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13
#412화
푸드드득.
전장 한가운데 위치한 고목에 내려앉은 까마귀가 눈을 번뜩였다.
자신의 패밀리어를 전망 좋은 자리에 앉힌 아크 리치는 썩 즐거운 기분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찌할 텐가. 인간이여.’
쉴 새 없이 번들거리는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에 한 사람이 비친다.
벌어진 입. 잘게 떨리는 손. 그런 진태경의 모습에 아크 리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데스나이트 로드가 저렇게 겁 많은 인간에게 쓰러졌단 말인가?’
비록 약간의 결함이 있었다고는 하나, 데스나이트 로드는 분명 불후의 역작이었다.
아크 리치는 고결한 심성과 강한 무력을 지닌 레이페이라는 훌륭한 재료에 욕심을 숨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친히 자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마력 중 일부를 부여해 주었고, 덕분에 레이페이는 일반적인 데스나이트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 데스나이트 로드가 한낱 겁쟁이 따위에게 쓰러질 리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날, 아크 리치는 진태경과 레이페이의 전투를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아니, 지켜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 어린 인간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간의 군대가 전멸한 후였고, 아크 리치에게는 뻔한 결말을 지켜보는 것보다 다른 전선의 상황이 더 중요했으니까.
귀중한 권속의 소멸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패밀리어를 보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아크 리치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느새 나타난 수천의 인간들과 함께 있는 진태경.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전멸한 몬스터 군단뿐이었다.
‘분명 저 인간 홀로 행한 일은 아니었을 터,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뿐인가.’
하지만 그 운도 여기까지다. 자그마치 열 기에 달하는 데스나이트와 리치는 한 개 군단, 그 이상의 전력을 지녔으니까.
‘더군다나 지난번과 달리 도와줄 놈들도 마땅치 않지.’
이제 저 인간에게 남은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동료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쓰러지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결말이자 아크 리치가 내리는 벌이다.
까아아악!
주인의 마음에 동화된 까마귀가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터트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겁 없이 자신의 권속들에게 다가오던 인간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강대한 마력을 뿜어내는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향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할 셈인가.’
겁만 많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멍청하기까지 할 줄이야.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
“하나, 둘, 셋, 넷…….”
– ……?
아크 리치는 실로 오랜만에 당황했다.
진태경의 입에서 유창한 마계어가 흘러나왔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두 번.
‘도대체 저게 무슨 짓이지?’
의문이 풀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홉, 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태경의 턱을 타고 침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 내렸다.
소매로 문지른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플레이팅 예술이다, 진짜. 진슐랭 별 세 개를 부여하노라.”
– ……?
– ……?
아크 리치와 그의 충실한 권속들은 플레이팅과 진슐랭이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진태경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고오오오오옹.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 어느새 한껏 뒤로 젖혀진 창날에 모여드는 무시무시한 기운.
그 광경에 아크 리치는 차갑게 굳어 있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뼈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한기와 함께 그의 사념(思念)이 터져 나왔다.
– 피하……!
그러나 그의 사념이 전달되는 속도보다, 창이 뻗어 나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우우웅!
바람이 찢어지고.
콰아아아아!
공간이 갈라졌다.
찰나를 쪼개고 쪼갠 시간 속, 푸른 화염을 머금은 거대한 와류(渦流)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수많은 몬스터, 데스나이트와 리치.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목나무에 앉아 모든 것을 지켜보던 까마귀 무리까지.
화아아악!
눈부신 섬광이, 모두의 눈 앞을 가렸다.
* * *
스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전신에 스며든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바람이었고, 새롭게 찾아온 힘이었다.
‘그래, 이거지.’
나는 천천히 사그라드는 빛 너머로 보이는 공백을 보며 웃었다. 데스나이트와 리치, 그 외의 수많은 몬스터가 있던 바로 그 자리다.
모든 것이 깨끗이 말소(抹消)된 그곳은 시스템 알림으로 가득했다.
띠링. 띠링. 띠링…….
– [Lv.115 어둠에 물든 데스나이트]를 처치하셨습니다!
– [Lv.120 어둠에 물든 리치]를 처치하셨습니다!
– [Lv.122 어둠에 물든 데스나이트]를 처치하셨습니다!
.
.
.
– 처치한 몬스터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 대량의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하셨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레벨 업!
– 당신은 극히 뛰어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 업적 달성의 보상으로 칭호, [일기당천一騎當千]을 획득하셨습니다!
– 칭호, [일기당천]의 효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모든 스탯이 일정 수치 상승하며, 피로의 소모가 크게 줄어듭니다! 전투 시 적군은 위축되며, 아군은 사기가 크게 상승합니다!
– 극히 뛰어난 업적을 달성했으므로, 대량의 경험치와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 레벨 업!
– 새로운 스탯, [위압]이 생성되었습니다!
– 칭호, [일기당천]의 효과로 [위압]이 크게 상승합니다!
– 당신을 마주한 적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나는 눈을 감고 시스템이 주는 여운을 즐겼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시스템 알림의 향연. 천국의 종소리가 이런 것인가 싶다.
일섬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리는 레벨 업 네 번에, 지금 같은 대규모 전장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칭호. 거기에 더해 위압이라는 새로운 스탯까지.
‘짜릿해. 늘 새로워. 시스템이 최고야.’
늘 오늘 같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 그것이 사실인가? 오오, 오오오……!
저 시벌 놈이.
스켈레톤 워로드의 산통 깨는 말과 함께 눈을 뜬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석상처럼 굳어 있는 수많은 인간과 몬스터였다.
“……진태경 씨.”
「혀, 형님.」
최 팀장과 샤오 쉔이 넋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백여 명의 결사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날 향한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맙소사.」
「바,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데스나이트와 리치가 열 마리나 있었어. 바로 저 자리에! 내가 똑똑히 봤다고!」
그래. 있었지.
근데 지금은 없어.
“Goddamn! holy shit! what the fuck is this! 퍽킹! 퍽킹 김치! 지저스 김치!”
“에에, 에에에에? 나니? 나이이?!”
“…….”
용병업체나 UN에서 파견된 헌터도 있다 보니 국적에 따라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나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최 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처음 보는 것도 아니시면서.”
“혹시 방금 그게, 지난번 블랙 드레이크를 처치하실 때 쓰셨던……?”
“맞아요.”
한두 번 일섬을 본 전력이 있던 최 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위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때는 힘 조절했죠.”
당연히 구라다. 사실 내가 써 놓고도 얼떨떨해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일섬은 서천마군과의 일전 때였고, 피로가 극에 달한 탓에 곧바로 의식을 잃어버렸으니까.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하나하나가 네임드급에 가깝다는 데스나이트와 리치가 자그마치 열 마리. 그중 예닐곱 마리 정도만 처치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100레벨 이상부터는 상당한 경험치가 들어오고 다른 잡몹까지 더해진다면 레벨 업에는 충분할 테니, 볼썽사납게 탈진해서 쓰러질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뭐.
‘……근데 생각했던 것 이상이네.’
양날의 검. 아니, 양날의 창이지만 확실히 엄청난 한 방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수백 마리의 정예 몬스터는 물론이고 데스나이트와 리치까지 날려 버렸으니.
덕분에 나와 결사대를 포위하던 몬스터 군단엔 커다란 공백이 생겼고, 놈들 역시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지금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치면 병신이지.’
나는 망설임 없이 창을 치켜세웠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짐으로써 양측의 전투가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지만, 몬스터 군단이 정신을 차리고 극심한 수적 열세에 시달리는 결사대가 재차 포위당한다면 그때는 정말 장담할 수 없다.
“뭐 해, 이 자식들아!”
“예?”
“What?”
“에에에에?”
공력이 실린 외침에 퍼뜩 정신이 든 사람들을 향해 고함쳤다.
존댓말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지금은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할 때다.
“닥치는 대로 쓸어 버려!”
“……!”
띠링.
– 칭호, [일기당천]의 효과로 인해 아군의 사기가 크게 상승합니다! 당신의 통솔을 따르는 이들은 끈끈한 결속력을 지니며, 더욱 뛰어난 활약을 펼칠 것입니다!
– 칭호, [일기당천]의 효과로 인해 적들이 크게 위축됩니다!
– 칭호, [일기당천]으로 인해 [위압]의 효과가 증가합니다!
– [위압]의 영향으로 적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뒷걸음질 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 준 그대로였다.
내가 보여 준 신위에 아직 살아 있던 몬스터들은 슬금슬금 물러났고, 이미 이지를 상실한 언데드 몬스터 역시 위축되어 흠칫거린다.
반면 우리는?
“돌격-!”
쐐액! 콰드드득!
우렁찬 외침과 함께 내가 일섬으로 생겨난 공백으로 뛰어들어 종횡무진 창을 휘두르자, 한 몸이 되어 쏘아진 이백여 명의 결사대가 귀가 먹먹해지는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진 선생을 따르자!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퍽킹! 퍽킹 진기스칸! 지저스 킴치맨!”
“에에에에에?!”
퍼걱! 촤아아악!
녹색 핏물이 튀고, 언데드의 뼈가 산산조각나며 부서진다.
서걱!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트롤의 상반신을 깔끔하게 갈라 버린 내게, 스켈레톤 워로드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 간악한 인간이여! 저기! 저놈을 처치해라!
“뭐? 누구?”
– 자꾸 에에에에 거리는 저 이상한 인간 놈을 처치해라!
“…….”
– 아니면 내가 죽이겠다! 한 번만 더 하면 반드시 죽일 거다!
어, 그래.
나도 아까부터 듣는데 좀 빡치긴 하더라.
* * *
– 큭!
아크 리치는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패밀리어와의 링크(Link)가 강제적으로 끊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열 기나 되는 호위대가 일거에 소멸했다.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리 그들은 자신의 힘이 부여된 권속. 아크 리치 역시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 이런 미친. 어찌 인간 따위가…….
순간 흐트러진 마력을 수습한 아크 리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인간 따위? 그 말은 틀렸다. 분명 인간은 하찮은 존재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미 뼈아픈 과거가 있으니.
‘혹시, 혹시 저놈이?’
문득 뇌리를 스치는 어떤 불길한 상상에, 아크 리치의 안광이 거세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