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85
#384화
청성산(靑城山).
아득한 세월을 간직한 도교의 성지.
그 준엄하고도 압도적인 산세를 마주한다면, 그 누구라 해도 순간 할 말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다르지만…… 닮았어.’
무림의 청성산. 그리고 21세기 현대의 청성산.
지금껏 내가 경험해 온 두 세상은 많은 부분을 닮았다. 무림에서의 지형, 언어, 사람들의 용모와 생활 양식까지.
한때는 어쩌면 무림은 현대의 머나먼 과거가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니었지.’
나비효과?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일어났을 리가.
두 세상은 분명 닮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역사도 달랐다.
또한 무림의 세상은 현대의 그것보다 좁고 오대양 육대주로 갈라져 있지도 않다.
이역만리의 이국땅에 색목인들이 살기는 하나 그뿐. 거대한 대국의 통치 아래 존재하는 대륙이 저쪽 세상의 중심이다.
중국 사람들이 지겹도록 주장하는 중화(中和)가 곧 무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것까지 닮았냐.’
사천성을 무자비하게 피로 물들였던 삼문혈사(三門血史)를 겪고 돌아오자마자 쓰촨성의 청성산에 오다니.
단순한 우연인지, 지독한 악연인지 모르겠다.
부디 그런 것까지 닮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진 선생?」
“진태경 씨.”
“아.”
나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어느새 비즈니스 제트기에서 내린 웨이펑후와 최 팀장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경치에 잠깐 한눈팔려서.”
「이토록 어두운데 청성산의 절경을 볼 수 있다니. 진 선생께서는 대단한 마나의 소유자시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금은 굳이 공력 없이도 어지간하면 안력(眼力)으로 꿰뚫어 볼 수 있다.
내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펑후가 감탄했다.
「과연, 한국이 진 선생을 왜 그리 꼭꼭 숨겨 두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구려. 나라의 얼굴이라 할 만한 S급 헌터답소이다.」
“예? 저 아직 자격증으로는 A급인데요.”
「굳이 숨길 필요 없소. 본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으니.」
뭐라 말하기도 전에 웨이펑후가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었다.
「S급 헌터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신 수양과 고된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법. 본국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지금의 헌터들을 육성했는데…… 진 선생처럼 젊은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
“……?”
「아, 물론 옆에 계신 최 선생도 훌륭한 헌터요. 이런 분들이 함께하니 나로서는 든든할 뿐이오.」
이게 무슨 든든하게 국밥 말아먹는 소리냐.
짧은 순간 시선을 교환한 나와 최 팀장은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입 다물자.’
‘그냥 갑시다.’
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인 듯싶은데, 이미 저쪽에서 붙인 딱지를 굳이 우리 손을 떼 줄 필요는 없다.
당장 이 자리에서 웨이펑후를 납득시키기도 귀찮고.
“음, 약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때가 되면 제가 차차 말씀드릴게요.”
「오해랄 것 있겠소. 서로 다 사정 아는 처지에.」
“…….”
“…….”
「주석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사안이니, 뵙게 되면 구태여 부정하지 말고 그러려니 하시오.」
알긴 뭘 알아. 나는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주석이라.’
중화 인민공화국에 존재하는 10억여 명의 인구와 경제, 군사를 한 손에 틀어쥔 왕 같은 존재.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금에도 현대의 상식이 뿌리박힌 내게 그는 가까우면서도 한없이 먼 존재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얼굴이나 한 번 볼 수 있으려나?
뭐, 무슨 상관이겠나. 이건 한참 나중에 생각해야 할 문제다.
레이드 수당을 제외하더라도 주급이 무려 백억. 지금의 내게는 손 큰 고용주일 뿐이다. 사람도 구하고, 돈도 버니 일석이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뵙게 되면요.”
「좋소. 그럼 뵈러 갑시다.」
“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지금 지하 벙커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아니,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이야.
앞서가는 웨이펑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최 팀장에게 다가가 빠르게 속삭였다.
“바, 방금 들으셨어요?”
“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도 좀 의외로군요. 국가 주석이 안전한 베이징을 놔두고 여기까지 오다니. 세간의 평가가 어느 정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세간의 평가고 나발이고. 중국 종석이, 종석이가!”
“종석이가 아니라 총서기! 국가 주석이라고!”
「음? 방금 뭐라 하셨소?」
「아무것도 아닙니다. 국방부장님.」
문득 뒤돌아본 웨이펑후를 향해 정중하게 둘러댄 최 팀장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아주 진지하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태경 씨. 주석 앞에서 지금 같은 말실수는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특히 종석이 얘기는 말도 꺼내지 마세요. 무슨 고등학교 동창 이름도 아니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
방금 최 팀장이 시발이라고 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깊게 심호흡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종석이 아냐. 총서기야. 중국 주석이야.’
태생부터 성골 귀족이었던 최 팀장과 달리 나는 뼛속까지 소시민이다.
평소 중국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건 간에,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대국의 지도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실수만 하지 말자. 특히 종석이.’
그리고 십 분 후, 나는 깊숙한 지하 벙커에 모인 주요 인물들의 시선을 받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반갑소, 진 선생. 이 늙은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을 맡고 있는 샤오 양이라 하오.」
좋아, 종석이의 종자도 꺼낼 일은 없다. 한고비를 넘긴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
“……?”
아, 시벌.
* * *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자 총서기. 그리고 10억 명이 넘는 인민들의 정점에 선 국가 주석.
샤오 양(Shao Yang).
사람들을 향한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눈빛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안타깝게도 나는 군사 전문가도, 뛰어난 장군도 아니오. 일찍이 정치에 몸담아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작은 뜻을 이룬 협잡꾼일 뿐이지.」
스스로를 협잡꾼이라 지칭하는 말은, 지구에서 네 번째로 거대한 국토와 제일의 인구수를 지닌 국가 수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이런 뜻이었나? 최 팀장이 말했던 세간의 평가라는 게.’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그저 사람들 앞에서 꺼내 든 가면이나 위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를 포함한 모두의 앞에서 말을 이어 가는 노인, 샤오 양 중국 주석에게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氣)가 느껴졌다.
「최선을 다해 주시오. 부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민을 구하고, 하루빨리 이 끔찍한 참사를 막아 주시오. 만약 그리 해 주신다면 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나라에 합당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이번에 준 도움을 오래도록 기억할 거요.」
사실 저 노인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정책을 펼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자국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는 것에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이 늙은이의 말은 여기까지요. 여러분들은 부디 정치와 같은 복잡한 문제는 신경 쓰지 말고, 최소의 희생으로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찾아 주시길 간곡히 부탁하겠소.」
정치에 일평생을 바친 늙은 정객(政客)은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웨이펑후 국방부장. 내 오랜 벗이여.」
「예. 존경하는 주석 동지.」
「중앙군사위원회의 전권을 원하나?」
잠시 망설이던 웨이펑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네라면 그 힘을 잘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거절하겠네.」
「……주석 동지?」
「회의가 끝나면 명령서를 가져오게. 모든 일의 전권도, 책임도 내가 질 테니.」
순간 중국 종석이가 왜 저러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자신이 안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최 팀장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좋은 리더군요.”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한테는 최 팀장님이 최곱니다.”
“진태경 씨…….”
“그러니까 길드 정산 비율 좀 올려 주세요.”
“진태경 씨…….”
같은 말, 다른 느낌.
니 새끼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최 팀장이 고개를 젓던 그때였다.
「주석께서 퇴장하십니다.」
서기관의 말에 앉아 있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가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다.
「모쪼록 무운을 비오.」
주석은 이 자리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말을 건넸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걸렸다.
「진 선생.」
“……예.”
나를 바라보는 주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내 진 선생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오. 비록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 계약이라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명을 우선해 주었으면 좋겠소.」
기분 탓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긴 인사말이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디 꼭 큰 힘이 되어 주시구려.」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던 주석이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어서 오시오.」
“…….”
「그럼 이만.」
주석을 배웅하기 위해 동석하고 있던 중국 고위 관계자들이 사라지고,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벌.’
만약 내가 죽는다면 사인은 수치사다. 설령 몬스터한테 죽는다고 해도 사인은 수치사로 하기로 했다.
‘으아, 으아아아아!’
마음속으로 온 사방을 향해 울부짖는 내 발을 무언가가 지그시 밟았다. 보나 마나 옆에 앉은 최 팀장이 분명했다.
“왜요.”
최 팀장이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뭐요.”
“크흐흠. 사람들, 사람들.”
“아.”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하 벙커 안, 남녀와 인종이 뒤섞인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네 사람이 있었다.
‘저들은…….’
중국인 남녀 한 쌍. 그리고 각각 초록빛과 푸른빛을 띤 서양인 사내 둘.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느껴진다. 그들의 몸 안에 웅크린 거대한 기운이.
놀랍다기보다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저 네 사람의 정체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을 것이다.
‘S급 헌터.’
존재 자체가 이슈인 사람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헌터 중에서도 정점에 선 이들.
TV와 광고에서 지긋지긋하게 보던 얼굴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중 한 사람이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아, 혹시 영어를 잘 모르나? 통역 마법을 써 줄 수도 있는데.」
먼저 말을 걸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오, 이 친구 발음 보게. 미국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중년의 흑인. 2미터를 훌쩍 넘기는 거구의 그가 푸른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은데. 안 그래?」
모를 리가 있나. 나는 샤오 양 주석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떨림을 느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매직 존슨(Magic Johnson).”
전 세계에서 오직 세 명만이 부여받은 대마법사의 칭호.
눈앞의 흑인, 매직 존슨은 그 대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는 워 메이지(War Mage)다.
‘매직 존슨이랑 이야기를 하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
여러모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내게, 세계 최고의 워 메이지가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하. 알아봐 주니 고맙군. 사실 나도 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저, 절요?”
「당연하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 막내딸도 시벌좌를 아는걸.」
“…….”
아니, 저 염병할 별명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려진 거야.
시벌좌라는 별명이 영미권에서는 뭐라고 불리려나. 퍽 가이? 퍽 맨?
매직 존슨의 어린 막내딸이 나를 그런 이름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기쁘지 않다.
그리고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별명이군. 뭐, A급 헌터 나부랭이에게 딱 어울리긴 하지만.」
이제 막 서른쯤 되었을까. 비교적 젊어 보이는 중국인 사내가 비스듬히 팔짱을 끼며 나를 응시했다.
「안 그래, 반도의 빵즈?」
최 팀장이 말릴 틈도 없었다. 이미 내 목소리는 자동 응답기처럼 흘러나온 후였으니까.
“뭐래, 대륙 짱깨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