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74
#373화
돌아오는 길은 짧았다.
가는 길에는 정황을 주고받느라 속도라도 조절했지, 게임으로 치자면 초절정 고수가 자그마치 다섯이나 함께하는 초호화 파티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한나절이 걸렸을 거리는 이제 바짝 좁혀져 있었다.
“수고했네, 진 시주.”
“아직 피로할 터인데 따라와 줘서 고맙고.”
사천당문 인근에 이르러 인사를 건네는 두 장문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닙니다. 별로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요, 뭐.”
“하긴.”
“그건 그렇지.”
“…….”
아니, 도움이 못 된 건 사실이긴 한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 청풍고검이 살성과 적천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두 분 선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괜한 발걸음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어 송구스럽군요.”
살성과 적천강이 동시에 대답했다.
“괜한 발걸음은 맞았지.”
“다음부터는 송구스러워할 일을 만들지 말게. 알았나?”
“……아, 예.”
그래, 내가 딱 저 기분이었다니까.
떨떠름한 표정의 청풍고검을 향해 살성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찾는 일이 없길 바라지.”
귀찮으니 적당히 불러라, 라는 뜻이 아니다. 잠시 살성으로 돌아왔던 그는 다시 어린 의생, 문경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이 자리의 모두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당황한 것은 두 장문인이었다.
“서, 선배. 그건…….”
“시주. 다시 한번 생각해 봄이 어떻겠소?”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살성의 건조한 눈빛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청풍고검과 멸절신니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시주의 뜻을 존중하리다. 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은.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유난히도 힘이 실려 있다. 살성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 나선 것은 자그마한 변덕이었을 뿐, 내 뜻은 바뀌지 않는다.”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단호한 대답. 살성의 눈동자가 나와 적천강을 향했다.
“두 사람도 알아들었으리라 믿지.”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시 어울리지도 않는 의생 행세를 할 셈인가?”
“행세가 아니야. 살성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의생만이 남았다.”
“호랑이가 염소 가죽을 뒤집어쓴다 한들, 그것을 염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빨을 감추고 발톱을 숨긴다면 호랑이도 염소가 될 수 있지.”
“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 발톱을 드러냈고. 안 그런가?”
살성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파였다.
“나이가 들더니 말이 더 많아졌군. 내게 빚진 것이 있을 텐데.”
“……거참. 틀린 말이 아니라 뭐라 말도 못 하겠군.”
“대답한 것으로 알지.”
적천강과의 대화를 일축한 살성이 나를 힐끗 바라봤다.
“넌?”
“저요?”
“그럼 남은 게 또 누가 있느냐?”
“아뇨, 그게 아니라. 저한테 선택권이 있는 겁니까?”
“물론.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살성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첫째. 문경이라는 어린 의생의 정체가 살성이라는 걸 떠벌린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변사체로 발견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입을 다물고 전처럼 나를 대하다가 조용히 떠나는 것.”
“…….”
“어느 것으로 하겠나?”
이야, 너무 어려운 선택지라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내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로.”
“잘 생각했다.”
“응.”
내 신속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살성이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왜?”
“뭐?”
“아니, 왜 그래. 전처럼 편하게 대하라면서.”
“……!”
“……!”
두 장문인은 입을 딱 벌렸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살성은 낄낄 웃고 있는 적천강을 향해 물었다.
“이거, 미친놈인가?”
“원래 그런 놈이다. 어때, 골 때리지?”
“골을 부수고 싶은데.”
나는 골이 부서지기 전에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아, 제가 순간적으로 착각을 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개도 안 믿을 소리지만,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지.”
실수인 척 한번 엿 먹이려는 게 너무 티가 났나. 잠깐 가늘어진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던 살성이 입을 열었다.
“어쨌건 앞으로는 유의해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나에 관한 사실은 아무도 모르니. 아, 청풍 그 아이는 예외다. 내 제자는 당연하고.”
“청 소협도 알고 있었습니까?”
“그래. 그 아이를 제외하고 그날 내 모습을 본 놈들은 모두 죽었다.”
사후처리 깔끔한 것 보소. 왜 사천당문에는 포로가 한 놈도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복면 살성. 가면을 벗으면 패널이고 방청객이고 싹 다 뒈지는 거다.
‘그나저나 볼수록 기분 묘하네. 문경이 바로 그 살성이었다니.’
장강에서의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가 보여 준 모습 중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일까.
내가 알던 천진난만하던 어린 의생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빛을 지닌 천하제일의 살수가 있을 뿐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 가지 물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그토록 스스로를 감추려고 하십니까?”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사천당문을 향해 나아가던 살성의 신형이 갑작스러운 물음에 우뚝 멈췄다.
짧은 침묵 끝에 의외로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무림이라면 지긋지긋하니까.”
“그래서 떠나신 겁니까?”
“그래. 두 번 다시는 살생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지.”
이곳, 무림에서 살수는 멸시받는 존재다. 정파는 물론이고 사마외도(邪魔外道)에서도 그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더 높은 무학의 경지를 추구하는 무인이 아닌, 오직 살인을 위해 태어난 자들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살수가 살성(殺星)이라는 별호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묻혔을까.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궁금하네요.”
“뭐?”
“그렇게 싫어하는 무림으로 다시 돌아오신 이유가.”
“……다시 돌아오다니 무슨 헛소리냐.”
살성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글쎄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 선택은 직접 내리신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장강에서 마주친 어느 무림인들에게 가는 길이 같다며 동행을 청한다든지, 며칠 후 우연처럼 다시 만나 스리슬쩍 자신의 정체를 알려 준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제 이름을 빌려 개방의 후개에게 아미파를 구원하라 시키고 본인은 청성파로 가서…….”
“그만.”
“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나하나 말해 보니까 꽤 많네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것이냐?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방관한 채, 너와 네 스승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는 말이냐?”
“그럴 리가요. 정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대협.”
비꼬는 것이 아닌, 정말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다. 적절한 때에 나서 준 그가 아니었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 테니까.
물론 나와 적천강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대답을 들은 살성의 반응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퍼석했다.
“날 대협이라고 부르지 마라.”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살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커다란 점처럼 보이는 사천당문을 향해 한 걸음을 떼자 신형이 유령처럼 미끄러진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소년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문경. 그것으로 족하다.”
정말 그것으로 족할까. 정답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문경아.”
“……!”
그 순간, 앞서나가던 한 사람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 * *
전각으로 돌아온 내 뒤로 거머리 두 마리가 따라붙었다.
한 놈은 오른팔인지 새끼손가락인지 헷갈리는 혁무진이고, 다른 하나는 요새 때라도 밀었는지 조금이나마 피부가 하얘진 거지다.
“문경이, 쟤 왜 저래요? 왠지 모르게 조금 어두워진 느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스승인 신의께서도 상처를 입으셨고, 지금 기다리는 환자들도 워낙 많으니.”
“아, 그렇구나. 그런데 조장님, 문경이랑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애가 울적해 보이니까 바람 좀 쐬게 해 준 거 아냐. 넌 왜 그렇게 멍청하냐?”
“허, 살다 살다 거지한테까지 이런 소릴 들어 보네. 제가 이래 보여도 서책만 몇백 권을 읽은 사람이에요. 어디 가서 멍청하다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아니, 내가 볼 때는 그냥 둘 다 멍청한 것 같은데.
나는 혀끝에 맴도는 살성이라는 두 글자를 꿀꺽 삼켰다. 아마 저 녀석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문경의 진짜 정체를.
‘하긴. 그 정도 연기력이면 누구나 속아 넘어가지.’
사람들의 이목이 닿기가 무섭게 살성은 문경으로 돌아갔다.
평소 쾌활했던 소년 의생의 분위기가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고 해서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해야 맞겠다.
“사서삼경이면 인정하는데, 끽해야 무협 소설만 줄창 읽어 놓고 서책은 무슨.”
“연애 소설도 읽었습니다. 귀염미(貴艶美) 모르세요?”
“잠깐. 귀염미라면 혹시 후기지수의 유혹, 그놈은 강했다 등등을 쓴 서생?”
“어, 아시네.”
“당연히 알지. 일결 제자 때 구걸한 돈으로 그거 빌려 보다가 왕초한테 먼지 나게 얻어맞았는데. 하, 그 새끼 지금 만나면 타구봉법으로 확 그냥.”
빠박!
“억!”
“악!
사이좋게 추억을 공유하는 두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고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저 자식들은 가뜩이나 생각할 일도 많은데 왜 여기 와서 난리인지 모르겠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지금쯤이면 청풍은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을 거고, 적천강도 오늘 하루는 푹 쉬라고 했으니 당분간 날 찾을 사람은 없다.
푹신한 침상에 몸을 눕힌 나는 잠시 미뤄 두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읽은 메시지 확인.’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득 메우는 시스템 창. 예전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최고 기록 경신이다.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주요 메시지부터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 [Lv.170 노군백]을 처치했습니다!
– 퀘스트,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하셨습니다!
– 시스템 메시지가 한도를 초과했습니다. 획득한 경험치와 명성을 합산합니다.
– [Lv.120]에 도달했습니다!
– 명성이 기준치를 돌파함으로써 새로운 별호를 획득합니다!
– 당신은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모든 무공의 경지가 크게 상승하며 새로운 무공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열화신공]의 경지가 팔 성에 도달했습니다!
– [화염신장]의 경지가…….
– [화룡신창]의…….
무수한 악수의 요청, 이 아니라 메시지의 향연.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눈알이 빙글빙글 돌았다.
“……와, 씨.”
이게 다 뭐냐.
아직도 안 읽은 메시지가 절반이나 된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남은 개수를 파악하기 위해 손으로 스크롤을 내리는 그때, 특이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 새로운 아이템이 당신에게 종속됩니다.
– 현재 보유 중인 종속 아이템 : [백염], [???]
–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면 아이템은 오롯이 당신에게 종속되며, 어디에서나 인벤토리를 통해 소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게 뜨네…….”
현대와 무림의 인벤토리는 각각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백염과 같은 종속 아이템은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꺼내 쓸 수 있다.
안 그래도 백염만으로는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이런 행운이라니.
‘주면 나야 땡큐지.’
기대감에 부풀어 인벤토리를 확인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조장님. 저 무진인데요…….”
“꺼져.”
“아니, 그게 아니라요.”
“형 바쁘다. 가서 귀염미 소설이나 봐.”
“어, 조장님도 보셨어요?”
“……아니 이 새끼가 진짜.”
안 되겠다. 우선 아이템 까기 전에 저 자식부터 까야겠다.
내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혁무진이 황급히 외쳤다.
“하남! 하남이요!”
“뭐?”
“하남에서 조사단이 왔습니다! 조장님을 찾고 있어요.”
“……조사단?”
앞뒤 다 자른 혁무진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진 그때.
띠링.
익숙한 알림이 귓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