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01
#400화
처음 진태경과 격돌했던 그 순간, 검은 기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강하다.’
눈앞의 젊은 인간은 실로 엄청난 강자였다. 자신이 전력을 다한다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닌 자.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그런 생각은 더더욱 굳어졌다.
‘힘든 싸움이 되겠군.’
그러나 검은 기사는 겁먹지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군주의 가장 충실한 종이며, 명령을 완수해야 할 사명을 가진 자였다.
이건 한계를 초월한 강자들의 싸움이다. 아주 약간의 차이로도 승패를 뒤집을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온다.’
검은 기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훈련을 받던 어린 시절부터 늘 되새기던 말이었고,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으며 강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내가?’
또다시 찾아온 혼란. 마음이 흐트러지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상대는 그 틈을 놓칠 만큼 약하고 허술한 자가 아니었다.
쉭, 서걱!
창날이 죽은 육신을 가르고.
퍼벙!
푸른 화염이 가슴을 후려쳤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 열기 속에서, 검은 기사는 문득 어떤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의 이름은 고통이었다.
‘이게 무슨…….’
검은 기사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고통이 느껴져서가 아니라, 분명 낯설어야 할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이 기억들은…… 도대체 뭐지?’
가슴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허용하며 비틀거리는 검은 기사의 눈앞에,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기억들이 빠르게 스쳤다.
‘이, 이럴 수가!’
‘마나 적응도가 엄청납니다. 역대 최고 수치예요!’
‘지금 즉시 중화 육성 훈련에 투입해야 합니다!’
흥분된 어조로 떠드는 새하얀 옷을 입은 인간들. 그리고 어둡고 각진 제복을 걸친 중년인.
‘중화 육성 훈련? 저 아이를 헌터로 키우겠다는 말이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작 열세 살에 파이 첸과 비등한 마나 적응도를 지닌 아이입니다. S급 헌터, 그것도 본국 최고의 헌터가 될 자질이 충분합니다!’
‘거절하겠소.’
‘예, 예?’
‘아니, 중장 동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아이는…….’
‘그만.’
중년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뿐인 외조카요. 내가 누이에게 약속했던 건 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지, 헌터로 만들어 위험에 빠트리겠다는 것이 아니었소.’
‘헌터는 숭고한 직업입니다. 저 아이가 S급 헌터가 된다면 인민 전체의 흥복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숭고한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소. 하지만 그렇게 내 매형도…….’
멈칫, 말을 멈춘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뭐라 해도 내 뜻은 바뀌지 않소. 상부의 지침이 없었다면 검사도 받지 않았을 터. 우리는 이만 가 볼 테니 알아서들 하시오.’
‘중장 동지, 중장 동지!’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다가온 중년인이 억지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오래 기다렸지? 자, 이만 가자꾸나.’
검은 기사는, 아니 기억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그는 중년인의 손을 붙잡았다.
하얗고 자그마한 손.
이내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삼촌.’
‘응?’
‘저, 헌터가 되고 싶어요.’
순간 중년인의 얼굴 위로 만감이 교차한다.
입술을 깨물며 바라보기를 한참, 이내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는 그의 뒤로 한껏 표정이 밝아진 인간들이 다가왔다.
‘중화 육성 훈련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안전도 철저하고, 효과도 확실합니다. 같은 나이인 우헤이싱도 잘 해내고 있고요.’
‘아이의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중단시키겠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간이 중년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부디 우리를 믿고 맡겨 주시오. 웨이펑후 중장 동지.’
웨이펑후, 웨이펑후…….
검은 기사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이름. 너무나도 낯익고 그리운 그의 이름.
퍼벙!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은 공격을 허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일까.
비틀거리는 검은 기사의 눈앞에 또 다른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른들이 칭찬해 주니까 네가 최고인 것 같냐?’
나비넥타이에 까만 정장.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은 소년이 뾰족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본다.
‘착각하지마. 최고는 나야. 넌 그다음이라고!’
검은 기사의 시야가 갸우뚱 기울어지더니, 이내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뭐?’
‘난 이 등도 좋아. 삼 등도 괜찮고, 꼴등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날카로운 인상의 소년이 입을 떡 벌렸다.
‘너, 바보냐? 지금 훈련소 꼴등인 장 웨이보다 형편없는 놈이 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장 웨이는 착하고 다른 사람도 잘 도와주는걸? 그 녀석은 훌륭한 헌터가 될 거야.’
‘이, 이익!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어어? 아닌데. 난 그냥 네가 좋다면 뭐든…… 앗!’
쿠당탕!
갑자기 덤벼든 소년을 제압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밑에 깔린 소년이 발버둥 치며 외친다.
‘내가 최고야! 이 우헤이싱은 뭐든 최고라고!’
하나의 기억이 사라지면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누군가 잔잔한 연못에 차례차례 돌을 던지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기억은 계속해서 검은 기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수석 교육생, ■■■■은 앞으로.’
커다란 공간을 메운 소수의 사람.
어째서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 호명에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저벅. 저벅.
절도 있게 나아가는 걸음은 보폭이 넓었고, 보이는 시야는 높았다.
어느새 훌쩍 성장하여 청년이 된 그에게, 제복을 걸친 장년인이 다가와 훈장을 걸어 주었다.
낯익은 얼굴. 첫 기억에서 마주친 적 있던 그가 작게 속삭였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랬고, 이후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존재를 모를 것이다. 어쩌면 평생을 그림자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헌터의 다른 이름은 수호자라 배웠습니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제 명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껏 해 주지 못한 말이 있다.’
어깨를 붙잡은 장년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훌륭히 자라 주어 고맙다.’
‘감사합니다. 외삼촌. 아니…… 아버지.’
환한 미소와 함께 장년인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주름진 볼 위를 미끄러진 눈물 한 방울이 단상 위로 툭 떨어진 그 순간,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계십니까?’
따스한 어느 봄날에 찾은 그곳은 자그마한 꽃집이었다. 화사한 꽃들을 둘러보며 안을 기웃거리는 그에게, 그녀가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통통 튀는 걸음걸이와 고양이처럼 새치름한 눈매.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고 밝은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앳된 청년 시절을 지나서 보다 원숙해진 검은 기사는, 아니 한 사내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손님?’
‘아니, 저, 그게. 꼬, 꽃을 사러 왔는데 말입니다.’
‘부모님 드리시려고요? 아니면 애인?’
‘부, 부모님입니다. 그, 엄밀히 말하면 부모님은 아니고 절 키워 주신 외삼촌이신데…….’
‘으흠. 그러시구나. 그런데 말투가 되게 딱딱하네요. 혹시 군인이세요?’
‘비, 비슷하지 말입니다.’
이상한 기억이었다. 말이 뚝뚝 끊기고 눈앞이 자꾸만 하얗게 물드는.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화사한 꽃 한 다발을 품에 안은 채 멍하니 병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녀석. 가벼운 폐렴이니까 굳이 올 필요 없다 하지 않았…… 그런데 그건 뭐냐?’
장년인, 웨이펑후의 물음에 그가 넋 나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꽃이요.’
‘혹시 그게 병문안 선물이냐?’
‘네.’
‘그러니까 지금. 내 병문안 선물로 국화를 사 왔다고?’
‘네에…… 어?’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봤나! 야, 이놈아!’
촥! 촤악!
사내는 꽃다발에 얻어맞으면서도 웃었다. 자신의 멍청함에 실소가 흘러나왔고, 국화를 닮은 그녀가 생각나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빠르게 흘러가는 기억 속에서, 그는 매일같이 꽃집에 들렀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 어머, 또 오셨네요?’
‘하하.’
‘국화 맞죠? 새하얀 거.’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번의 계절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꽃집 주인과 손님이 아니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나랑 결혼해 줄래?’
‘……아.’
‘행복하게 해 줄게.’
그건 지금까지의 기억 중 가장 길었다.
일 초가 십 년, 백 년처럼 느껴질 만큼 오랜 침묵이 끝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할 말 있어.’
‘아니, 그 전에 내 대답부터…….’
‘나, 임신했어.’
‘어?’
쿵, 쿵쿵. 쿵쿵쿵!
사내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쳤고, 검은 기사는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아아, 아아아!’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고 누군가의 손이 몸 안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고통과 함께 또 다른 기억이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응애, 응애애!’
‘이, 이 아이가…….’
‘아빠가 된 걸 축하해. 여보.’
새로운 생명의 탄생. 그리고 성장.
‘압바. 압바바!’
‘여보. 여보! 방금 들었어? 벌써 아빠를 부르다니, 우리 애 천재 아닐까?’
‘기저귀나 좀 갈아 줄래?’
‘잠깐만 기다려봐. 다시 한번 들어보고.’
‘압바, 어무아!’
‘으하하! 그래! 우리가 네 아빠고 엄마다!’
포대에 싸여 꼬물거리던 아기가 뒤집기를 성공하던 날. 처음으로 네발로 기어가고, 걸어가던 그 날…….
사내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계속되던 꿈같은 나날이 악몽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오핑구에서 마력 수치가 급등했습니다!’
‘가오핑구? 계속해서 연락 취하고, 만일을 대비해 2연대 소집해 출동시킨다.’
‘부, 부장님. 통신이 끊겼습니다.’
‘뭐?’
예고 없이 벌어진 재앙.
황급히 휘하의 병력을 소집한 사내는 문제의 근원지로 향했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캬우우우우!’
‘모, 모두 도망…… 컥!’
퍼걱! 콰아아아앙!
평화롭던 도시의 하늘에는 불길이 솟구쳤고, 지상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가 인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비명과 죽음이 흘러넘치는 땅. 믿기 힘든 대학살의 현장 앞에서 사내는 검을 뽑았다.
‘공안무력부(公安武力部)!’
츠츠츠!
검신을 휘감으며 솟구친 오러 블레이드가 찬란하게 빛났다.
사내의 외침에 일천여 명의 헌터들이 먹먹한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들은 인류의 방패이자 수호자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었다.
‘모조리 쓸어 버려라!’
‘와아아아!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갑옷에 붉은 오성홍기를 새긴 그들은 파도처럼 나아갔고, 이내 하얀 포말 대신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겁화의 불꽃으로 멸망하라, 파이어 레인(Fire Rain).’
키이이잉.
아가리를 벌린 잿빛 하늘. 쏟아지는 화염의 비 아래에서, 사내는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살이 된 딸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존재’와 마주했다.
‘도망쳤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널 죽이겠다.’
‘고결하구나. 이름이 무엇인가, 인간.’
‘나는…….’
* * *
“……레이페이?”
귓가를 파고든 진태경의 목소리에, 검은 기사의 몸이 덜컥 굳었다.
막혔던 둑이 허물어지며 모든 것이 재조립되기 시작한다.
인간으로 살아온 36년간의 기억이 해일처럼 쏟아져 눈 앞을 가렸다.
– 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혼란과 고통으로 몸을 떠는 검은 기사의 머릿속에, 천둥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 너는 내 가장 충실한 종이자 군단의 총사령관. 군주가 명하노니, 잿가루가 되어 스러질 때까지 네 본분을 다하라!
– ……!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언령(言靈).
바람 앞의 촛불처럼 휘청이던 붉은 안광이 거세게 타올랐다.
일격을 남겨 둔 채 쓰러져 있던 검은 기사, 아니 레이페이의 전신에서 엄청난 마력이 솟구쳤다.
콰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