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12
#411화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뇌가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사람들의 호흡과 몬스터가 토해 내는 괴성이 수 킬로미터 밖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어지고, 어느 때보다 날 선 감각이 주위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였다.
솨아아아.
허공에서 느릿느릿 흩뿌려지는 핏방울과 흙, 먼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안개.
그리고…….
‘기(氣).’
느껴졌다. 반경 수백 미터를 에워싼 막대한 기의 움직임이. 머릿속에서 붉은 경종이 울림과 동시에, 나는 지면을 박차고 솟구쳤다.
“피해-!”
꽈아아아앙!
번쩍이는 섬광에 이어 거대한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나는 10여 미터 상공에서 전장을 굽어보았다.
불과 몇 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수백여 미터가 초토화되어 있었다.
사라지지 않은 안개와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지면을 뒤덮은 녹색 핏물과 산산 조각난 몬스터의 사체가 보였다.
‘매직 트랩(Magic Trap).’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에는 인정(人情)이 없으니까.’
인류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전쟁사가 증인이고 검사이며 판사다.
같은 인간들끼리도 전쟁 중에는 온갖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데, 하물며 인간도 아닌 몬스터에게 인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미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렇기에 경계심은 전쟁에 있어 필수 덕목이다. 적이 파놓은 함정에 빠질 확률을 줄여 주고,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타닥.
사뿐히 지면에 내려앉은 나는 손을 뻗었다. 파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며 먼지구름이 흩어진다.
사방을 가득 메운 핏물과 사체들 사이, 익숙한 얼굴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최 팀장님.”
깊이 심호흡한 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등 뒤로 혼비백산한 얼굴의 결사대 이백여 명이 보였다.
“부상자는 몇 있지만…… 전부 무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어마어마한 위력의 트랩이었습니다. 이게 없었다면 아마 절 포함한 대부분이 죽었을지도 몰라요.”
스윽, 우우웅.
최 팀장이 손을 내밀어 눈 앞에 펼쳐진 투명한 막을 건드렸다.
그를 포함한 결사대 전원을 감싼 그것은, 수십억 명의 인구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마법사가 스크롤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은 배리어(Barrier) 마법이었다.
“전투가 끝나면 가장 먼저 미스터 존슨을 찾아야겠군요. 그의 마법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감사의 키스라도 해 주시려고?”
“지금 마음 같아서는 뭘 못 하겠습니까.”
샤오 쉔이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최 팀장의 말을 받았다.
「저는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녀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의 폭발은 그만큼 엄청났고, 그 여파로 인해 어림잡아도 천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죽거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적아(敵我)를 가리지 않는 함정. 아크 리치는 나와 결사대를 잡기 위해 수많은 부하를 장작으로 던져 넣은 것이다.
‘이 새끼 봐라…….’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아크 리치의 교활함과 과감함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내 신호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리고 앞서 길을 뚫으며 미끼를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결사대 전원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했을 거다.
‘바로 그날처럼 말이지.’
평생 잊지 못할 기억.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나는 돌아서며 말했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오세요. 우리의 목적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놈들을 돌파하는 겁니다.”
결사대는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데없이 일어난 폭발에 상당수의 아군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던 몬스터 군단이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순간. 지금의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돌격-!”
나는 공력을 실은 창룡후(蒼龍吼)와 함께 쏘아졌다. 서걱, 뒷걸음질 치는 몬스터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폭발의 여파로 공백이 생긴 몬스터 군단을 향해, 이백의 결사대가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후방의 본대가 그 뒤를 따라 파도처럼 짓쳐 들었다.
와아아아아아-!
전장을 떨어 울리는 먹먹한 함성. 안개 사이로 퍼져 나가는 녹색 핏물.
그리고 까마득한 상공을 맴돌며 전장을 내려다보는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있었다.
* * *
백골로 만들어진 왕좌 위, 마치 잠든 것처럼 앉아 있던 존재가 불현듯 눈을 떴다.
텅 빈 해골의 동공에서 강렬한 안광이 솟구침과 동시에 나직한 뇌까림이 흘러나왔다.
– 제법이군.
아크 리치에게는 수백 개의 눈과 귀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 곳곳에 배치해 둔 패밀리어(Familiar)는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읽어 내고 있었다.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인간과 몬스터. 그리고 빠른 속도로 돌파해 나가는 인간들의 무리 역시.
‘결사대. 분명 그렇게 불렀었나.’
아크 리치는 문득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낡고 케케묵은 기억. 죽음의 강에 잠겨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잊지 못한, 아니 잊을 수 없었던 기억이다.
‘대적자.’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던 한 인간을. 대적자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오던 인간들의 결사대를.
‘내 몸에 검을 박아 넣은 것도 놈이었지.’
아크 리치는 칠흑색 뼈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그는 언데드와 같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왕의 신임을 받으며 셀 수도 없이 무수한 몬스터를 휘하에 둔 고귀하고도 강대한 존재였다.
그러나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던 날, 그 역시 왕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도 한낱 인간의 손에 의해.
– 그런데…… 대적자는 어디에 있지?
아크 리치는 의문에 찬 목소리를 흘렸다.
패밀리어를 이용해 모든 전선을 살폈건만, 응당 나타나야 할 대적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은 인간 몇몇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혹시?’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아크 리치의 안광이 거세게 타올랐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만약, 만약 대적자가 죽었다면. 필멸자의 운명을 맞이했다면?
– 크하, 크하하하!
석상처럼 굳어 있던 몸이 들썩였다. 마력이 담긴 웃음소리에 지면이 흔들리고 대기가 부르르 떨렸다.
주인의 심경에 모종의 변화가 생겼음을 알아차린 호위대가 엎드려 부복했다.
– 군주시여.
– 어찌하여 그러시옵니까.
호위대의 면면은 화려했다. 하나하나가 네임드 몬스터에 버금간다는 데스나이트(Death Knight). 그리고 로브를 깊게 눌러쓴 리치(Lich)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스물에 달했다.
대적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창조물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환희에 찬 웃음을 터트리던 아크 리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들어라. 내 충실한 종들아.
– 명하시옵소서.
자리에서 일어난 아크 리치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이내 스산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 전장으로 가거라. 저 하찮은 인간들을 짓밟고, 쓸어 버려라.
스물의 데스나이트와 리치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크 리치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언데드의 군주.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있을 수 없었다.
– 군주의 명을 받드옵니다.
한목소리로 대답한 그들은 각자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다시 텅 비어 버린 공간. 홀로 웃음을 흘리던 아크 리치는 해골 왕좌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수많은 패밀리어의 눈과 귀로 전장을 살피던 그가 문득 멈칫했다.
– 그런데…… 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지?
상공을 누비는 까마귀의 새카만 눈동자에, 피 보라를 일으키며 몬스터를 베어 가는 한 젊은 인간의 모습이 비쳤다.
과거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은 얼굴. 하지만 이미 며칠 전 패밀리어를 통해 본 적 있는 얼굴이다.
– 데스나이트 로드를 쓰러트린 그 인간이로군.
레이페이를 재료로 만들어진 데스나이트 로드는 아크 리치가 탄생시킨 모든 것을 통틀어 최고의 역작이었다.
비록 굳건한 영혼을 지닌 탓에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힘 일부를 직접 부여한 만큼 그 강함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최고의 전력과 더불어 아까운 마력만 날리게 되었다. 저 하찮은 인간 때문에.
– 거슬리는군. 이 기회에 확실히 처리해야겠어.
제거를 결심한 아크 리치는 사념(思念)을 흘려보냈다.
각 전선으로 향하던 호위대 중 절반이 군주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틀었다.
* * *
콰드드드득!
바람, 무기, 단단하기 그지없는 몬스터의 몸뚱어리.
창날의 궤적에 걸려든 모든 것들이 베어진다.
목이 솟구치고 두꺼운 팔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던 트롤은 재생할 틈도 없이 몸이 조각났고, 반쯤 부패한 상태로 언데드가 된 오우거는 몸을 휘청이다가 뒤이어 날아든 검에 상반신이 날아갔다.
서걱! 서걱! 서걱!
[영웅의 혼]을 휘둘러 순식간에 서너 마리를 베어 버린 최 팀장이 나를 향해 고함처럼 말을 건넸다.“진태경 씨! 몬스터의 공세가 너무 강합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선을 돌파하자 몬스터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그에 반해 병력의 질은 더더욱 높아졌다.
‘이럴 줄 알았지.’
우리를 잡기 위한 매직 트랩의 장작으로 쓴 전방의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중, 하급에 불과했다.
아크 리치는 정예를 후방에 배치하고 그 밖의 몬스터들을 미끼인 동시에 고기 방패로 삼았다.
‘우리의 힘을 빼놓기 위해서.’
거기에 더해 아까보다 짙어진 안개 역시 전투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안개의 영향으로 몬스터가 강해진 것도 문제였지만, 지금 같은 안개 속에서는 시야와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인간보다 감각이 뛰어난 몬스터들에게 유리한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예외지.’
쐐애애액, 뻐억!
힘껏 흩뿌린 창이 예닐곱 마리의 몬스터를 꼬치처럼 꿰뚫었다.
위기를 넘긴 샤오 쉔과 결사대의 헌터가 나를 향해 눈짓으로 감사를 표한다.
“모두 내 쪽으로 뭉쳐!”
「하지만 마법 스크롤이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혹시 또 매직 트랩이 발동되면…….」
“설명할 시간 없어! 긴말 말고 빨리!”
내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최 팀장과 샤오 쉔이 결사대와 함께 전진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세 번의 매직 트랩을 거쳤고 이곳은 아크 리치가 정예를 모아 놓은 후방이다. 트랩이 발동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격 대신 방어 위주로. 전진!”
전투 자체는 어려워졌지만, 갑작스럽게 트랩에 걸릴 확률이 줄어들었으니 나로서는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 한 몸 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다른 결사대원들은 목숨이 위험해지니까.
‘마지막 목적지까지는 코앞이야.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면서 이정룡, 그리고 우헤이싱과 합류한다.’
서걱! 콰드드득!
문득 쌓여 가는 피로를 느끼며, 선봉에서 길을 뚫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 모.두. 물.러.나.라!
– 인간이여. 군주의 명에 따라 내 목숨을 거두겠노라.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는 몬스터의 장막.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들과 마주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Lv.120 어둠에 물든 리치] [Lv.115 어둠에 물든 데스나이트]120레벨을 넘나드는 놈들이 무려 열 마리. 순간 숨이 막히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런 내게 최 팀장이 절망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합니다!”
“최, 최 팀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진태경 씨!”
“도시락이 왔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 예?”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열 마리의 몬스터, 아니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도시락 배달이 왔어요.”
“……?”
– ……?
– ……?
물음표 치워, 이 새끼들아.
일섬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