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35
#434화
“거울 보셨습니까?”
항공기에서 가장 먼저 내린 최 팀장이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못 알아봤을 정도니 대강은 짐작했지만, 그 정도로 내 꼴이 엉망인가?
“아뇨. 심해요?”
“네. 가족분들도 진태경 씨를 못 알아볼 만큼요.”
“에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는 알아보실걸요.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인데.”
“모시고 오는 길에 기내에서 같이 뉴스 봤습니다. 인터뷰 보시면서 저 지저분한 사람은 누구길래 말투가 저리 틱틱대냐고 하시던데요.”
“……진짜요?”
최 팀장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자, 열려 있는 전용기 입구 틈새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엄마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아들.”
한마디만 남기고 쏙 사라진 엄마를 대신해 갸름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며칠 내내 잘 자고 먹었는지 피부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하연이었다.
“난 바로 알아봤어! 역시 나밖에 없지?”
“누구세요. 저 외동인데.”
“헐.”
하연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최 팀장에게 물었다.
“저 녀석이 제 욕 제일 많이 했죠?”
“네. 신나서 어머님을 부추기더군요.”
그래, 내 동생 맞구나.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하연이가 순식간에 고개를 집어넣었다.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눈치도 빠르다.
“화목한 모습, 보기 좋습니다.”
“두 번 화목하면 호적에서 누구 하나 사라지겠어요.”
최 팀장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그게 낫죠. 전 가족도 없습니다.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외할아버지를 빼면요.”
“……아니, 저한테 왜 이러세요.”
“농담이었습니다만.”
“제발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옵시다.”
내 투덜거림에 최 팀장이 낮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짤막한 시동어와 함께 클린 마법이 내장된 아이템이 번쩍 빛난다.
마나로 이루어진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뒤덮은 먼지와 얼룩을 한 번에 날려 보냈다.
“감사합니다. 훨씬 낫네요.”
“별말씀을. 그나저나 마지막까지 바쁘시군요. 떠나는 날인데 갑자기 사라지셔서 상당히 난감했습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안 그래도 시간 맞춰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최 팀장의 시선에, 뒤통수를 긁적인 뒤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른 거예요.”
“진태경 씨.”
“알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계신다고 해도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최 팀장이 내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진태경 씨는…… 최선을 다했어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현대에서, 그리고 무림에서,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사건과는 동떨어진 구경꾼이었을 때도 있었고 당사자였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날 때마다 늘 같은 의문을 떠올리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정말 이게 최선일까?’
최선(最善).
가장 좋고 훌륭하며, 온 정성과 힘을 다했다는 뜻.
나는 저 두 글자가 가장 무섭다. 기준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선이라는 건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만 충족시킬 수 있는 기준.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남는 법이고, 그것이 몇 톨 부스러기에 불과할지라도 마음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어떤 후회도 없는 것이 최선이니까.
“오늘 날씨 좋네.”
괜히 하늘을 보며 중얼거린 나는 최 팀장을 향해 씩 웃었다.
“차선(次善) 정도로 해 두죠. 그게 마음 편해요.”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시각은 다르지. 우리에게는 최선, 그 이상이었소.」
최 팀장이 한 말이 아니다.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주인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그래서…… 결국 떠나시는구려, 진 선생.」
나는 샤오 양 주석을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호텔 숙박비가 비싸더라고요.”
「그네들도 장사치 아니겠소.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를 받는 건 당연하지.」
“할인이라도 해 주면 모르겠는데, 외국인이라 그런지 바가지를 씌우는 것 같길래.”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 이 늙은이가 단단히 타일러 놓을 테니 더 머물러 주겠소?」
“이미 버스 지나갔습니다. 도로까지 쫓아가서 문 열어 달라고 하는 건 기사님께 실례죠.”
「어쩔 수 없이 보내 드려야겠구려, 허허.」
지금 같은 상황에 어느 정신 나간 호텔이 나한테 비용을 청구하고 바가지를 씌우겠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의사를 재확인한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도움을 받았소.」
진심이 담긴 목소리와 눈빛.
국가 주석의 수행을 위해 함께 온 이들도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드문드문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샤오 쉔과 국방부장 웨이펑후였다.
두 사람에게 슬쩍 눈인사를 건네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무료 봉사도 아니었고요. 아시죠?”
「허허, 물론이오.」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아크 리치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무려 50조였다.
한 달가량 이어진 전쟁으로 얻게 될 보수는 거스름돈 취급해도 될 만큼 천문학적인 금액.
평생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액수라 사실 지금까지도 믿기 힘들었다.
‘50조라니.’
돈을 아끼기 위해 7천 원짜리 뼈해장국으로 끼니를 때우고, 그 정도로는 허기가 가시지 않아 라면을 끓여 먹었던 것이 고작 반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인지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이 앞섰다.
“저기, 그런데요.”
「……?」
“진짜 줍니까?”
말이 끝난 순간 최 팀장이 지그시 발을 밟았고, 샤오 양 주석의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왜, 받기 싫으시오?」
“아뇨, 아뇨!”
격한 대답에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샤오 양 주석이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말하지 않았소. 일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소국이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대국이라 하기에는 속이 너무 좁아서 중국이라더니 이 할배는 아주 롸끈하시다.
나는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계약서대로 돈을 받는 게 죄는 아니지만, 지금 같은 참담한 상황에서 50조나 되는 현상금을 받으려니까 어쩐지 남의 집 곳간을 뒤지는 도둑놈이 된 기분이었다.
“사정 안 좋으시면 할부로 주셔도 되는데.”
「피해 복구를 걱정하는 거라면, 본국이 헤쳐 나가야 할 일이지. 진 선생의 문제는 신속히 처리 중이니 곧 정식으로 현상금이 지급될 거요.」
말을 끝마친 샤오 양 주석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밭을 갈아엎으며 썩은 줄기를 잡아당겼더니 황금이 무더기로 나오더군. 그러니 진 선생께서는 불편해하실 필요 없소.」
저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태자당에 관한 이야기였다.
뉴스에 의하면 지금까지 압류한 재산만 수백 조가 넘어간다던가?
아직 실질적인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우쉐이밍을 비롯한 수뇌부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고 했다.
‘비리 클라스 보소.’
국토 면적과 간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이 틀림없다.
뭐, 빈털터리가 되어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의 정의 구현은 이룩한 셈이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뭐, 감사히 받아야죠.”
「무슨 말씀을. 덕분에 더욱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었소.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모든 인민을 대신하여 다시 한번 진 선생께 감사를 표하는 바요.」
말릴 새도 없이 샤오 양 주석과 그 수행원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일국(一國)을 움직이는 주요 관료들.
이들이야말로 중국의 몸통이요, 머리나 다름없다.
순간 당황한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절이라도 올려야 하나?」
“파이 첸.”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다가온 그녀가 내 볼을 쿡 찔렀다.
「고생했어, 청년.」
“아닙니다. 다 같이…….”
「물론 모두가 고생했지. 하지만 네가 아크 리치를 처치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평화는 없었을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 아, 저 재수 없는 왕자 놈은 빼고.」
휘황찬란한 정복에 새하얀 망토를 걸친 필릭스 왕자가 언짢은 헛기침을 내뱉더니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뭐.”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국의 평민이여.」
“……고맙긴 한데, 뒤에 몇 글자는 빼 줄래?”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한국의 평민.」
“너 일부러 이러냐?”
「진심이다.」
“그렇겠지, 이 새끼야. 내가 평민인 건 맞으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다.」
필릭스 왕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던 점은, 자신의 손등을 내민 것이 아니라 내 손을 잡아끌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안이 벙벙한 틈을 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뭐여, 시벌.’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파이 첸이 박장대소를 터트렸고, 필릭스 왕자는 태연하게 할 말을 했다.
「경의를 표한 것이다. 두 번 다시 없을 일이니 대대손손 영광으로 여기도록.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 필릭스 왕자가 수행원들을 이끌며 쌩 사라지자,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매직 존슨이 입맛을 다셨다.
「매력적이야.」
“……저런 취향이었어요?”
「존중해 줘.」
“배우자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참는 거야.」
한국 편의점은 못 오게 해야겠다. 참치마요 한 입 먹으면 세상은 유례없는 게격변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내게 최 팀장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진태경 씨. 출발해야 할 시간입니다.”
비단 내게 하는 말이 아닌, 이 자리의 모든 이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샤오 쉔과 웨이펑후도 빠트리지 않았다.
“잘 지내라.”
「꼭 다시 뵙겠습니다, 형님.」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인 샤오 쉔은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반드시 형님처럼 뛰어난 헌터가 되어서,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안 무력부장이 되겠습니다.」
“어린것이 벌써부터 권력욕에 눈이 멀었구나. 그거 엄청 빡셀 텐데.”
「부끄럽지만, 할아버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래. 덕담 많이 해 주실 테니까 잘 듣고 뼈에 새겨.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하나하나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을 해 주실…….”
이어지려던 내 말은 샤오 쉔의 한마디에 뚝 끊겼다.
「형님도 아시는데요.」
“응? 뭘?”
「저희 할아버님이요.」
“뭔 소리야. 내가 아는 할아버지는 우리 길드 김 집사님이랑 고시원 앞 부동산 사장님밖에 없는데.”
샤오 양 주석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허허, 이 늙은이도 있지 않소.」
“에이. 농담도 참…….”
잠깐만.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샤오 양, 샤오 쉔. 샤오, 샤오?’
중국에서는 김씨, 박씨처럼 흔한 성씨라서 넘겼는데 지금 보니까 얼굴도 묘하게 닮았다.
“설마?”
「네, 맞아요.」
「진 선생도 별수 없구려. 다른 사람들과 반응이 똑같아.」
“……아, 속 안 좋아지려고 해.”
「형님?」
「진 선생?」
이거 무슨 소설인가. ‘중국에서 만난 아는 동생이 중국 주석 손자였던 건에 대하여.’ 제목도 비현실적이다.
아니 뭔 만나는 놈들마다 죄다 금수저야. 잠깐 패닉에 휩싸여 있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아하. 그러시구나.”
「진 선생께 감사한 이유는 주석으로서의 입장도 있지만, 손주를 다시 만난 할아비의 마음도 있다오. 이 늙은이가 평생토록 갚지 못할 빚이지.」
“아…… 천천히 갚으시면 됩니다.”
뜻하지 않게 중국 주석의 손자를 구한 셈이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조손(祖孫)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던 내 시선이 문득 한 사람에게 닿았다.
‘웨이펑후.’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공허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자신의 상관과는 달리, 그는 사랑하는 핏줄을 잃었으니까.
아주 잠깐,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던 우리는 동시에 입을 뗐다.
“안녕히 계세요.”
「잘 가십시오, 진 선생.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이만.”
사람들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인 나는 최 팀장의 뒤를 따라 대기 중인 기체에 몸을 실었다.
엄마는 불안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내 몸을 살폈고, 그 틈을 타 샴페인을 홀짝거리던 하연이는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빠도 한잔할래?”
“한잔 같은 소리 하네. 미성년자가 어딜. 야, 쟤 잔 뺏어.”
일찌감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좌석에 앉아 있던 스켈레톤 킹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지 않는다니, 내가 고자라니…….”
그 옆자리에 앉은 최 팀장이 위로했다.
“힘내십시오. 다음에 미스터 존슨에게 잘 부탁해 보겠습니다.”
“저, 정말?”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비로소 내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서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동료와 친구.
비록 집이 아닌 전세기 안이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안락함이 느껴진다.
그래, 이것으로 됐다.
– 이륙을 시작하겠습니다. 기내에 계신 분들께서는…….
알림 방송이 울렸고, 항공 편대의 호위 속에서 기체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리고 한참을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간 쌓인 피로로 곤히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푹신한 좌석에 몸을 눕혔다.
‘로그인.’
띠링.
익숙한 알림과 함께 어둠이 눈앞을 가렸고, 나는 출발했다.
저 먼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