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1
#40화
나는 하늘을 날고 있다. 거대한 날개를 펴고 바람을 갈랐다.
저 아래 보이는 높고 가파른 협곡. 호리병 형상을 띤 그곳에 인간들이 있었다. 그 수가 어림잡아 수백.
중심에 선 남자가 목청껏 외쳤다.
“태원진가를 위해 싸우지 마라!”
그때 땅이 진동했다. 나무가 흔들리고 산새가 날아오른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먼지구름이 협곡을 휩쓸며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를 위해 싸워라! 적들에게 짓밟힐 혈육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싸워라!”
검을 뽑아 든 그가 포효한다.
“무인답게 맞서라! 나도 그러할 것이다!”
수백 개의 병장기가 나란히 뽑혔다. 성큼성큼 걸어 나간 남자가 선두에 섰다. 협곡을 가로지르던 먼지구름이 흩어지고 무수한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 와아아!
– 태원진가 놈들을 쓸어 버려라!
문득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발견한 그가 씩 웃었다.
“느낌이 좋군.”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날개에 힘이 스르륵 빠졌다. 나는 의식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 * *
“어푸, 어푸어푸!”
필사적으로 날개를, 아니 팔을 퍼덕거리다가 깨달았다.
‘꿈이었구나.’
천만다행이다. 죽는 줄 알았네. 한숨 돌린 후에야 방 안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 뉴스 속보입니다. 합정역 3번 출구에서 새로운 게이트가 출몰했습니다. 마력 측정 결과 C급 게이트로 판명 났으며…….
책상 위, 아나운서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소형 TV. 그리고.
“방금 뭐냐?”
진호 형이 있었다. 한 손에는 냄비 뚜껑.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든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행위 예술 같은 건가.”
“닥쳐. 꿈꿨어.”
“헤엄치는 꿈?”
“떨어지는 꿈.”
“좋겠네. 키 크겠다.”
영혼 없는 말을 던지고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순간 여기가 내 방이 맞나, 헷갈릴 정도로.
“여기 내 방 맞지?”
“그럴걸.”
“근데 형이 왜 여기 있어?”
“하루 이틀이야?”
그럴듯한데? 순간 설득당할 뻔했다.
“TV나 좀 끄든가. 사람 자는데.”
“어떤 몰상식한 새끼는 목젖도 때리더라. 사람 자는데.”
“…….”
하여간 저 인간, 말빨 하나는 끝내준다.
“할 말 없으면 라면이나 먹어. 너 깰 것 같아서 다섯 개 끓였어.”
선견지명 보소. 젓가락을 받아 든 나는 감회에 젖었다.
이게 보통 라면인가. 한 달 만에 먹는 라면이다. 식욕을 당기는 냄새, 딱 알맞게 익은 면발과 따로 썰어 넣은 청양고추로 매콤하게 끓여진 국물.
‘미쳤다, 미쳤어.’
후루루룩.
정신이 들었을 때는 모든 게 끝난 후였다. 냄비 바닥까지 싹싹 핥아 먹고 있는 나를 진호 형이 멍하니 바라봤다.
“광고 찍는 줄 알았네. 태어나서 라면 처음 먹어 보냐?”
“돌아와서 처음 먹는 라면이니까.”
“또 그 소리냐?”
“한 달 동안 중국 음식만 먹다가 라면 먹어 봐. 미슐랭이 따로 없다.”
“그만해. 이제 재미없으니까.”
질렸다는 표정.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거나 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뭔데 이게.”
“뭐긴. 제품 사용 설명서지.”
“……이거 설마.”
“어, 저 캡슐에 들어 있더라고. 읽어 봐.”
“20년도 더 지난 고물을 버리면서 이런 걸 넣어 둔다고?”
진호 형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설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이거 인쇄가 잘못됐네. 제조일이 2020년 1월 1일이야.”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거, 인쇄 오류 아닐지도 몰라.”
“응?”
“아니, 이건 아직 짐작이니까 넘어가자. 다른 부분은 어때? 거기 적혀 있는 모델명이나 제조사, 형은 들어 봤어?”
전자 기기, 그중에서도 캡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다.
관련 사이트에서도 이름만 대면 아는 네임드 유저에 IT 전문 블로그도 운영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즉각 튀어나온 대답은 기대를 와르르 무너트렸다.
“아니.”
하긴, 인터넷 검색으로도 나오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약간의 실망감은 어쩔 수 없다.
“전혀 몰라? 형 이쪽 계통은 완전 빠삭하잖아.”
“그렇지. 근데 이건 모르겠다.”
진호 형이 머리를 긁적였다.
“불법 개조 캡슐? 아니면 커스텀인가? 솔직히 저런 디자인은 처음 보네.”
들을수록 암담하다.
“그래, 디자인은 뭐 그렇다 쳐. 근데, 내가 최초 모델부터 최신형까지 다 꿰고 있는 사람이거든? 국내에 한 번이라도 풀린 물건은 싹 다.”
“그런데?”
“여기 적힌 모델명. 제조사. 완전히 쌩 초면이야.”
“해외 쪽 제조사일 수도 있지 않나?”
“어이고. 이 화상아, 등신아, 머저리 같은 놈아.”
진호 형이 속 터진다는 얼굴로 설명서를 내밀었다.
“첫 줄 읽어 봐라.”
“제품 사용 설명서?”
“그래. 한글이라고, 한글!”
“아.”
“H 소프트가 국내 제조 업체건, 해외 제조 업체건 사용 설명서까지 한글로 만들 정도면 모를 수가 없지. 그 바닥에 캡슐 제조사가 수백, 수천 개도 아닌데.”
완전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내가 캡슐 관해서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그때 진호 형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 봐.”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리는 걸 보니 검색 중인 모양이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다.
“시발, 야동 사이트밖에 안 뜨네.”
어, 거기 괜찮더라.
“유령 회사도 아니고. 왜 아무것도 안 떠?”
“일단 뒷장도 읽어 봐.”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정말 유령에 홀린 기분이 될걸. 진호 형은 심각한 얼굴로 설명서를 넘겼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번.
“기가 막히지?”
“그러네. 기가 막히네.”
허탈한 음성이었다.
“백지를 보라고 하니까 기가 막히네.”
“어?”
“어쩐지 뭔 설명서가 이렇게 허술하나 했다. 캡슐 부품 설명도 없고, 실행 방법도 없고, 그나마 있는 모델명, 제조사, 제조일도 개판이고.”
“아니, 백지? 그게 무슨 소리야!”
“얼씨구. 문과충 자식 천연덕스러운 거 보소.”
황급히 설명서를 뺏어 읽었다. 잠들기 전 봤던 그 내용이 그대로 있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주의 사항. 마지막 페이지에는 주요 기능.
“이게 안 보여?”
“그만해라. 무서워지려고 한다.”
저 표정. 말투. 진심이다. 내게 보이는 이 글씨가, 진호 형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 내용은 나한테만 보인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굳어 있었다.
* * *
푸쉭-
후들거리는 다리로 캡슐을 빠져나왔다. 반질거리는 외관, 흡사 거대한 달걀처럼 보이는 이 물건은 지난달에 출시된 최신형 캡슐이다.
“어, 금방 나오셨네. 제가 추천해 드린 게임 해 보셨어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캡슐방 사장의 물음에 나는 반쯤 혼이 나간 채로 대답했다.
“네.”
사장이 권유한 가상현실 게임은 동시 접속자만 천만 명에 달한다는 메가 히트작. 엄청난 그래픽과 뛰어난 자유도로 시장 점유율 70%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픽 미쳤죠?”
게임에 접속. 그래픽을 보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나?
‘이게 가장 잘나가는 가상현실 게임이라고?’
그래픽 좋은 건 알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NPC들의 외모와 움직임, 대화 패턴과 내 캐릭터로 느껴지는 오감(五感). 모두 부자연스럽다. ‘게임’이지만 결코 ‘현실’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혹시 무협 배경 게임도 있나요?”
“아하, 무협 쪽 취향이시구나? 꽤 있긴 하죠. 찾으시는 게임 제목이 뭔데요?”
“무림이요.”
“무림 온라인?”
“아뇨. 오픈 월드 식 게임이에요. 혼자 플레이하는.”
“무협 게임 중에 그런 게 있어요?”
그럼 그렇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 비틀비틀 문을 나서는 내게 사장이 인사했다.
“또 오세요!”
안 올 거다. 두 번 다시.
* * *
희망 고시원.
낡고 녹슨 간판 아래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신호음이 가기 무섭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딸깍.
– 어, 왜.
하나뿐인 웬수, 아니 여동생인 하연이다. 특유의 싸가지 없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이 꽉 막혔다.
– 여보세요?
“……어.”
– 왜 전화했어?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순간,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 끊는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 3초 준다. 용건.
망할 년…….
그래, 이래야 진하연이지. 덕분에 잠시나마 촉촉해졌던 눈물샘이 피라미드 인근 모래처럼 건조해졌다.
“엄마는 뭐 하셔?”
– 잠깐 볼일 있다고 외출. 궁금하면 전화해 봐.
일부러 하지 않았다. 이 녀석 목소리에도 울컥하는데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너는?”
– 수능 120일 남은 고삼이 뭐 하겠어. 공부하지.
평소보다 까칠한 말투. 수험생 스트레스가 상당한 모양이다.
“공부는 잘되고?”
– 이번에 7월 모의고사 망쳤어. 컨디션 조절 실패해서 쉬운 문제도 다 틀리고. 아, 생각할수록 짜증 나.
“괜찮아. 실전에서만 잘하면 되지. 몇 개나 틀렸는데?”
– 두 개.
“그 정도면 1등급이잖아. 다른 과목은?”
– 전 과목 두 개.
“응?”
– 한국사에서 하나. 수학에서 하나.
“……전 과목 통틀어서 두 개? 진심이냐?”
– 당연히 그거 말한 거지.
똑똑한 년…….
공부 잘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과거 내 학창 시절 성적을 생각해 보면 유전자 몰빵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모양이다.
“공부 좀 한다?”
– 오빠 입장에서 보면 엄청 잘하는 거 아냐?
“무, 무슨 헛소리를! 나도 공부 꽤 했거든? 네가 초등학생 때라 기억을 못 하는 거…….”
– 지난주에 대청소하다가 오빠 성적표 나왔어. 7등급이 하도 많아서 무슨 잭팟 터진 슬롯머신인 줄.
“용돈 필요하지? 요즘 화장품은 얼마나 하냐?”
– 애잔하다. 진짜.
잔인한 년…….
통화는 1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공부, 학교, 관심 있는 남학생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하연이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한결 밝아져 있었다.
문득 묘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정말 돌아왔구나.’
나는 꿈을 꿨던 걸까, 아니면 망상에 빠져 있던 걸까.
현실에서는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현실에서 살아야 하니까.
이곳에 가족이 있고 내가 있다. 그럼 그걸로 된 거다. 나는 아주 잠깐 이상한 꿈을 꾼 거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혀질, 그런 꿈.
– 그래서 내가…….
“응.”
조잘거리는 여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고 녹슨 간판 아래를 벗어나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지잉. 지이잉.
성진호는 부스스 눈을 떴다. 머리맡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울리고 있었다. 새벽 여섯 시.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신호였다.
“어이고, 죽겠다.”
집을 나온 지 5년째. 아침마다 코끝을 파고드는 곰팡내가 퍽 익숙해졌다. 성진호는 반쯤 감긴 눈으로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방을 나섰다.
‘잠 깨는 데는 담배가 최고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옥상으로 올라간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쿵.
“응?”
무슨 소리지? 의문과 함께 난간으로 고개를 내밀자 바로 앞 분리수거장에 놓인 쇳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덩치 좋은 청년도.
“야! 진태경!”
성진호의 외침에 진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거 버리게?”
쇳덩어리의 정체는 전날 주워 온 고물 캡슐이었다. 저걸로 되지 않는 장난이나 치더니 도로 갖다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진지하긴 했는데…… 뭐, 헛소리지.’
성진호가 피식 웃었다.
“왜 버려. 무림 다시 안 가?”
“그걸 믿었어?”
진태경이 마주 웃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온 성진호가 보기에는 어쩐지 어색한 웃음이었다.
‘뭐지?’
묘한 느낌이다. 찝찝해하는 성진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진태경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 인마! 이따 같이 아침 안 먹어?”
“일해야 돼!”
진태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성진호는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새끼, 열심히 사네…….”
이윽고 진태경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분에 담배를 비벼 끄고 떠나려던 성진호의 눈에 고물 캡슐이 눈에 띈 것도 그때였다.
‘제조사가 H 소프트라고 했나?’
허접한 장난이겠지만, 알아봐서 나쁠 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