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73
#372화
“이곳일세.”
“절벽이네요?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파른 절벽 앞에 멈춰선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백여 장에 달하는 높이와 온통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의 풍경은 그리 특별해 보일 것도 없었다.
‘여기에 무슨 진법이 있다고?’
하지만 의문이 해결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 나는 황갈색의 암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건…….”
모든 것에는 흐름과 결이 있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기운이라고 해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진일보한 감각은, 부자연스러운 기의 흐름을 감지해 내기에 충분했다.
“진법(陳法)?”
내 중얼거림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확히는 환영진(幻影陳)이다.”
건조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훑어본 문경, 아니 살성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뻗었다.
막대한 기의 움직임과 함께 단단하던 암벽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시커먼 동혈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개눈깔은 아니로군.”
“어, 예?”
“되묻지 마라.”
한마디를 툭 흘린 살성은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동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게 욕이야, 칭찬이야.’
이거 묘하게 기분 나쁘네.
그렇다고 막상 화를 내는 것도 뭐한 것이, 살성의 말과 행동에서는 나에 대한 어떤 악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딱딱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러니 듣는 사람으로서는 화가 나기보다 머쓱해질 수밖에.
“…….”
물론 상대가 상대인지라 좋게좋게 넘어가려는 것도 있다.
살성이 그렇다는데 뭐 어쩔 거야. 좀 기분 나쁘더라도 참아야지.
몽정 얘기를 꺼내놓고도 멀쩡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살성을 쌀성으로 만들어 버릴 뻔했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적천강이 보였다.
“갑자기 왜 웃으세요?”
“그냥. 살성 저놈도 어지간히 솔직하지 못한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
“되묻지 마라.”
“……?”
뭐지. 최신 유행어인가.
그 말을 끝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적천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와 두 장문인은 시커먼 동혈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나저나…….’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다니.
심지어 사천의 중심인 성도에서 한나절이면 올 수 있는 거리다. 평범한 양민의 걸음으로 한나절이니,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동굴을 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입구부터 엄청 넓네. 사천당문의 지하 뇌옥보다 몇 배는 더.’
오면서 간략히 들었다. 바로 이 동굴에서 암천의 흉수들이 머물렀다고.
그렇게 많은 숫자가 어디에서 튀어나왔나 했더니, 여기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서천마군의 지휘 아래, 당문에 쳐들어온 적들의 숫자만 삼백여 명이다.
거기에 더해 청성과 아미로 향한 놈들까지 합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머릿수가 된다.
‘사천성 치안이 그 정도로 개판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개방과 하오문이라면 알아차렸을 것 같은데.’
한 줄기 의문을 품은 채 얼마나 걸었을까.
장정 열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한 넓은 길이 끝나고 마침내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허. 이것 봐라.”
족히 천여 명은 수용하고도 남을 것 같은 면적. 천장에 박힌 수십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한구석에는 건량과 벽곡단이 가득 쌓인 항아리와 병장기 등이 놓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저게 뭐야.’
동굴 바닥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이한 문양들.
마치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일정한 배치로 새겨진 그것들은 마치 오래전 잊힌 고대 왕국의 유적지 같았다.
“혹시 저게 아까 말씀하신 그……?”
내 물음에 청성파의 장문인인 청풍고검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저것이 빈도가 말했던 기이한 진법일세.”
설마 했는데, 진짜 진법이었다니.
성라대연에서 진법을 포함한 각종 기관진식을 겪어 본 적이 있었지만 저만큼 크고, 이상한 건 처음 봤다.
‘이 정도면 기이한 걸 넘어서 기형적인데.’
어쩌면 신비로우면서도 위험해 보이는 문양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괴상한 문양은 도대체 뭐지?”
“그것이…… 저희 쪽에서도 아직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청풍고검에 이어 멸절신니가 말을 보탰다.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소. 진법의 일부를 본떠 여러 석학과 명사들에게 보여 주었으나 아는 이가 없더구려. 아무도 모르는 서역(西域)의 문자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겠소.”
그런데 그때,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어, 이거 문자 아닌데?”
“……?”
“……?”
“……?”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쏠렸다. 동굴에 들어온 이래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살성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근거는?”
“그, 근거요?”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을 터. 되묻지 말고 대답해라.”
당연히 있다. 수만 권의 책을 독파하며 지식을 쌓은 유명한 학자도, 일평생 무림을 종횡하며 수많은 경험을 한 무림의 명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근거가.
‘통합 언어 팩.’
시스템의 힘으로 모든 언어를 자동으로 통역해 주는 [통합 언어 팩].
이것만 있으면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글자를 읽고 쓰는 것까지 아무 문제가 없다.
현대에서 스켈레톤 워로드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통합 언어 팩] 덕분이었다.
그러나 패시브 스킬처럼 상시 적용되는 해석 기능에도 진법을 이루는 문양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이건 저 문양이 문자가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
괜히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점점 깊어지는 살성의 눈빛에,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찌, 찌.”
“찌찌?”
쌀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표현. 몽정 사건을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아, 아니, 찌찌가 아니고요.”
“그럼. 젖인가?”
“…….”
제발.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황급히 손을 내젓던 그때, 적천강이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내 제자를 겁박하는 건가? 감히 이 화왕의 후인이자 열화문의 소문주를?”
“겁박이라. 할 필요도 없지만 못 할 것도 없지.”
“우연찮게 구명의 은을 입어 참으려고 했는데, 문가(文家), 네놈이 이리 나온다면 노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찌, 찍었는데요!”
“……!”
“……!”
“……!”
“예전에 책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제 느낌상 글자가 아닌 것 같아서, 찍었습니다.”
순간 내려앉은 고요한 침묵.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내쉰 살성이 적천강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놈이 화왕의 후인이자 열화문의 소문주라고?”
잠시 말이 없던 적천강이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정식으로 입문식을 치르진 않았군.”
“…….”
“그러니까 엄연히 따지자면 본문의 정식 제자는 아닌 게지. 즉, 아직까지 이 녀석은 태원진가 소속이라고 봐야…….”
나와 시선이 마주친 적천강이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했다.
“여기까지 하겠네.”
“…….”
뭘 여기까지 해. 이미 할 말 다 해 놓고.
스승과 제자 간의 신뢰가 박살 나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멸절신니와 청풍고검이 떨떠름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크흠. 어찌 되었건 이 기이한 진법에 관한 문제는 계속해서 알아봐야 할 것 같소.”
“지, 진 도우와 적 선배님의 고견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뒷골목 똥개도 안 믿을 소리로 상황을 일단락한 청풍고검이 그늘진 얼굴로 멸절신니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작 진법으로 그 많은 숫자를 불러오다니. 허, 참.”
“그러게 말이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건 천하 각지 어디에서도 놈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소?”
잠깐, 지금 뭐라고?
설명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찌찌의 후유증에 땅만 쳐다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왜 그러시는가, 진 시주?”
“아니. 방금 두 분께서 진법에 관해 나누신 이야기를 저는 처음 듣는 것 같아서요.”
“음? 이동진(移動陳) 말인가?”
“……이동진이요?”
“그렇다네. 삼괴의 말에 의하면 저 기이한 진법은 이동진이라고 불린다더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암천은 저 진법을 통해 수백 리 거리를 뛰어넘어 이동했다고 하네.”
이동진. 이동진이라니.
갑자기 각진 뿔테 안경을 쓴 평론가가 걸어 나와서 이 진법의 별점은 네 개 반입니다, 라고 해도 지금만큼 당황스럽진 않을 거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건데.’
거리를 뛰어넘어 수백 명을 이동시키는 진법이라니.
다시 떠올릴수록 가슴이 거세게 뛰고 입술이 바싹 마른다.
만약, 이동진이라 불리는 이 진법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라면?
‘아니, 그럴 리가.’
그러나 애써 부정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혹시, 이 진법. 지금도 가동되는 겁니까?”
두 장문인을 향한 물음이었지만, 대답이 흘러나온 것은 살성의 입이었다.
“삼괴. 놈을 이곳에서 직접 잡았지.”
“……이동진을 통해 도주하려 했군요.”
“그래. 하지만 그건 놈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 말씀은…….”
“후에 놈이 실토한 대로 진법을 가동하려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한 가지는 확실하지. 저 진법에서는 아무런 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힘을 완전히 상실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끝마친 살성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보건대, 암천은 틀림없는 마교의 후신(後身)이다. 마교가 보유한 괴공절학(怪功絶學)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 어떤 기이한 술법이 있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지.”
마교가 어떤 곳인지는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왔다.
사마외도(邪魔外道)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강대한 종교 집단.
비록 최종적으로는 정마대전에서 패배했지만, 상당한 기간 천하 무림을 상대로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마교가 보유한 괴공절학 덕택이었다.
‘그럼 이 진법도 마교로부터 전해진 수많은 괴공절학 중 하나라고?’
생각해 봐도 도저히 모르겠다. 예전에 봤던 퓨전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나오던 소재라 그런가. 괜히 더 헷갈리는 기분이다.
‘묵형에서는 잘만 넘어가던데. 후, 완결도 안 나는 걸 괜히 봐 가지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법의 배치와 문양 정도는 외워 두기로 했다.
내가 뚫어져라 이동진을 보며 머릿속에 새겨 나가던 그때, 살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네 태도를 보아하니 뭔가 아는 것 같은데. 혹 짚이는 것이라도 있느냐?”
“…….”
이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