 고개를 숙였으며, 누군가는 깊이 엎드려 절했다.
동시에 하나가 된 거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화신룡(烈火神龍)을 뵙습니다!”
한 줄기의 전율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며 훑어내린 그 순간.
띠링.
– 당신의 업적과 명성은 중원 전체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 새로운 별호를 획득했습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 잘했다.
나는 적천강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