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93
#392화
‘빌어먹을. 더, 더 빨리.’
쐐애애애액!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신법을 발휘했다. 주위의 풍경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폐허로 변한 도시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모든 일의 결과는, 도착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아니,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고 해야 맞겠다.
삐빅.
– [???]가 목표를 완수하고 사라졌습니다.
– 돌발 퀘스트, [예상치 못한 습격]이 취소되었습니다.
– 당신은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실패 패널티로 랜덤 스탯이 10 감소합니다.
– [근력]이 10 감소합니다.
시스템 알림을 듣는 순간, 팽팽하게 조여 오던 긴장이 탁 풀렸다.
퀘스트를 실패해서도, 스탯이 감소했기 때문도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적막함과 잠시 후 눈 앞에 펼쳐진 현장은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
사방에 가득한 피와 참혹하게 널브러진 시신들. 지금껏 숱한 전투를 치르며 죽음에 익숙해진 나조차도 순간 몸이 굳을 정도였다.
‘도륙(屠戮).’
그래, 이건 도륙이다. 터트리고, 찢어발기고, 뭉개 버렸다.
살아있는 인간을 마치 개미처럼 잡아 죽인 흔적에 숨이 막혔다.
엄연한 타국 사람이자 생면부지인 나도 이럴진대, 뒤따라 도착한 공안 무력부 헌터들이 느낀 슬픔과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장 웨이! 랑랑!」
「어, 어떤 새끼들이냐! 어떤 새끼들이…… 크흐흑!」
「안 돼! 으아아아!」
서로의 등을 맡기던 동료들이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사람 중에는 이들의 형제도, 연인도 있었다.
끝없는 통곡과 고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말없이 우뚝 서 있던 한 사람이 문득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그의 공허한 걸음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것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표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곁에 서 있던 최 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진태경 씨.”
“압니다. 저도.”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지금이 그랬고, 나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쉔.”
「…….」
“샤오 쉔!”
저벅, 저벅, 저벅.
힘주어 부른 외침에도 샤오 쉔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부하들을 죽인 흉수들을 찾아 어딘지 모를 장소로 걸어갈 뿐이다.
결국 내가 직접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탁.
“멈춰.”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퍼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놓으십시오. 가야 합니다.」
“어디로?”
「어디?」
텅 빈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본 샤오 쉔이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겁니다.」
“너…….”
「쫓아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서, 복수할 겁니다.」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내 눈에 비친 그는 샤오 쉔이 아니었다. 바로 몇 년 전의 나였다.
그렇기에 해야 할 말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어떤 심정인지 아니까.’
죽이고 싶고, 죽고 싶을 거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남긴 감정은 분노와 슬픔만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그 두 가지를 합친 것보다 무거운 죄책감이 기다리고 있다.
백 명의 목숨이 남기고 간 죄책감은,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무게였다.
‘빌어먹을.’
혀끝에서 맴도는 욕설을 삼킨 나는 녀석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늦었어.”
「…….」
“이미 늦었다고. 지금 당장은 놈들을 찾지 못해. 이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야.”
시스템 알림이 알려 준 사실이니 틀림없다. 내 확신에 찬 눈빛을 마주한 샤오 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늦었군요. 정말 늦어 버렸어요.」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 그게 현실이다.”
나는 녀석이 참았던 분노와 슬픔을 터트릴 줄 알았다.
몇 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리 내어 울고,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때려 부술 줄 알았다.
하지만 틀렸다. 샤오 쉔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은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드르르륵. 쿵.
이제야 도시로 진입하는 전차들.
작은 점이었던 것이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진군 행렬을 바라보던 샤오 쉔의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놈이라도 죽여야겠습니다.」
‘저놈’이 누굴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랴오 상장. 이 개 같은 명령을 내린 장본인.
놈의 같잖은 명령 하나로 백 명의 헌터와 수백의 군인들이 죽었다. 내 생각에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놈이 분명했다.
하지만…….
“시발, 미안하다.”
나는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이상함을 느낀 샤오 쉔이 피하려 했지만, 미끄러지듯 움직인 내 손은 이미 녀석의 혈도를 스친 후였다.
툭. 투두둑!
마혈(痲穴), 아혈(啞穴), 그리고 수혈(睡穴).
전신이 마비되고 목소리가 막힌 샤오 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깊은 수마(睡魔)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는지, 녀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지금은…… 우선 푹 자라. 저들의 죽음은 네 잘못이 아니야.”
스륵.
끝내 굳게 닫히는 눈꺼풀. 마지막으로 본 샤오 쉔의 눈에 담긴 것은 분명한 의문이었다.
‘왜, 어째서?’
그리고 그 의문은 샤오 쉔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연대장님!」
「진태경, 당신!」
후우우웅! 쉬쉭!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다섯 줄기의 파공성이 일었다.
샤오 쉔의 휘하에서 중대장이라 불리는 A급 헌터들.
나는 거침없이 쇄도해 오는 그들을 향해 손을 떨쳤다.
펑!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나를 노리고 날아들던 병장기가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간 장력(掌力)을 간신히 막아낸 중대장들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난다.
내가 힘을 조절해서 망정이지, 마음 단단히 먹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거다.
“다들 진정해.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큭!」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요!」
「당신, 감히 연대장님을……!」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흉흉한 분위기 속, 최 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진태경 씨는 호의에 대한 보답을 한 것뿐입니다.”
「뭐, 뭐라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분노한 샤오 연대장은 랴오 상장을 죽였겠지요.”
「……랴오 상장은 죽어 마땅한 놈이오. 연대장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직접 나섰을 테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귀국의 중앙위원회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군요. 특히 랴오 상장이 속해 있는 태자당에서는 더더욱.”
「……!」
“상대는 한 전선을 책임지는 최고 사령관. 그를 죽인다면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최 팀장은 공안 무력부의 헌터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천 명을 헤아리는 대병력이다. 나는 거기까지 헤아리지 않았지만, 이런 사건에 연루된다면 그들 역시 낭패를 피할 수 없다.
“오늘 일을 잊으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흉흉하던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현실적이면서도 감정에 기반을 둔 최 팀장의 말에,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던 중대장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동의하오. 당장 놈을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 거요.」
「…….」
「기억하시오. 우리의 형제들이 죽은 건 랴오 상장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참혹한 시산혈해의 광경을 둘러본 그가 뿌득, 이를 갈았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립시다. 곧 때가 올 거요.」
「허어.」
「……이런 제기랄!」
하늘을 보며 한탄하는 사람도,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만은 분명했다.
마침내 사태가 일단락되자 최 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놨군요. 진태경 씨께서 샤오 연대장을 막아 주셔서 다행입니다.”
“……뭘요.”
다행. 다행이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입맛이 씁쓸했다. 나는 샤오 쉔이 느꼈을 분노와 슬픔을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생존자들이 있는 것 같던데.”
“중년 부부와 아이 한 명이 남아 있더군요. 극도의 긴장 때문에 혼절한 상태라, 우선은 따로 옮겨 휴식을 취하게 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다른 생존자는요?”
“곧 찾겠지요.”
눈살을 찌푸린 최 팀장이 내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말입니다.”
드르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진하던 장갑차가 이십여 미터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삼엄한 호위 속,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랴오 상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게 도대체…….」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에 안 그래도 뽀얗던 피부가 창백하게 질린다.
허리를 굽히고 한참이나 헛구역질하는 모습을 보니, 혐오감과 동시에 저놈도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개새끼. 그래도 죄책감은 있나 보지.’
아마 이 자리의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랴오 상장의 한 마디에 나는 잊고 있던 깨달았다.
저런 종류의 인간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아, 안 돼. 실패하면 안 되는 작전이었는데!」
“……!”
세상이 느려진 것 같았다. 슬로우 모션처럼, 사람들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경악과 분노가 보인다.
나를 향해 손을 내뻗는 최 팀장의 움직임과 다급한 외침도.
“진태경 씨!”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내 이름을 외쳤을 때, 나는 이미 20여 미터의 공간을 뛰어넘어 랴오 상장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작전이라. 작전…….’
도무지 실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귀신을 바라보듯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드득! 우득!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나는 공력 한 올 실려 있지 않은 힘으로 놈의 양팔을 부러트리고 무릎뼈를 으스러트렸다.
‘마지막 이성이 남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딱 벌어진 입, 부릅뜬 눈. 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온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
「끄아아아아아악!!!」
나는 눈을 까뒤집은 채 털썩 쓰러져 고통으로 경련하는 놈에게 침을 탁 뱉고 돌아섰다.
혼백이 빠져나간 얼굴로 바라보는 참모에게 한마디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좆 같으면 상부에 보고하세요. 이 시벌 놈들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최 팀장이 상급 포션을 들고 다가왔다.
* * *
의자는 거대했고, 또 기괴했다.
인간과 몬스터의 뼈를 이용해 만든 의자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의자의 주인만큼 기괴하고, 두려움을 자아내지는 못했다.
딱, 따닥.
살점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손가락이 팔걸이를 장식한 두개골을 두드린다.
3미터를 훌쩍 넘어가는 큰 키와 골격. 그 위를 덮은 흑색 로브가 안개처럼 일렁였다.
그 모습은 마치 권좌에 앉은 왕과 같았고,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크 리치(Arch Lich).
그야말로 언데드의 군주이자 죽음을 다스리는 왕이라 부를 만한 존재였다.
그러나 아크 리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한 왕은 따로 있으며, 자신은 왕의 충실한 신하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일렀던가.’
아크 리치는 문득 아쉬움을 느꼈다.
실로 강대한 마력을 보유한 그였지만, 본래 지니고 있던 힘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게다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전황까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크 리치가 입을 열었다.
– 듣고 있느냐. 나의 종아.
어둠 속에 부복하고 있던 존재가 대답했다.
– 예. 군주시여.
– 전선을 물려라. 인간의 군대를 끌어들인다.
– 명을 받드옵니다.
– 가거라. 내 힘이 미치는 모든 군단에 명을 전하라.
자리에서 일어난 검은 기사가 천천히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 붉게 타오르는 그의 안광에 아크 리치가 앉아 있는 의자가 담겼다.
딱. 따닥.
팔걸이에 장식된 두개골은 성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한없이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