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19
#418화
가끔 누군가의 목숨을 거둘 때마다, 목숨을 구걸하는 적들의 간절한 목소리와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그런 의문이 들고는 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지금껏 스스로가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지 않는지. 모든 일에 존재하는 인과를 남에게서 찾으려 하는지.
‘늦었어.’
누군가를 죽이고자 했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하는 법.
이미 씨는 뿌려졌고, 마침내 수확의 시간이다.
나는 우헤이싱의 핏발 선 눈동자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내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더 이상 들을 것도, 볼 것도 없다. 나는 망설임 없이 우헤이싱의 목줄기를 잡아 비틀었다.
우두둑.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는 악력에 살이 짓이겨지고 뼈가 조각난다.
부릅뜬 채 굳어 버린 놈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빛이 빠져나갔다.
버둥거리던 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띠링.
– [Lv.135 우헤이싱]을 처치했습니다!
– 상당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명성치를 얻지 못했습니다. 해당 인물을 처치한 것이 알려진다면 상당한 파장이 예상됩니다!
바로 그때였다. 이십여 미터 밖에서 신형을 일으켜 세운 이정룡이 입을 연 것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구나.”
나는 숨이 끊긴 우헤이싱을 내던지며 대답했다.
“죽여야 할 놈이었으니까.”
“저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아느냐?”
“들어 보긴 했지. 수십 년 전쯤 공자 묘에 오함마 내리찍던 놈 중 하나였다고.”
“그리고 그 어린 홍위병은 자라 중국 정치계의 최고 거물이자 태자당의 우두머리가 되었지. 샤오 양 주석도 감히 그를 어쩌지 못해.”
“캬, 시벌. 어메이징 대륙이네. 우리나라로 치면 숭례문 방화범이 대통령 된 거 아냐. 안 그래?”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10억 인구 중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쉰이 넘어서야 얻은 외동아들을 네 손으로 죽였다는 게다.”
“내가? 아니지.”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우헤이싱은 아크 리치와 접전을 벌인 끝에 사망한 거야.”
“……!”
“말했잖아, 묘비명도 정해 뒀다고. 나쁜 짱깨, 착한 중국인이 되어 이곳에 잠들다. 물론 그 옆에는 당신 묘비가 있을 거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정룡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교활한 놈이로고.”
“너희가 짠 시나리오 괜찮더라. 내가 좀 쓰자.”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네 뜻대로 되진 않을 테니.”
“글쎄…….”
나는 널브러진 우헤이싱의 시신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내 뜻대로 된 것 같은데?”
“그래, 그 부분만큼은 나와 같구나.”
“뭐?”
눈살을 찌푸린 나를 바라보며, 이정룡이 잔잔하게 웃었다.
“우헤이싱은 귀가 얇고 입이 가벼운 놈이지.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기에는 형편없지만, 그런 놈이라 해도 이용할 구석은 충분하다.”
“……무슨 개소리야?”
“말하자면, 이런 뜻이지.”
이정룡이 손에 든 무언가를 누르자, 짙은 안개 사이를 뚫고 콘크리트 조각에 닿은 빔이 홀로그램을 띄웠다.
10초 남짓한 짧은 홀로그램 영상에는 목숨을 애걸하는 우헤이싱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꺾는 내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허.”
나는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화질 좋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영상 같아.”
“그렇지. 늦둥이 외아들을 잃은 늙은 아버지라면 특히.”
“무편집본으로 보여 줄 생각은?”
“마력의 영향 때문인지, 아마 오작동으로 인해 영상의 앞부분이 날아갈 것 같구나.”
“그거참,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네.”
“이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가 막힐 수밖에 없을 터. 평소 헐뜯기 좋아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널 신봉하던 이들조차 돌아서겠지. 네가 그토록 아끼는 사람들도 대중의 비난 속에서 서서히 무너질 게다.”
평화 길드, 그리고 엄마와 하연이.
이정룡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간 이름과 얼굴들이다.
나는 우헤이싱의 시신을 밟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애당초 우헤이싱은 도구였을 뿐,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저벅.
이정룡 역시 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지금까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이 우헤이싱의 죽음에도 이정룡이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목적을 달성한 교활한 맹수가, 비로소 숨겨 둔 발톱을 꺼낸 것이다.
“빌어먹을, 어쩐지 쉽더라니.”
내 푸념에 이정룡이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한 가지는 칭찬해 주마. 넌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어.”
“마지막으로 묻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 같은 핏덩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저벅.
“최 팀장, 아니 최민우가 그렇게 겁났나?”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콰아아아아!
순간 밀어닥친 거대한 기파가 안개를 밀어 내고 공간을 장악한다.
예리하게 날 선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잔잔하던 이정룡의 눈동자 위에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오롯이 내 힘으로 얻어 낸 자리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나만의 제국이란 말이다!”
그건 꾹꾹 눌러 왔던 분노였고, 실로 오랜만에 표출하는 감정이었다.
이정룡은 불길이 쏟아지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한 음절, 한 음절 씹듯이 내뱉었다.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다. 너도, 민우 그 아이도, 그리고…… 설령 형님조차도!”
형님?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 두 글자에 대해 의문을 표할 시간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저벅.
유난히 무겁고 깊은 소리를 남긴 한 걸음.
동시에 이정룡의 신형이 물처럼 일렁였다.
잔상(殘像)을 남긴 채 사라진 맹수는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쉬이이이잉!
눈앞을 가득 메운 빛무리. 나는 허리를 비틀며 백염(白炎)을 휘둘렀다.
빛과 화염이 맞닿은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꽈아아앙!
* * *
폭발은 거대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고층 빌딩이 터져 나가듯 무너지고, 유리와 콘크리트가 셀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조각으로 분해되어 사방을 꿰뚫었다.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느껴질 법한 격돌의 여파.
연달아 이어지는 붕괴와 굉음 속에서, 나는 발을 뻗었다.
쉬익!
갈라지는 먼지구름 너머로 허공을 딛고 우뚝 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속을 짐작할 수 없던 투명한 눈동자는 불길을 토해 내고 있었다.
“진태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나는 지면을 부수며 솟구쳤고, 그는 허공을 밟으며 내리꽂혔다.
서로를 향해 휘두른 검과 창의 궤적이 정확히 맞닿은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전신을 휩쓸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튕겨 나간 우리는, 이미 폐허가 된 도시의 구조물을 밟으며 재차 쏘아졌다.
쐐애애애액, 꽈앙!
굉음과 함께 창날을 흘려 낸 검 끝이 곧장 목젖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펑!
고개를 틀자 파공성과 함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쉬쉬쉬쉭!
이정룡의 검이 새하얀 빛이 되어 쏘아졌다.
검신을 타고 흘러나온 강기(罡氣)의 그물.
눈앞을 가득 메운 빛의 향연에, 나는 단전에 잠들어 있던 모든 공력을 깨웠다.
삼 갑자의 열양지기가 들불처럼 일어나 사지백해로 스며든다. 투명한 창날을 타고 솟아오른 푸른 겁화가 용의 꼬리처럼 부드럽게 일렁였다.
‘화룡일미(火龍一尾).’
후우우웅!
단 한 번의 휘두름.
부챗살처럼 뻗어 나간 화룡의 꼬리에 쇄도하던 강기의 일부가 사라졌다.
이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헐거워진 그물을 찢어 버릴 차례다.
‘천격(天格).’
고작 두 초식으로 이루어진 화룡신창(火龍神槍).
그러나 화룡신창을 창안한 열화문의 옛 장문인은 천하제일창이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생애 마지막 순간 자신의 무공에 대한 짤막한 유언을 남겼다.
‘일평생을 바쳤지만 완성하지 못한 무공. 그럼에도 천하제일이라 부를 수 있는 창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화룡신창은 그런 무공이다. 단 두 초식만으로도 천하제일이라 자부할 수 있는 창술, 그리고…….
콰아아아아!
전력이 실린 천격이 강기의 그물을 찢고 전방을 휩쓸었다.
어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들이닥친 화염을 바라보던 이정룡이 힘찬 기합과 함께 검을 내리그었다.
“합!”
쉬익!
검 끝에 화염이 갈라졌다.
좌우로 생겨난 불꽃의 길을 따라 화살처럼 쏘아진 신형이 무수한 검격을 쏟아 냈다.
슈슈슈슈슉!
가슴, 목, 어깨, 팔과 다리…….
찰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 속.
빛살처럼 휘두르고 베어지는 검의 궤적 앞에서, 나는 문득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나는 헌터다. 동시에 무인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플레이어(Player)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무더운 여름날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VR 캡슐을 주운 날,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힘을 얻었으니까. 현대와 무림을 아우르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쾅!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움직임, 완벽에 가까운 힘의 조절, 그리고 기의 컨트롤까지.
이정룡의 공격을 받아친 나는 내심 감탄했다. 그것은 이정룡이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 그가 갖춘 실력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현대에서 나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천에 와서 여러 S급 헌터들을 만난 후 그런 생각은 더더욱 굳어졌다.
그들 개개인이 품은 기운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이곳에는 무공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소위 말해 헌터라는 이들은 효율적인 전투를 할 뿐, 효율적인 기의 운용에 있어서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이정룡? 현대에서는 마나 연공법이라 불리는 심법을 익혔다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내 오만함이, 잘못된 판단을 낳았다는 것을.
서걱!
허벅지가 시원해지더니, 이내 불길처럼 뜨거운 고통이 잇따랐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긴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들고 눈앞이 맑아지는 이유는.
서걱, 서걱, 서걱!
팔, 종아리, 그리고 목덜미.
핏물이 솟구치고, 강기를 통해 유입된 기운에 공력이 흐트러진다.
비틀거리는 나를 향해 끊임없이 검격을 쏟아붓는 이정룡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동시에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눈빛과 입가에 걸린 미소.
‘아, 마음에 안 드네.’
저 웃음도, 저런 인간이 이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울컥 솟구치는 무언가를 느끼며 백염을 휘둘렀다.
꽈앙!
일 합.
앞서 베인 상흔에서 피가 흐르고 고통이 전해졌다. 그러나 나는 말없이 재차 창을 내질렀다.
한 걸음 물러났던 이정룡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부딪쳐 왔다.
쾅!
이 합.
두 걸음을 물러난 이정룡이 뜻밖이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었나? 표정 위로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야 물론이지.’
나는 내심 중얼거리며, 창을 고쳐 쥐고 미약하게 전해져 오는 통증을 무시하며 발을 내디뎠다.
쾅! 쾅! 꽈앙!
세 번, 네 번, 다섯 번.
창과 검이 부딪치고 굉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이정룡의 안색이 굳는다.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놈……!”
평소 고양이 발바닥처럼 부드럽던 목소리 대신, 으르렁거리는 듯한 외침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의 힘에 도취된 나는 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오판을 저질렀지만, 그건 이정룡 역시 마찬가지다.
이정룡이 드러낸 발톱은 충분히 강하고 날카로우나, 내 숨통을 끊어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룡아.”
크게 숨을 들이켜자 퀴퀴한 공기와 악취가 밀려온다. 그럼에도 속이 뻥 뚫린 것처럼 후련했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발톱 자르자.”
이정룡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