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39
#438화
문경을 바라보는 적천강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잠시 노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감히 남의 제, 제…… 제태경을 핍박해?”
“……제태경은 또 뭐야.”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쏙 들어간 내 중얼거림에, 적천강이 버럭 외쳤다.
“시끄럽다!”
나와 문경이 동시에 대답했다.
“노야가 더 시끄러운데요. 지금 거의 세상의 중심에서 제태경을 외치고 계신데.”
“목청을 보니 십 년은 더 살겠군.”
기차 화통을 에어 프라이어에 구워 드셨나.
아까부터 문경이 공력으로 기막(氣腸)을 펼쳐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사람들이 몰려오고도 남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적천강의 모습에 문경이 작게 혀를 찼다.
“잠시 대화를 나눈 것뿐이다. 노부가 이런 핏덩이를 핍박해서 무엇할까.”
적천강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네 녀석이 대답해 봐라. 저 늙은이의 말이 사실이냐?”
“대화만 나눈 건 사실인데, 제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장강 밑바닥에 가라앉을 거라고 했어요.”
내 고자질에 문경이 뻔뻔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물론 약간 겁을 주긴 했지.”
“이런 빌어먹을 늙은이를 봤나! 감히 이따위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흥분을 가라앉혀라. 중단전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었을 뿐이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상체를 기울인 적천강이 우뚝 멈췄다.
“중단전?”
“그래. 설마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
“이토록 짧은 시간에 중단전을 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운(天運)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지.”
나와 문경을 번갈아 바라보던 적천강이 피식 웃었다.
“별것도 아니었군.”
“……뭐?”
“그래서, 저 녀석이 마공(魔功)이라도 익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짧게 말하지. 아니야.”
너무나도 확신에 찬, 태연한 반응에 문경의 말문이 막힌 순간. 적천강이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뭣 하느냐. 어서 이리 오지 않고.”
“예?”
“수련 봐 달라며?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 예.”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상황에 나조차도 내심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적천강이 물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 당최 어떻게 중단전을 열었느냐?”
“어. 그게요. 꿈을 꿨는데 웬 검을 든 노인이…….”
“검선 여동빈이라도 만난 게냐?”
“……뭐, 저쪽 말을 들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연을 얻었구나. 하늘이 네 녀석을 돕는 모양이다. 세상에는 사람이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기 마련이지.”
시선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대답이 향하는 곳은 문경이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한마디를 툭 던진 적천강이 돌연 주름진 손을 휘둘렀다.
딱!
“아야! 왜 때려요?”
“그냥 괘씸해서 한 번 쳐 봤다. 꼬우냐?”
“꼬우면요?”
“한 대 더 맞아야지.”
빡!
“아악!”
“돌대가리 같은 놈이 엄살은. 헛짓거리 그만하고 따라오거라.”
이대로 가도 되나?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문경을 힐끔거리는 내게,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이놈이!”
“아이고, 알겠어요. 소리 좀 그만 지르세요.”
“이리 미적대서야 수련할 생각이 있는 게냐?”
문경을 두고 돌아선 나는 적천강의 등을 바짝 쫓으며 속삭였다.
“그런데, 더 안 물어보세요?”
적천강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얼 말이냐.”
“아니, 그. 중단전…….”
“흰소리 그만하고 따라오기나 해라. 앞으로 저 늙은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넵.”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무슨 장강의 인어공주도 아니고, 괜히 잘못 걸렸다가 물고기들과 함께 호북까지 떠내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다음에 또 이런 모습이 눈에 띄면 아주 혼쭐을 낼 줄 알아라. 알겠느냐?”
“……아니, 저는 피해자인데 왜.”
“시끄럽다. 조금 전에도 모조리 박살을 내 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용케 참으셨네요.”
“그랬다면 배가 남아났겠느냐?”
“하긴, 무송 선배 사정도 생각해 주긴 해야죠. 쾌조선 타오를 때 표정 보셨어요?”
홱 고개를 돌린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냐? 노부가 수적 놈들 사정을 왜 생각해?”
“예?”
“여기서 또 배를 잃으면 타고 있던 놈들과 다른 배로 옮겨타야 할 테고, 무게가 늘어난 만큼 속도가 느려질 것이 아니냐.”
“……아.”
“생각을 좀 하고 말해라. 촌각이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장강을 벗어나야지. 축축하고, 흔들리고, 아주 끝이 없어.”
인성 수준 보소.
몸을 부르르 떨며 걸어가는 불 포켓몬을 바라보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죄다 불태워 버리면 육로로 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적천강은 충분히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위인이니까.
나는 뒤통수에 닿는 문경의 따끔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적천강의 뒤를 따랐다.
* * *
쾌조선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배 위로 높이 휘날리는 장강수로맹의 깃발을 본 배들은 황급히 길을 텄고, 그것은 끈끈한 유착 관계로 이어진 관부(官府)의 군함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강의 하류와 길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있는 수적들은 무송의 명령에 따라 힘차게 노를 저었으며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은 돛은 크게 부풀었다.
거칠게 움직이는 장강의 강물처럼, 그날 하루의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뱃머리에 앉아 어둠에 잠긴 장강을 바라보고 있던 문경은 또다시 찾아온 불청객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늦었군.”
“무송인지 황송인지 하는 놈이 꿍쳐 둔 술을 찾느라 시간이 걸렸지. 마지막까지 안 내놓으려고 기를 쓰더라니까.”
난간에 턱 걸터앉은 적천강이 신줏단지 모시듯 꺼낸 작은 항아리의 밀봉을 뜯었다.
동시에 퍼져 나가는 향긋한 주향(酒香)에, 무미건조하던 문경의 표정에 실금이 갔다.
“검남춘(劍南春)?”
“역시 사천 하면 검남춘이지. 이 맛에 온다니까.”
“보통 검남춘은 아닌 것 같은데.”
“그놈 말로는 제 스승이 준 거라더군. 해상왕(海上王)씩이나 되는 인간이 제자에게 평범한 술을 선물했을 리는 없고…… 덕분에 모처럼 노부의 혀가 호강하는 거지.”
항아리 채로 들어 꿀꺽꿀꺽 들이킨 적천강이 입맛을 다셨다.
“허어, 끝내주는데. 한 잔 줘?”
검남춘이 담긴 항아리를 유심히 바라보던 문경이 고개를 저었다.
“……끊은 지 오래라고 했을 텐데.”
“대답이 늦어. 고금제일의 살수라는 늙은이가 그리 속이 훤히 보여서야.”
“그 나이에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나잇값도 못 하는 늙은이보다는 낫지.”
“뭣이!”
“흰소리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어제의 방문은 예고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몇 시진 전, 적천강은 전음으로 찾아가겠노라 전했고 문경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격도 급하긴. 이것 역시 살수답지 않아.”
“살수가 아니라 의생이니까.”
“그럼 살생이라고 하든지.”
“제자나 스승이나. 언행이 똑 닮았군.”
눈살을 찌푸리는 문경을 뒤로하고 술을 들이켠 적천강이 옷소매로 입가를 훔치며 대답했다.
“언행을 닮았을지 몰라도 천지 차이지. 그 녀석은 상리(常理)를 벗어난 괴물 같은 놈이거든.”
문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고작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초절정의 벽을 넘은 것도 경악할 만한 일이거늘, 진태경은 숨을 고르기도 전에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이 언제였지?’
문경은 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보다 더 날카롭고 말이 없던 젊은 시절. 그는 오직 무(武)에 혼과 마음을 다했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정면 승부를 통해 수많은 실전으로 경험을 쌓아 올렸고 마침내 선택받은 자들만이 들어설 수 있다는 지고한 경지에 발을 디뎠다.
‘그때가 이립 중반이었지.’
고금제일의 살수라 불리며 살성(殺星)이라 불리는 그조차 서른이 넘어서야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중단전을 연 것은 그로부터 수년 후, 불혹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였다.
한데 진태경은 약관이 갓 넘은 나이로 유구한 무림 역사에 자신의 족적을 새겼다.
문경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사마외도(邪魔外道). 그중에서도 천고의 마공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대화는 길어질 것 같군.”
“아니, 짧게 끝날 걸세. 노부로서도 그다지 해 줄 말이 없으니까.”
적천강의 대답에 문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왜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언가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
“설마 검선 여동빈이 꿈에 나와 깨달음을 줬다는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리 놀랍지는 않구먼. 클클.”
“화왕!”
벼락같은 외침이 두 사람을 둘러싼 기막에 부딪쳐 웅웅 떨렸다.
그러나 문경이 순간 드러낸 노기(怒氣)는, 바로 이어진 적천강의 말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년.”
“……뭐라?”
“불과 이 년 만에 초절정의 벽을 허물고, 중단전을 열어 버린 놈이다. 노부가 여동빈이었다면 꿈이 아니라 직접 찾아왔을 거야. 하계(下界)에 엄청난 놈이 있구나, 하면서.”
문경은 첫 번째로 자신의 귀를, 두 번째로 적천강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하지만 눈앞의 자그마한 노인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로 문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의심하지 마. 그 녀석을 대할 때는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마주해. 무슨 뜻인지 알겠나?”
“……!”
“태경이. 그 아이와 검성의 제자는 말 그대로 신룡(神龍)이야. 누구도 본 적 없고,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는.”
쏴아아아.
새하얀 포말이 뱃머리에 튀었다. 문경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믿을 수 없군.”
“믿으라고 하지 않았네. 받아들이라고 했을 뿐.”
“그건, 하나같이 불가능한 일이야.”
“하릴없이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지.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어쩌지는 못한다는 거야.”
적천강은 첫 제자를 떠나보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한 청년을 진심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인 어느 날에서야, 또 다른 사실도 문득 깨달았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욱신거리던 통증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나처럼.”
난간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적천강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던 문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놈은 지금 뭘 하고 있나?”
“태경이 녀석?”
고개를 돌린 적천강은, 달빛 아래에서 껄껄 웃었다.
“아주 죽은 듯이 자고 있지.”
* * *
열화동에서의 수련은 마라톤이라면, 이번에는 단거리 계주다.
호북으로 향하는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현대와 무림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띠링.
– [로그아웃]을 완료했습니다!
나는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한국으로 향하는 전용기 내부다.
지금까지 축적된 피로로 인해 곤히 잠든 사람들, 그리고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나를 바라보는 한 몬스터가 보였다.
“뭘 봐. 인마.”
스켈레톤 킹이 대답했다.
“이런 거였군. 흠. 인간들은 모두 너처럼 죽은 듯이 자나?”
“내가 특별한 거야.”
“괴상한 게 아니고?”
뻑!
이 새끼가 꼭 매를 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