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00
#399화
쉬익!
강기(罡氣)에 휩싸인 창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총알을 튕겨 내는 가죽도, 강철보다 단단한 뼈와 살도.
푸푸푹!
과녁이 넓으니 보너스가 붙는다. 라이칸스로프의 가슴을 관통한 창날은 뒤에 바짝 붙어 있던 놈들까지 꼬치처럼 꿰어 버렸다.
– 크륵, 큭.
부릅뜬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의문과 억울함이었다.
놈의 눈빛이 수많은 몬스터 중 왜 하필 자신이냐고, 나는 네가 정한 사선(死線)을 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듯했다.
“아니지.”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창대를 잡아당겼다.
치지직. 라이칸스로프의 발톱이 지면을 긁으며 창 안쪽으로 넘어왔다.
“넘었잖아. 지금.”
– ……!
여기까지다. 빛살 같은 속도로 박혀 있던 창을 뽑아낸 나는, 전면을 향해 횡으로 휘둘렀다.
화륵, 콰아아아!
공기를 태우며 휘몰아친 푸른 불꽃이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살아 있던 몬스터는 비명과 함께 타 죽었고, 이미 언데드로 변해 있던 놈들은 잿더미로 화했다.
띠링. 띠링. 띠링…….
처치를 알리는 시스템 알림이 쉼 없이 울려 퍼진다.
지금의 이 일격으로 몇 마리가 쓰러졌을까. 수십? 아니면 일백?
나는 일일이 헤아리기보다는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몇 마리의 몬스터를 해치우냐가 아니었으니까.
‘섬멸(殲滅).’
인간과 몬스터의 죽고 죽이는 싸움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숙명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한 개의 종(種)뿐이고, 나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저벅.
시멘트 바닥 깊숙이 박힌 창을 넘어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수많은 몬스터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뒤로 물러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도 몬스터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다가서는 거리만큼, 놈들이 물러서고 있었다.
– 이런 미친…….
등 뒤에서 스켈레톤 워로드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한 사람의 인간이 수천의 몬스터 군단을 압도하는 광경이다.
이 정도면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는 아닐지라도 한 문단 정도는 장식할 만한 일이 아닐까.
– 어, 어딜 가는 것이냐!
“두 사람이나 잘 지켜. 어차피 멀리 안 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멀리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야 맞겠다.
이미 손님이 도착했는데 굳이 마중을 나갈 이유는 없으니까.
‘드디어 왔군.’
내 짐작은 정확했다. 썰물처럼 좌우로 갈라지는 몬스터 군단 사이로, 온통 검은 뼈로 이루어진 해골마에 올라탄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에서.
다그닥, 다그닥.
칠흑빛을 띤 풀 플레이트 메일에 깊이 눌러쓴 투구 아래로는 붉은 안광이 또렷하다.
오우거와 같은 대형 몬스터보다는 훨씬 작은 체구였지만,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크고 강대했다.
[Lv.135 데스나이트 로드]135레벨.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느 몬스터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수치다.
천천히 속도를 더해 다가오는 데스나이트 로드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저놈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무림에서 있었던 서천마군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처절한 사투였다.
서천마군이 처음부터 날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천력마가 공력을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레벨업으로 말미암은 기적 같은 회복이 없었다면, 위기의 순간에 적천강이 깨어나 구해 주지 않았다면 서너 번쯤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살아남았고, 보다 더 강해졌다.
그때부터였다.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계속해서 맴돌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지?’
시스템은 무공의 경지와 능력치가 올랐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스탯을 분배하고 전투를 치렀지만, 강기의 존재를 제외하면 글쎄.
나는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겠다.
그건 언제부터인가 늘 쉽고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타닥, 두두두!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나를 향해 쏘아지는 데스나이트 로드를 보며 깨달았다.
놈의 전신에서 폭포처럼 흘러넘치는 강대한 마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쐐애애애액!
어느새 바람이 사라지고 섬광이 빈자리를 채운다. 해골마와 한 몸이 되어 들이닥친 데스나이트 로드의 손아귀에 들려 있던 검이 움직였다.
짙은 어둠이 모여들고 내리꽂히는 그 광경이, 너무도 느리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한 가지 확신이 떠올랐다.
‘이 전장의 누구보다 강하다.’
느려진 세상 속, 나는 백염(白炎)을 뻗었다.
창날을 타고 솟구친 청백색의 불꽃이 어둠을 살라 먹었다.
* * *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
반경 수백 미터의 지면이 움푹 주저앉고 수십 년간 견고히 버텨온 병원이 붕괴했다.
압축된 공기가 소닉붐(Sonic Boom)처럼 겹겹이 터져 나가며 주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후려치고 날려 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있었다.
쉭, 쉬쉬쉬쉬쉭! 꽈앙!
찰나의 순간에도 몇 번, 혹은 수십 번.
청백색의 불꽃과 칠흑 같은 어둠이 부딪치고 섞여들 때마다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참혹한 파괴가 잇따랐다.
두 존재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인간과 몬스터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한 차원 위에 존재했고, 자신들만의 세상과 시간 속에서 격돌했다.
쉭!
진태경의 손에 들린 은백색의 창이 허공을 내리그었다.
공간을 찢으며 쏟아져 내리는 청백색의 화염. 그러나 검은 기사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앙!
넘실거리는 마력이 화염과 부딪친 순간 덮쳐 오는 엄청난 압력에, 검은 기사가 타고 있던 해골마가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종마이자 A급 몬스터인 나이트메어(Nightmare)의 소멸은 곧 다가올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어떤 준비 자세도 없는, 그야말로 섬광과도 같은 투창(投槍).
검은 기사는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신형을 틀었다. 엄청난 열기가 그의 앞가슴을 스쳐 몬스터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콰드드드득! 꽈앙!
수십여 마리의 몬스터를 관통한 창날이 지면에 내리꽂히자 굉음과 함께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었다.
그 여파에 휘말린 몬스터들이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진태경의 신형은 검은 기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스윽.
소리도, 기척도 없는 한 걸음.
검은 기사가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수십 미터의 거리를 지우며 목표에 도달한 진태경의 일권(一拳)이 그의 가슴을 향해 쏘아진 직후였다.
“꺼져라.”
– ……!
쾅!
멸염신권(滅炎神拳). 용암보다 더한 열기가 갑옷을 후려쳤다.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간 검은 기사가 허공에서 신형을 뒤집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동시에 그의 손이 검자루를 잡고 힘차게 흩뿌려졌다.
쐐애애액! 쉬쉬쉭!
검은 마력이 수십 개의 벼락이 되어 진태경을 향해 쏘아졌다. 하나하나가 경천동지할 위력을 지닌 공격.
그러나 진태경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콰과과광!
희뿌연 먼지구름을 터트리며 쇄도한 진태경이 두 손을 뻗었다.
어느새 방향을 바꾸어 그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그어지던 검신을 합장하듯 붙잡았다.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
푸른 화염에 휩싸인 두 손과 막대한 마력이 서린 검신이 두 존재의 사이에서 파르르 떨렸다.
막아서는 자와 나아가는 자.
쉴 틈 없던 공방을 잠시 멈추게 한 치열한 대립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으로 깨어졌다.
– 너, 인간이여!
외침과 함께 나타난 데스나이트가 진태경의 등을 향해 메이스를 내리친 그 순간이었다.
퍼벙!
데스나이트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칼날처럼 허공을 내리그은 진태경의 발뒤꿈치에 투구째로 머리가 터져 나갔으니까.
털썩.
그러나 허무한 소멸이었을지언정,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검은 기사의 붉은 안광이 번쩍 빛남과 동시에 손아귀에 들린 검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마력을 뿜어냈다.
아주 미세한 틈.
진태경이 데스나이트를 처치하기 위해 공력을 분산시켰던 찰나의 순간은 균형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콰득! 촤아아아악!
핏물이 솟구쳤다.
한없이 붉은 그것은 인간의 것이었고, 검은 기사의 검이 진태경의 가슴을 베었다는 흔적이었다.
검은 기사의 머릿속에 한 가지 확신이 스쳤다.
‘끝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염에 휩싸인 진태경의 주먹이 검은 기사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 * *
콰드드득!
– ……!
데스나이트 로드의 몸뚱어리가 들썩였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언데드 몬스터답게 아무런 비명도 없었지만, 나는 놈의 투구 사이로 보이는 안광에 담긴 의문을 읽었다.
‘어떻게?’
그래, 딱 그런 눈빛이다.
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만 갑옷 있는 줄 알았냐?”
펑!
이번에는 화염신장(火焰神掌)이다.
계속된 타격으로 금이 가 있던 데스나이트 로드의 갑옷이 조각나며 깨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팠다. 이 개새끼야.”
우두둑!
건틀릿을 낀 놈의 팔목을 꺾고 그대로 부러트렸다.
이런 공격들이 언데드 몬스터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을 놓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철그럭.
쇳소리와 함께 검을 놓친 데스나이트 로드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쾅! 콰득! 퍼벙!
놈의 발등을 밟고 쉴 새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어깨, 팔, 옆구리, 가슴.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격을 허용한 데스나이트 로드가 반격을 시도해 왔지만 상관없었다.
퍽!
– ……?
“놀랄 거 없다. 내 갑옷도 꽤 쓸 만하거든.”
내게는 화룡갑(火龍鉀)이 있으니까.
‘이걸 여기에서 쓰네.’
화룡갑은 서천마군을 처치하고 얻은 신병이기다.
무림에서의 전투 당시 워낙 심하게 망가진 탓에 아직까지도 자체 복구가 진행 중이지만, 50% 정도의 복구율로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완전히 막아 내진 못하는 바람에 죽을 뻔하긴 했지만.’
검에 베였을 때는 나 역시도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나 이 정도 고통쯤은 이미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게다가 이미 나보다 앞서 죽어 갔던 이들이 겪은 고통에 비할 바도 아니었다.
“이건…… 오늘 네가 죽였던 그 사람들 몫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팔성의 멸염신권에 어떤 상황에서도 견고하던 투구가 박살 나며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승패의 저울추는 기울었다. 단 한 방. 마지막 일격이면 놈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건…….”
그 순간, 높게 들어 올렸던 주먹이 우뚝 멈췄다.
나는 핏물로 엉겨 붙어 있던 눈꺼풀을 깜빡였다. 아주 잠깐, 내 시선에 닿은 누군가의 얼굴에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 이미 죽어 있는 새하얀 피부와 붉은 안광을 지닌 그는, 홀로그램 영상 속에서 보던 어느 영웅과 꼭 닮아 있었다.
“……레이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