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99
#398화
텔레포트를 시도하기 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내 지난 2년을 백분율로 따진다면 얼마나 될까.’
어느 F급 헌터가 길드에서 잘린 날, 터덜터덜 언덕길을 오르다가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구형 캡슐을 발견할 확률.
바로 그 구형 캡슐이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연결 통로일 확률.
남궁세가도, 화산파 적전제자도 아닌 변방 무가의 삼공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확률.
그렇게 한 번의 전쟁, 두 번의 혈사와 셀 수도 없는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지금까지 살아남을 확률…….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본 결과, 단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역시, 10%면 충분해.”
나는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손을 뻗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삼 갑자의 공력이 최 팀장과 샤오 쉔을 끌어당긴다. 데스나이트와 몬스터들이 나서려 했지만, 우두머리가 손을 들자 멈추었다.
나는 놈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가느다란 숨결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기운.
만약 텔레포트가 아니라 제트기를 탔다면, 나는 영영 늦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1%여도 시도했을 거야. 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놈이 아니거든.”
물론 만일을 대비해 들어 놓은 보험도 있었다. 이 보험을 이렇게 빨리,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인벤토리 오픈. 소환.’
몬스터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즉시 인벤토리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는 내 모습을 본 우두머리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 아공간이군. 마법을 익혔나.
아가리 닥쳐.
혀끝에 맴도는 말을 삼켰다. 평소였으면 상당히 힘들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퐁.
마법으로 밀봉된 마개를 벗기자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우윳빛 색깔을 띤 액체가 출렁였다.
최상급 포션.
숨만 붙어 있다면 그 어떤 부상도 치료한다는 기적의 물약.
적어도 현재의 나는 이 100ml 남짓한 소량의 액체가 가진 희소성과 가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저 최상급 포션을 소유했던 우헤이싱의 엄청난 재력과 놈의 멍청함에 감사를 표하며, 죽은 듯 누워 있는 환자의 입술 사이로 포션을 흘려보낼 뿐이다.
‘조금만 참아라, 쉔.’
첫 번째 순서는 최 팀장이다. 함께 지낸 시간도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정이 아니었더라도 그를 먼저 택했을 것이다. 그만큼 최 팀장의 부상은 심각했다.
‘이건…….’
어깻죽지부터 뜯겨 나간 왼팔. 뭔가가 씹어 삼킨 것처럼 너덜거리는 오른쪽 발목과 깔끔하게 절단된 왼쪽 다리. 그 밖에도 갈비뼈가 일곱 대나 나가고, 척추가 부러졌다.
그리고…… 기형적으로 꺾인 오른손에는 아직도 검 자루가 쥐어져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기 위해 단단히 고정한 가죽끈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
나는 묵묵히 가죽끈을 풀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진 그의 오른손에서 검을 빼내어 옆에 놔두었다.
마음속으로 던지는 핀잔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건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요.’
그리고 곧 진짜 기적이 시작되었다.
신중히 유리병을 기울여 정확히 절반을 섭취시켰을 때, 무언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최 팀장의 전신을 뒤덮은 상처들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치익, 치이이익-
뼈는 자라나고, 끊어진 근육은 이어졌으며 장기와 살은 아물었다.
재생(再生)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트롤보다도 빠른 회복 속도.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회복된 최 팀장의 얼굴에 비로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기운도 안정되었고. 이 정도면 충분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니었겠지만.
– 겁 없는 인간이여.
– 당장 멈추어라.
– 그들은 강대하신 우리의 로드께.
– 종속되어야 할 운명을 부여받았다.
나는 우두머리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 두 기의 데스나이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전신 갑주를 걸친 놈들은 언뜻 보면 쌍둥이 같았다. 키도 비슷하고 목소리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확연히 눈에 띄는 차이점은, 허리에 찬 무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메이스(Mace). 다른 한 놈은 검.’
그것으로 이미 답은 나왔다. 문제를 풀었으니 답은 나중에 적어도 된다. 지금은 남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다.
“너도 고생 많았다, 쉔.”
최 팀장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심각한 중상을 입은 샤오 쉔에게 절반쯤 남은 포션을 흘려보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 하찮은 인간이여.
– 마지막 경고다.
– 그 두 인간을 내려놓고, 물러나 자비를 구하라.
– 그럼 로드께서, 널 종으로 거두어 주실 것이다.
“종?”
– 그렇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 중 하나가 나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걸음마다 허리에 고정된 검집이 흔들린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내게 다가오는 놈에게는 어떤 망설임도 엿볼 수 없었다.
어림잡아도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와 우두머리가 지켜보는 앞이다.
데스나이트는 감정이 없는 언데드 몬스터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 너는 실로 크고 빛나는 영혼을 가진 자. 우리의 일원이 되어라.
크고 빛나는 영혼이라…….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포션을 계속해서 흘려보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몇 방울을 샤오 쉔의 입에 털어 넣은 후, 유리병의 마개를 닫아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치익, 치이이익.
회복을 알리는 신호.
기다리고 있던 반가운 소리에 허리를 폈다. 데스나이트를 바라보며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왼쪽 다리.”
– 음?
“최 팀장님 왼쪽 다리. 무릎 아래 한 뼘부터 텅 비어 있더라. 아주 깔끔하게. 샤오 쉔. 저 어린 녀석은 오른팔이었고.”
– 인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인가.
“무슨 말이 하고 싶긴.”
나는 놈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멀쩡하게 붙어 있던 팔다리 잘랐으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했다는 거지.”
그리고 다음 순간.
찰나를 반으로 쪼개고 쪼갠 시간 속에서, 어느새 놈은 내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아니, 그 반대다.
놈이 온 것이 아니라, 내가 갔다.
“어디 그 잘난 솜씨 좀 보자.”
– ……!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났다. 데스나이트는 검을 뽑으려 했고, 나는 왼손을 뻗어 놈의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인 동시에 끝이었다.
스릉, 철컥!
묵빛 검신이 채 뽑히기도 전에 검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내 일권(一拳)이 놈의 가슴을 관통한 후였으니까.
퍼걱!
삼 갑자의 열양지기가 실린 멸염신권(滅炎神拳)은 언데드의 체내에 남아 있던 한 줌의 핏물마저 증발시켰고, 이미 오래전에 죽은 육신을 장작 삼아 타올랐다.
화륵, 콰아아아!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인 데스나이트는 손을 휘적거리며 동족들을 향해 돌아섰다.
거침없이 걸어왔던 그 길을 비틀비틀 걷다가 이내 잿가루가 되어 허물어졌다.
– ……!
– ……!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모여 있음에도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조용하다.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 둔 백염(白炎)을 꺼내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벅, 철벅.
시선이 닿고, 발이 밟는 곳마다 시체와 핏물이 가득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소총이 발에 챘고 비뚤어진 방탄을 눌러쓴 군인은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눈동자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나마 저 군인은 시체라도 보존했다.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짐작되는 곳에는 공안무력부 헌터로 짐작되는 이들이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샤오 쉔이 이끄는 1연대와 함께한 지 어언 일주일. 시신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여럿이었다.
‘많이 죽었구나. 정말로 많이.’
오늘, 이 자리에서만 족히 삼천에 달하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했다.
다섯 개 전선을 모두 합한다면, 이번 몬스터 웨이브로 희생당한 민간인들까지 더한다면 그 희생자는 얼마나 될까.
푹!
이름 모를 헌터의 창을 빌려 지면 깊숙이 박아넣었다. 창대 끝에 단단히 묶어 둔 최 팀장의 가죽끈이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그 너머로 수천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 군단과 ‘놈’이 있었다.
[Lv.135 데스나이트 로드]데스나이트 로드라. 이름 한 번 거창하다. 거창한 이름에 어울릴 만한 힘을 지닌 몬스터이기도 하고.
‘경우는 다르지만, 저런 놈이 하나 더 있긴 하지.’
나는 역대 최장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녀석을 불렀다.
“부탁 하나만 하자.”
못 들은 척할 줄 알았는데, 잠시 망설이던 스켈레톤 워로드가 대답했다.
– ……부탁? 설마 함께 싸워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기대한 적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녀석에게 할 부탁은 싸우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다.
“뒤에 두 사람을 지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재 스켈레톤 워로드는 내 허락하에 틈틈이 사기(死氣)를 흡수함으로써 힘의 성장을 이룬 상태.
애당초 네임드 몬스터인 만큼 어지간한 A급 몬스터 몇 마리쯤은 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가 끝나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지.”
– 그렇다면야 못 할 건 없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야 하는 건가?
“그야 당연히…….”
나는 백염을 들어 데스나이트 로드를 겨누었다.
“저 새끼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지.”
– 이런 미친……!
“늦었다.”
인벤토리에서 스켈레톤 워로드의 해골을 꺼내 등 뒤로 던졌다.
뿌드득, 뚜둑.
녀석이 황급히 신체를 재생시키는 사이, 나는 창대에 묶여 휘날리는 가죽끈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죽음을 향해 돌격하며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 창을 넘어오는 새끼들은, 다 뒈질 줄 알아라.”
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화룡이 고개를 들었다.
* * *
콰드드드득!
살과 뼈가 으스러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오우거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날아가고 트롤은 재생할 틈도 없이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였다.
퍼벙! 서걱!
송곳니를 들이대던 라이칸스로프의 머리통이 터져 나간다.
악취 나는 뇌수를 뒤집어쓰며 달려오는 듀라한은 단 일격에 몸뚱이가 양단되었고, 새로운 주인을 찾은 할버드는 엄청난 힘을 받고 날아가 와이번의 날개를 찢었다.
콰지지직!
– 캬우우우우!
투두두둑!
허공에서 흩뿌려지는 피의 소나기.
동시에 소나기를 뚫고 날아드는 푸른 불꽃의 궤적.
후우우우웅! 서걱!
한바탕 피 보라가 일었다. 불꽃이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수십의 몬스터가 쓰러지고 수백의 몬스터가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수천의 몬스터는…… 어느 순간 압도당하기 시작했다.
고작 단 한 사람의 인간을, 그가 한 자루의 창으로 나눈 사선(死線)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로, 로드.
어느 순간에도 흔들림이 없던 데스나이트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는 이제 떨림과 굴곡이란 것이 생겼다.
수하의 간곡한 부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검은 기사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 길을 터라.
깊이 눌러쓴 투구 사이, 붉은 안광이 일렁였다.
막강한 마력을 흘리며 나아가는 그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이한 단어와 장면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 어떤 것도 창조주이자 영원한 군주보다 우선 될 수는 없기에.
– 듣고 있느냐, 나의 종아.
환청처럼 울려 퍼진 군주의 목소리에, 검은 기사는 나직이 대답했다.
– 예. 군주시여.
그는 마지막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손이, 갑옷 틈새 어딘가를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