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91
#390화
촤아아악!
강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 솟구치는 목들과 함께 뜨거운 핏물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볏짚처럼 쓰러지는 오우거의 몸뚱이를 밟고 높이 솟아올랐다. 목덜미에 닿는 햇볕이 따스하다.
‘거, 싸우기 딱 좋은 날씨네.’
때는 정오. 장소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
운집해 있는 천여 마리의 몬스터들 한가운데에 태양을 등진 내 그림자가 비친다.
급강하와 동시에 내리그어지는 창날의 움직임까지도.
‘천격(天格).’
콰아아아앙!
화룡의 발톱이 지상을 할퀴었다.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 지면이 수 미터 깊이로 주저앉고 흙과 돌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전장의 중심에서 일어난 열풍(熱風)의 회오리가 칼날이 되어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콰아아아!
띠링. 띠링. 띠링…….
흙먼지로 인해 뿌옇게 물든 시야 속, 몬스터 처치를 알리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녹색 핏물이 투두둑 쏟아진다.
가볍게 손을 내젓자 먼지구름이 흩어지고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 취릭?
– 크륵?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들. 깊게 숨을 들이쉰 나는 공력을 실은 외침을 토해 냈다.
“쓸어-!”
그리고 다음 순간.
「와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해지는 함성과 함께, 어느새 들이닥친 천여 명의 헌터들이 파도처럼 몬스터 군단을 덮쳤다.
콰드드드득!
퍼버벅!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는 몬스터들을 보며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 전투, 이겼다.’
농사가 끝났으니 이제 추수를 해야 할 때.
나는 보스 몬스터로 보이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금쪽같은 경험치. 아니,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저놈이 우두머리다! 원거리 부대!」
“야, 야! 손 떼! 내가 처리할 테니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하늘에 맹세컨대, 정말 요만큼의 사심도 없다.
“…….”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맹세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 간악한 인간이여. 부산물을 차지하려는 네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내 군단을 학살할 때도 탐욕을 숨기지 않았지!
“닥치고 네 할 일이나 하지? 빨리 언데드로 동족상잔 시작해.”
–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자라나라 해골해…… 어?
“왜 그래?”
– 왜 내 힘이 통하지 않는 거지? 혹시 버그인가?
“……그런 단어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점점 현대화가 진행 중인 스켈레톤 워로드가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안으로 들어올수록 아크 리치의 지배력이 강해지는 것 같다. 아아, 군단 없는 사령관이라니. 실로 통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이래서야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
“…….”
이 새끼는 본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제는 이미 죽어 있다고 말해 주는 것도 지겹다.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대승입니다! 이번에도 대승이에요!」
샤오 쉔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본 광경이라 이제는 나와 최 팀장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분위기다.
‘뭐, 신날 만도 하지.’
자그마치 천여 마리의 몬스터 대군을 전멸시키기까지 겨우 두 시간 남짓.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이 마무리 지었으니 기념비적인 승리인 것은 맞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덤덤한 것이 이상한 거지.
「저희 쪽 피해는 중상자 스물셋, 경상자 서른 명이 전부입니다. 아, 이건 정말……!」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떤 샤오 쉔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매번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음. 그건 내가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 대답에 최 팀장이 살짝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왜요?”
“아니. 보통 이럴 때는 운이 좋다거나, 뭐 그런 겸양의 말을 하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렇죠. 근데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정말 강해서 이런 걸 어떡합니까. 안 그러냐, 쉔?”
샤오 쉔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형님은 최고십니다!」
“녀석. 훌륭한 아부의 표본이로구나.”
“…….”
주거니 받거니 하는 우리의 모습에 최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요.”
“아닙니다. 하긴, 이래야 진태경 씨답긴 하죠.”
뭐지, 묘하게 기분 나쁘게 들리는데.
어깨를 으쓱한 나는 샤오 쉔을 향해 물었다.
“그보다 본부 쪽은?”
「아, 그렇지 않아도 전투 시작 전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연락을 취했다는 건, 휘하에 있는 헌터 몇 명을 미리 보내 놨다는 뜻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전령(傳令)이 웬 말이냐 싶겠지만, 어쩔 수 없다. 마법으로 통신과 위성 감시가 불가능한 상황이니 죽어라 뛰거나 차량을 이용하는 수밖에.
그래도 조명탄을 포함한 여러 문물이 있으니 다행이다.
“또 한참 걸리겠군.”
「뒤따라오는 중이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피곤하겠지만 천막이라도 쳐서 애들 쉬게 해. 금방 끝나긴 했어도 전투 끝나면 진이 쏙 빠진다.”
「대형 몬스터 정도는 우리 쪽에서 처리해 놔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본부가 옮기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본부란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군 병력을 말한다.
나를 포함한 공안 무력부 소속 헌터들이 선봉에서 몬스터를 무찌르면, 뒤따라온 군 병력이 해당 지역과 몬스터 사체들을 ‘청소’하는 방식이었다.
굳이 청소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목적이 부산물 노획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말 그대로 청소다. 내가 맡은 서부 전선의 군대는 죽은 몬스터들이 언데드로 부활할 수 없도록 사체를 토막 내고, 후방으로 옮기는 역할을 가장 많이 했다.
「저어, 형님.」
“응, 왜?”
「그간 부끄러워서 말씀드리지 못했었는데…… 현재 몇몇 고위 장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 무슨 말?”
샤오 쉔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 본인들이 맡은 역할에 불만이 조금…….」
“……?”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샤오 쉔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뗐다.
“혹시 자기들도 몬스터 사체 그만 치우고 공을 세우고 싶다. 뭐 그런 거야?”
「……예.」
“아니,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쌍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다른 전선에서는 군인들이 하루가 멀다고 죽어 나가는데, 몬스터 사체 치우기가 지겹다니.
가만히 듣고 있던 최 팀장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짱깨가 짱깨 했을 뿐입니다.”
저게 천 명에 가까운 중국인들 앞에서 할 소린가 싶지만, 중국인과 짱깨는 엄연히 다른 인종이다.
착한 중국인의 대표인 샤오 쉔의 얼굴은 어느새 부끄러움으로 붉어져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만 장교들 전부는 아니고, 일부 인원들이 그런 불만을 품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부 인원들이라. 그렇겠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샤오 쉔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그 일부 인원에, 저기 오는 저 인간도 포함되어 있냐?”
저 멀리, 백여 대의 장갑차와 전차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 *
드르륵, 덜컹!
황폐해진 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위아래로 들썩인다. 앉아 있는 군용 차량의 창밖으로 엉망이 된 논과 밭, 무너진 민가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뒷정리가 끝난 후 나는, 아니 ‘우리’는 인근 소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하, 정말 고생 많았소이다. 진 선생!」
꽉 조인 벨트로도 감출 수 없는 뱃살. 태양 아래 번쩍이는 정수리.
입고 있는 군복과 견장에 박힌 별 세 개가 아니었다면, 내가 눈앞의 장년인과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 상부에 연락이 닿았소. 진 선생의 승전보에 유엔 안보리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난리가 났어요! 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오늘을 주모 기일이라 부른다던데…….」
시종일관 떠들어 대는 헛소리를 듣는 건 여기까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주모가 뒤졌는지 살았는지, 그런 건 관심 없고요.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지, 진 선생?」
중국 정식 편제로는 청두군구(成都軍球). 그중에서도 일곱 개의 사단, 여단이 속한 제 13집단군 총사령관인 랴오 상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왜, 왜 이러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오늘 제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지금 좀 예민해졌네요.”
「누가 감히 진 선생의 심기를! 뭐든 물어보시오.」
“아, 예. 제가 여쭤볼 건 다름이 아니고…….”
나는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랴오 상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공을 세우고 싶은 몇몇 장교들의 불만이 상당하다던데…… 혹시 알고 계셨나 해서요.”
「크흠.」
알고 있었군.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뒀다니. 하도 어이가 없으려니 이제는 오히려 덤덤해진다.
그래도 명색이 아군이자 타국의 쓰리스타.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그 씨팔 새끼들 면상 좀 볼 수 있습니까?”
「크흐흠!」
“아니 시부럴 거,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이 시국에 공을 세우고 싶다고 지랄을 해요. 막말로 지들이 나가서 싸울 것도 아니고, 일반 병사들 앞에 세우고 뒤에서 지휘봉이나 휘두를 거 아닙니까.”
「크흐흐흠!」
“몬스터 사체 치우기 귀찮다는 게 무슨 개소립니까. 왜요, 하도 보니까 정겹고 친근해져서 본인들도 사체가 되고 싶대요? 진짜 뒈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개 같은 거.”
「크흐흐흐흠!」
“그런 새끼들 있으면 그냥 와서 말하라고 해요. 장비 입혀서 선봉에 세워 줄 테니까. 고기 방패로 쓰면 딱이겠…….”
열변을 토하던 나는 문득 입을 닫았다. 랴오 상장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스프링클러처럼 쏟아지는 중이었다.
「…….」
“…….”
이 인간도 그 정신 나간 놈 중에 하나구만.
지하 벙커에서 핵을 쏘니 마니, 염병을 할 때부터 보통 미친놈은 아니구나 싶었는데. 정말 상당한 수준으로 미쳐 있는 게 분명하다.
“……장군님. 제정신입니까?”
「그, 그러니까 이게. 우리도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 뭐 그런 게 조금은…….」
“아니, 피해 없이 쭉쭉 잘 가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 보여 줘요. 헌터들이 앞에서 길 뚫고, 군대는 뒤에서 뒷수습하면서 민간인들 구하고. 잘하고 있는데 뭘 더 보여 주냐고.”
우두둑.
손가락 관절을 꺾는 내 모습에 랴오 상장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 어허! 우리 서로 간에 반말은 하지 맙시다. 내 연배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진 선생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오.」
“아주 그냥, 대접으로 대가리를 깨 버릴까.”
「뭐, 뭣이?」
“아닙니다. 잘못 들으신 거예요. 어쨌든 알겠고, 허튼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는 사상자는 최소로, 민간인들 구출하면서 천천히 진격하자고요. 아시겠습니까?”
「…….」
이 인간 반응이 왜 이래?
대답 대신 눈깔을 뒤룩뒤룩 굴리는 랴오 상장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이미 명령을 내린 겁니까?”
「그, 그게. 내가 지금 군납 비리 건에 연루되어 있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뭔가를 해내야 하는 시점이라…….」
“야 이 개새끼야!”
쾅!
내 발길질에 방탄 처리 되어 있는 문짝이 뜯겨 나갔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운전병이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히익!”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던 랴오 상장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소도시에 몬스터가 있을 것 같아서 예비대로 운용 중이던 공안 무력부 헌터들을 조금 투입시켰…….」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뭐라 다그치기도 전에, 어느새 가까워진 도시로부터 굉음이 울려 퍼졌으니까.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 솟구치는 불꽃과 연기.
그리고…….
띠링.
돌발 퀘스트를 알리는 시스템 알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