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2
#41화
헌터 인력 사무소.
말이 사무소지 빌딩이다. 역세권 노른자위 땅에 세운 이 6층 빌딩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헌터들이 드나들었다.
‘오랜만이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로비는 인산인해였다.
긴 줄을 거쳐 창구에 도착하자 여직원이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인력 사무소는 처음이신가요?”
“아뇨, 등록되어 있습니다.”
“성함이?”
“진태경입니다.”
초짜 시절이었다. 헌터 훈련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지만 나 같은 F급 헌터를 필요로 하는 곳은 거의 없었고, 몇몇 중소 길드가 적선하듯 내민 계약서는 날강도 수준이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곳이었다. 지역은 달랐지만.
“일산 지점에 기록이 남아 있네요. 명단에 올렸으니 1층 강당에서 대기해 주세요.”
“네.”
이 6층 빌딩은 그 자체로 피라미드다. 1층은 E급과 F급을 수용하고, 2층은 최소 D급부터 발을 들일 수 있다.
너무 대놓고 차별하는 것 아니냐며 분노하는 사람도 있지만, 차별하는 거 맞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 바닥에서 7년을 버티면서 온갖 더러운 꼴을 다 겪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지.
그런 생각과 함께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걸걸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웬 털북숭이가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태경이. 진태경 맞지?”
“꺽정 아저씨?
이 아저씨, 아직 살아 있었어?
* * *
성은 임. 이름은 까먹었다. 7년 전 딱 한 번, 자기소개할 때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산적을 연상시키는 외모라 모두 그를 임꺽정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F급 헌터 사는 게 거기서 거기죠. 아저씨는요?”
“아저씨는 무슨.”
임꺽정이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님이라고 불러라. 나이 차이도 얼마나 안 나는데.”
몇 살 차이였더라. 가물가물하다.
“형님, 혹시 나이가?”
“마흔다섯.”
“…….”
저 당당함 뭔데.
하지만 그동안 갈고 닦은 처세술이 빛을 발했다. 나는 가까스로 억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네요. 그냥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래, 동생. 으하하하!”
강당 안에 호탕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이 붙었다가 떨어진다.
‘그냥 못 들은 척하고 갈걸.’
어떻게 보면 얕은 인연이다. 반년 남짓 일산 사무소에서 매일같이 마주치고, 가끔 같이 일도 하고. 딱 그 정도 인연.
‘사람은 좋은데…….’
가끔 옆에 있으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지금처럼.
“여기 율무차가 끝내줘. 강당 의자도 푹신하고.”
율무차를 한입에 털어 넣은 임꺽정이 의자를 한껏 젖혔다.
보아하니 한두 번 들락거린 솜씨가 아니다.
“자주 오시나 봐요?”
“매일은 아니고 가끔 들르는 정도지. 결혼하고 자식도 생기니까 몸을 사리게 되더라고. 흐흐.”
못 본 사이에 가정을 꾸린 모양이다. 내가 축하 인사를 건네자 임꺽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겸양을 떨지만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헌터, 그것도 F급 헌터로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가정까지 일구다니.
어쩌면 눈앞의 임꺽정이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 나이까지 살아 있어야 가능한 거지만.’
헌터는 오래 할 직업이 못 된다. 그래서 연금 지급 대상인 10년을 채우자마자 은퇴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나저나 너도 이제 제법 티가 난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얼어서 말도 잘 못하더니.”
“당연하죠. 나름 7년 찬데.”
“그럼 그때 이후로 계속 사무소만 돈 거야? 그럭저럭 괜찮은 조건으로 중소 길드랑 계약하지 않았나? 소, 소…… 거기 이름이 뭐더라.”
“소풍 길드요. 그저께 잘렸어요.”
임꺽정이 애써 웃었다.
“으하하! 잘했어. 길드 이름도 구리네. 소풍이 뭐냐 소풍이. 게이트에 소풍 가는 것도 아니고.”
“아뇨, 그 소풍이 아니라 지역명인데요. 부천 소풍터미널 근처라 소풍 길드.”
“아…….”
그 후로 이어지는 임꺽정과의 대화는 제법 유익했다. 어쨌건 그는 인력 사무소의 단골이었고 괜찮은 정보와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진 베테랑 헌터였으니까.
“사무소 수수료 10%. 뭐 이거야 기본이고, 여기 꽤 타율이 좋아.”
타율. 고용될 확률을 이르는 이 바닥 속어다. 당장 일당 치기가 목적인 나로서는 희소식이었다.
“저희 같은 F급 헌터도요?”
“어? 응. 그렇지.”
뭐야, 저 어색한 표정은?
하지만 뭔가를 더 물어보기도 전에 강당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E급 헌터 임혁준. 임혁준 님께서는 로비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오전 여섯 시 반.
드디어 첫 타자가 나왔다. 그리고 E급 헌터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야 내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역시 E급 먼저 나가는…… 형님 어디 가세요?”
“먼저 갈게.”
방어구와 무기가 든 커다란 가방을 둘러맨 임꺽정, 아니 임혁준이 허허 웃었다.
‘어쩐지 표정이 이상하더라니.’
저 양반, 못 본 사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 모양이다.
고작 한 단계지만 F급의 잠재력으로 승급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니까.
“또 보자.”
“네. 또 봬요.”
그가 강당을 빠져나간 것이 시작이었다. 스피커는 작정한 듯 사람들의 이름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E급 누구누구, E급 누구, E급…… 염병, 여긴 나만 F급이냐?
슬슬 초조해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 F급 헌터 진태경. 진태경 님께서는 로비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떴다!
* * *
“진태경 씨?”
로비에는 흰색 린넨 셔츠를 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덤덤한 얼굴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평화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읽고 사인하십시오.”
이 자식 말투가 상당히 거슬리는데?
나는 계약서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정산 비율이 8:2로 되어 있는데요.”
“레이드 후 기여도에 따라 공정한 금액 분배 후. 진태경 씨가 받게 될 금액의 2할을 저희가 가져갑니다.”
“기본 수당은요?”
“삼십.”
“삼시입?”
이 자식은 혀가 반 토막이 났나.
“게이트 등급.”
“E급.”
“거절.”
“포지션 다 찼습니다. 진태경 씨는 짐꾼 역할입니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자식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짐꾸운?”
“문제가 있습니까?”
“당연히.”
셔츠남이 고압적인 시선으로 쏘아봤다.
“뭡니까?”
“펜이 없어요.”
“…….”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셔츠남이 건네주는 펜을 받아 사인을 휘갈겼다. 기본급 30만 원에 정산 비율도 후하다.
E급 게이트라는 말에 흠칫했지만 짐꾼이니까 상관없지. 몬스터 가죽 좀 벗기고, 배낭 좀 메고 있다가 기분 좋게 헤어지는 거다.
‘평화 길드. 이름부터 마음에 드네.’
아까부터 사인하고 싶어서 손가락에 쥐 날 뻔했다.
“잘 썼습니다.”
“…….”
“이제 어디로 가요? 봉고차 타고 가나?”
“밖에 승합차 대 놨습니다.”
“오, 저거죠? 좋아 보이네. 에어컨도 빵빵할 것 같고.”
“…….”
“제가 마지막이었나 봐요? 이미 몇 분 계시네…… 어? 꺽정 형님!”
“어? 태경아!”
버스 트렁크에 짐을 넣기 위해 대기 중이던 임꺽정이 활짝 웃었다.
“너도 같이 가는구나. 잘됐다!”
“그러게요. 제가 형님이랑 제법 인연이 있나 본데?”
“으하하하!”
“아하하하!”
“……출발하시죠.”
더위 때문인가, 셔츠남의 얼굴이 부쩍 늙어 보였다.
* * *
버스가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은 셔츠남은 20분 안에 도착한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임꺽정이 함께 고용된 이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자, 다들 인사해. 여긴 내 아는 동생.”
이제 보니 다들 아는 사이였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진태경입니다.”
“어어, 반가워요.”
“젊은 친구가 훤칠하네. 잘 싸울 것 같어.”
새로운 사람들은 총 세 명이었는데, 최소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아저씨들이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임꺽정이 설명했다.
“이 친구들은 다 E급이야. 오래전부터 알았지. 10년도 넘었으니까.”
“뭐, 그쯤 됐죠. 세월 참 빨라.”
다들 최소 10년 차라는 말이다. 나도 어디 가서 풋내기 소리 들을 정도의 경력은 아닌데, 이 사람들은 완전히…….
‘고인물 파티.’
이런 사람들은 어딜 가든 제 몫은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어중간한 D급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젊은 친구는 등급이 어떻게 돼?”
올 게 왔다. 등급 조사.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F급입니다.”
“아. 그래? 경력은?”
“7년 찹니다.”
“흠. 그래?”
미적지근한 분위기. 첫 레이드부터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나는 재빨리 입을 털었다.
“전투 참여는 일절 안 하고 짐꾼으로 참여할 겁니다. 걱정 안 하셔도…….”
세 사람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본다.
“뭘 부연 설명까지 해. 우리가 잡아먹나?”
“됐어. 7년 굴렀으면 알 만큼 알겠지.”
“꺽정 형님 추천이면 된 거지. 최 팀장도 괜찮다 싶으니까 오케이 했을 거고.”
추천? 최 팀장?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 돌아가는 그림은 알겠다.
임꺽정이 나를 추천한 거다. 셔츠남, 최 팀장에게.
“무, 무슨 소리를!”
손사래 치는 임꺽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 아저씨 셋이 낄낄거렸다.
“다 티 나, 아주. 저 형님 장가는 어떻게 갔대?”
“원래 선행은 밝혀져야 좋은 거야. 뭘 그렇게 숨기고 살아.”
“그럼.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흠. 뭐 나야 그냥 한 번 찔러 본 거지. 결정은 최 팀장이 다 했어.”
이거 참…….
잠깐 들렀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난 임꺽정은 생각보다 순박하고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건도 후했던 건가.’
최 팀장, 최 팀장 하는 걸 보니 그들 사이의 친분도 내 계약조건에 한몫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결정은 최 팀장이 했다니까!”
임꺽정의 어색한 변명에 당사자가 대답했다.
“그럼 제가 결정한 걸로 하죠.”
어느새 눈을 뜬 셔츠남. 아니, 최 팀장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다 도착했으니까요.”
고개를 돌리니 점점 가까워지는 4m 높이의 문(Gate)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우리를 빨아들일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E급 게이트.’
복귀 후 첫 레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