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10
#409화
선약 없는 방문자가 찾아온 것은 날이 채 밝아 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텐트 안으로 들어선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나 계셨군요.”
“보시다시피.”
나는 최 팀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요즘 들어서 통 잠이 안 와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잠이 줄었다고 해야 맞겠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체력과 삼 갑자에 달하는 고강한 공력이 있다면 어지간한 피로는 운기조식으로 날려 버릴 수 있으니까.
“마나 연공법, 아니 진가심법을 수련 중이셨습니까?”
“예, 뭐. 그렇죠.”
정확히는 열화문의 비전 심법인 열화신공(烈火神功)이지만, 모든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나중에 올 걸 그랬군요.”
“아뇨. 괜찮아요.”
“심법 수련 도중에는 어떤 방해도 금물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중간에 끊었다가는 주화입마가 올지도 모른다고…….”
“아, 그건 최 팀장님이고 전 괜찮아요. 수준이 달라서.”
“…….”
당신의 팩트 폭행.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순간 최 팀장의 얼굴 위로 그런 공익 광고 멘트가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이라 할 말이 없군요.”
“그래도 최 팀장님 정도면 습득력이 엄청난 겁니다. 이건 진심이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지세요.”
이건 진심이다. 인류 역사상 불굴의 업적을 세운 영웅, 천태민의 핏줄답게 최 팀장은 타고난 무재(武才)가 매우 뛰어났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체 내부에 축적되어 있던 기운도 상당해서, 무공의 진척 속도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준비된 인재라는 거다.
‘우헤이싱처럼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혔다면…… 아마 지금쯤 S급 헌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겠지.’
살짝 표정이 풀어진 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태경 씨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지금 장난하세요? 당연히 제가 더 빨리 익혔죠.”
“…….”
어디에 비비려고.
최 팀장이 아무리 이정룡의 감시와 견제 하에 자랐다고 해도 나와 비교하면 살아온 인생의 결부터가 다르다.
시스템을 얻은 후에도 죽을 뻔한 적이 몇 번인데, 팍 씨. 아주 그냥.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것도 이렇게 이른 시각에.”
“고민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고민이요?”
“예.”
“왜요. 혹시 존슨이 고백했어요?”
“신경 안 씁니다. 미스터 존슨 나름대로의 친밀감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보다는 길드 업무 관련 내용입니다.”
“길드 업무라면…… 한국에서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왔어요?”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최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길드원 중 하나가 위험에 빠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네요.”
“아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최 팀장의 말뜻을 알아들은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사람 누군지 알겠네. 키 크고 잘생긴 사람 아니에요? 성격도 끝장나게 좋고.”
“다른 건 모르겠는데, 성격이 끝장나는 것 같긴 합니다. 여러 의미로요.”
“흠, 그럼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진태경 씨.”
지금까지 농담처럼 대화를 주고받던 최 팀장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아시잖습니까.”
“글쎄요.”
“이 작전은 위험합니다.”
“최 팀장님. 저 못 믿으세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진태경 씨는 제가 세상 누구보다 믿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최 팀장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과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려 하고 있고요.”
생각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정룡과 우헤이싱. 나와는 악연으로 연결된 이들이자, 곧 서로에게 등을 맡겨야 할 전우가 되겠지.
나는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표현도 없겠네요.”
“진태경 씨…….”
“저기, 최 팀장님?”
뭔가 말하려던 최 팀장이 입을 다문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문밖을 가리켰다.
“아시다시피 아직 수련이 덜 끝나서요.”
“……!”
“오늘이 지나기 전에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머리를 비우고 곧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세요.”
말을 잇지 못하던 최 팀장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 뵙죠.”
“그래요. 멀리 안 나갑니다.”
텐트를 빠져나간 최 팀장의 인기척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소원권을 환불당한 뒤부터 침울해져 있던 스켈레톤 워로드가 희망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 매우 똑똑한 인간이로군. 아직 늦지 않았으니 저 인간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게 어떤가?
“애쓴다.”
– 아니, 갈 거면 네놈 혼자 가지. 왜 본 사령관을 데려가느냐는 말이다!
“혼자 죽으면 외롭잖아.”
– 뭣이이이-!
“농담이야. 다만 이게 최선이라 그런 거지.”
–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군단을 뚫고, 아크 리치와 대적하는 게 최선이라고? 혹시 간악한 인간이 아니라 미친 인간인가?
이 언데드 새끼 말하는 본새 보게.
벌을 내려 줄까 고민하던 나는 가부좌를 풀고 침상에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위험한 작전인 건 맞지만, 가능성도 충분하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 막상 가 봤는데 안 되면?
“죽을힘을 다해서 싸워야지. 그럼 가능성이 생겨.”
스켈레톤 워로드가 해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기적의 논리로군. 본 사령관이 이런 미친 인간과 함께하고 있다니.
“그러면서도 안 떠나잖아.”
– 안 떠나? 못 떠나는 거겠지!
“웃기는 놈일세. 제 발로 돌아올 때는 언제고. 아, 취소. 발이 아니라 두개골이었지.”
– 주위에 본 사령관을 노리는 흉악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억울함이 느껴지는 스켈레톤 워로드의 항변에, 나는 작게 실소를 흘렸다.
‘약한 소리 하기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껴 두기로 했다. 그건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부분이니까.
– 웃어? 방금 웃었지!
“내가 언제?”
시치미를 뚝 떼고 화제를 돌렸다.
“어쨌건 간에 아크 리치를 쓰러트리는 게 관건이야. 머리를 잃으면 몸뚱어리는 움직이지 못하니까.”
– 듀라한은 안 그러던데.
“…….”
그건 그러네.
순간 납득하고도 어이가 없어진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켈레톤 워로드를 꺼내 들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 지, 진정해라 인간. 난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듀라한은 머리가 없어도 움직이지. 스켈레톤 워로드는 어떻게 되나 보자.”
빡!
번개처럼 후려친 딱밤에 스켈레톤 워로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 악, 금! 미간에 금 갔다! 진짜 금 갔다고!
“힘 조절해서 쳤는데 무슨 개소리…… 어, 진짜네.”
좀 더 살살 칠 걸 그랬나. 반지르르한 검은 광택이 흐르는 두개골에 미세한 금이 가 있다.
충격으로 인해 들어 올려진 뼛조각을 슬쩍 만지자 스켈레톤 워로드가 비명을 질렀다.
– 내 뼈! 뼈!
“알았겠으니까 소리 그만 질러, 인마.”
–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뼈가 간질거리고 예민해서 걱정인데, 이 미친 인간이 기어코…… 흐흑.
“…….”
건성 피부야, 뭐야.
이 정도면 조만간 아이튜브에 채널 하나 파서 언데드 뷰티 전문 스트리머로 구독자 100만 끌어모을 기세다.
‘이 새끼 몬스터 아닐지도 몰라…….’
하여간 보면 볼수록 별종이 따로 없다.
황당한 눈빛으로 스켈레톤 워로드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텐트의 한쪽 면을 열어젖혔다.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태양이 보인다.
그것은 오늘 하루, 그리고 곧 다가올 전투를 알리는 신호였다.
* * *
쓰촨 분지의 중부에 위치한 쑤이닝시는 두 개의 시할구와 세 개의 현, 그리고 5000km가 넘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한다.
예로부터 고고한 문화와 그윽한 산수, 농공상업의 발달로 쓰촨성 중부지구의 중심지라 불렸지만 이제는 그 또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까악, 까아아악!
흐린 하늘 위, 무리 지어 날아다니던 수많은 까마귀 떼가 대지 위에 널브러진 시신 위로 내려앉았다. 먹잇감을 둔 무리 간의 신경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림잡아도 수백 구에 달하는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었고, 까마귀들은 한때 인간이었을 부패한 살점을 쪼아 먹으며 배를 불렸다.
인간에게는 더 없을 재앙이, 그들에게는 배부른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까마귀들의 평화로운 식사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드득, 드드득.
굉음과 함께 지면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에, 까마귀들은 신경질적인 울음을 내뱉으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내뿜어진 검은 깃털 중 몇 개가 바람을 타고 드넓은 분지를 가로질렀다.
흐느적거리며 추락한 깃털을 짓밟은 것은 수많은 걸음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전차의 바퀴였다.
쿵, 쿵, 쿵.
지평선을 메운 인간의 군세.
최전방에 선 탱커들이 든 타워 실드가 지면을 스치고, 그 뒤로 수천에 달하는 헌터들이 오와 열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깊게 눌러쓴 투구 밑으로 누군가의 앙다문 입술이 드러났다.
보이지 않는 전운(戰運)에 휩싸인 수천의 인간은 그저 묵묵히 나아갈 뿐이었다.
저 멀리, 희끄무레한 안개에 휩싸인 도시를 향해. 그리고 곧 이어질 전투와 영광스러운 승리를 향해.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한 사람이 문득 입을 열었다.
“씨벌, 안개 꼬라지 봐라. 저거 괴물 나오는 재난 영화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혹시 그 영화 본 사람?”
심각한 분위기 속 뜬금없이 흘러나온 진태경의 찰진 욕설에, 곳곳에서 피식거리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큽.」
「크흡.」
“뭐야, 나만 봤어? 그 명작을?”
진태경이 어깨를 으쓱하던 그때, 그의 오른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저도 봤습니다.”
“그래요? 최 팀장님은 좀 의왼데.”
“뭐가 말입니까?”
“왠지 영화보다는 뮤지컬이나, 오케스트라 연주. 뭐 그런 것만 볼 것 같은 이미지라서요.”
최민우를 힐끗 바라본 헌터들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호흡이 안정된다. 그들은 긴장이 한결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저도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 영화를 봅니다. 진태경 씨께서 말씀하신 영화도 재밌게 봤고요.”
“오, 그럼 마지막 반전도 아시겠네.”
“물론이죠. 개인적으로는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러게요. 난 그거 보면서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
진태경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죽을힘을 다해 싸웠어야지. 뭐 그런 생각.”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다.
웅혼한 공력이 실린 음성은 공기를 울리며 퍼져 나가, 이내 모두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서부 전선에 속한 수천 명의 헌터와 군인들은 깨달았다.
진태경의 한마디는, 어쩌면 바로 자신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라는 사실을.
“지금쯤이면, 다른 전선도 우리처럼 쑤이닝시를 포위하고 있겠죠?”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곧 전투가 벌어질 테고.”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단호한 어조로 대답하는 샤오 쉔의 모습에 진태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진태경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난기 어린 눈동자 대신, 깊게 가라앉은 안광이 빈자리를 채웠다.
서늘한 그의 동공에 드넓은 분지가 비쳤다.
“저놈들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투둑, 투두두둑.
크르륵……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시체. 스켈레톤들. 그리고 미끄러지듯이 분지를 덮어 오는 안개와 그 안에 도사린 몬스터의 울음소리.
“지금부터…….”
진태경은 깊이 심호흡했다.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