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45
#444화
제갈세가(諸葛世家).
현대의 무협 소설에서 꼭 한 번은 등장하는 네임드 가문이다.
제갈 성을 쓰는 등장인물 중에 똑똑하지 않은 놈이 없고, 눈에 띄게 강한 놈도 없다.
명색이 무림 세가면서도 무공은 부전공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도 그럴 만한 게, 제갈세가의 진정한 힘은 몸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다.
폭넓은 학문과 지략, 기관진식에 능통한 지자(智者)들의 가문.
그렇다 보니 세인들로부터는 신기제갈(神機諸葛)이라 불리며 무림에서 머리 쓰는 죄다 도맡아 하는 포지션이다.
읽고 있는 소설에 등장하는 무림맹 군사의 이름이 제갈로 시작하지 않으면 찝찝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줄곧 머릿속에 박혀 있던 제갈세가의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무인들의 모습에 낯선 기분을 느낀 것은.
하지만 꼭 낯선 감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처처척!
철탑처럼 양옆으로 도열하는 제갈세가의 무인들. 그리고 그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한 사람.
눈이 부실 만큼 흰 백의(白衣)를 걸친 호리호리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어젯밤 천문(天文)이 유난히도 밝더니, 귀한 객들이 오실 조짐이었군요. 소인은 제갈세가의 소가주…….”
나는 반가움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갈균아!”
“갈균아……가 아니라 제갈균이라 합니다.”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웬 미친놈인가, 하는 눈빛이었고 적천강은 약간의 의문을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아는 놈이냐?”
“네. 지난번 성라대연 때 만났어요. 근데 제갈세가의 소가주라는 건 처음 알았네.”
“너 같은 놈한테 친구도 있어?”
“친구 아닌데요. 저는 그냥 세 얼간이라고 부르는데…….”
“커, 커흠! 커흐흠!”
성라대연에서 만난 세 얼간이 중 하나, 신기묘룡(神奇妙龍) 제갈균이 황급히 헛기침을 내뱉으며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뭐라 할 새도 없이 적천강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무림 초출 제갈균이 노 선배님을 뵙습니다.”
제갈균을 위아래로 훑어본 적천강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공후와는 무슨 관계냐?”
“예?”
“파선지왕(芭扇知王) 제갈공후 말이다. 정마대전 당시 무림맹 총군사였던 놈.”
파선지왕 제갈공후라는 별호와 이름은 나도 들어 봤다.
정마대전 당시 무림맹의 머리 역할을 하며 암담했던 전황을 뒤집은 일등 공신.
다른 초절정 고수들과 함께 십왕(十王)으로 칭송받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양반을 놈이라고 부르네.’
나야 이런 모습을 하도 보다 보니 적응이 됐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세계다.
진위경은 침을 꿀꺽 삼켰고 제갈세가의 무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물론 우리의 화왕 적천강은 그딴 거 신경 안 쓴다. 롸끈하게 들이받아 버리는 게 열화문 종특이다.
“아, 왜 말이 없어?”
가뜩이나 인상이 나쁜데 얼굴까지 찌푸리니 흉신 악살이 따로 없었다. 나름 한가락 하는 미친놈인 재갈균도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릴 정도였다.
“즈, 증조부님 되십니다.”
“그래? 어쩐지, 좀 닮은 것도 같더라니. 머리는 잘 굴리게 생겼군. 싸가지도 없어 보이고.”
“……!”
적천강 위엄 보소.
일백 살을 훌쩍 넘긴 전전대의 인물이다 보니 어지간한 명문 대파의 존장들도 야, 너, 놈이라고 불러도 감히 뭐라 말도 못 한다.
무공으로 씹어먹고 항렬로 소화시켜 버리는, 무림의 달마대사 해골물인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위기에 내가 슬쩍 적천강의 옆구리를 찔렀다.
“거 참. 그만하세요.”
“아, 뭘? 노부가 이 정도도 말 못 하느냐?”
“아무리 그래도 이미 십 년 전에 작고한 고인이신데…….”
“이 새파란 것들이 뭘 안다고. 노부가 죽었다면 제갈공후 역시 똑같이 했을 거다. 그놈이랑 나는 오래전부터 호놈호놈 하던 사이야.”
“…….”
“…….”
호형호제도 아니고 호놈호놈은 뭐야.
신박한 단어 선택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움찔거리는 틈을 타,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진위경이 제갈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의 환대에 감사하오.”
확실히 프로는 프로다. 성라대연에서는 나사 하나 빠진 놈 같았던 제갈균도 일가의 소가주답게 응대했다.
“별말씀을. 오시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는 모르겠군요.”
“몸과 마음이 편하다면 어찌 무림인이라 할 수 있겠…….”
“더럽게 불편했다. 감히 노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 무슨 연유인지 들어 보고 별것 아닌 일이라면 아주 화염신장으로.”
“아, 진짜! 제발 좀 그만하시라니까.”
“이놈이 감히 노부의 옷소매를! 놔라! 이 힘만 무식하게 센 놈아!”
급발진한 적천강을 내가 만류하는 사이, 진위경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실례인 건 알지만, 괜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 한시라도 빨리, 빨리 가십시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본가의 초석을 쌓으신 제갈무후(諸葛武侯)께서도 학우선을 탁! 치며 동의하셨을 겁니다.”
두 소가주의 극적인 단합에 관군을 비롯한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가장 먼저 길을 텄고, 그 뒤를 우리 일행에 포함된 수룡채의 수적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쫓는 수많은 경계 어린 시선과 수군거림을 느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진위경이 호북을 거쳐야 한다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의문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오르자마자 문경이 조용히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자리가 비는 것 같습니다만.”
뭐?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제야 한 사람의 부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잠깐. 얘 어디 갔어?”
“여기요, 은인!”
“……?”
아니, 저 자식은 도대체 언제 저기로 간 거야.
아직 접지 않은 좌판 앞에서 즉석 요리된 생선찜을 처먹고 있던 청풍이 손을 번쩍 쳐들며 외쳤다.
“금방 먹고 갈게요!”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튀어와!”
제발 부탁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사람답게 살자. 사람답게.
만신창이가 된 내 마음과 함께, 마차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정돈된 가도를 달려 사라질 때까지도 사람들의 눈빛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 * *
사천성의 명문대파인 아미와 청성, 당문이 산 혹은 외진 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것과 달리, 제갈세가는 커다란 대로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장 마차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만 수백이 훌쩍 넘는 인구 밀집도.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그들은 제갈세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내 중얼거림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제갈균이 대답했다.
“장강(長江)은 호북의 젖줄과도 같습니다. 드넓은 토지를 기름지게 만드니 사람들이 모여들고, 매년 풍작이 이어지니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지요.”
“그래? 한 시진 전쯤에 나루터에서 본 사람들은 얼굴에 웃음이 영영 떠난 것 같던데.”
“그건…….”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제갈균이 시선을 피했다.
“본가에 도착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다. 성라대연 때만 해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던 녀석이 이런 모습을 보일 정도니까.
분위기가 이러니 나도 더는 묻지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이상하단 말이지.’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언제나 설렁설렁하던 관군들이 눈을 부릅뜬 채 곳곳에서 호패(戶牌)를 검사하고 있었고, 평상복으로 정체를 숨긴 무인들이 양민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언뜻 스치듯이 느껴진 그들의 무위가 결코 낮지 않았던 탓에, 순간 암천이 떠올랐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적천강의 전음으로 깨끗이 해결되었다.
– 제갈세가 놈들이다. 무슨 연유에선지 정체를 숨기고 잠행까지 하는군.
가문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나는 문득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며 물었다.
– 그런데 노야, 뭐 들으신 거 없어요?
– 뭘 말이냐?
– 아니 왜, 지난번에 제 큰형이랑 자리를 비우신 적이 있었잖아요.
– 그랬었지.
– 그때 호북성에 가야 하는 이유를 들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당이나 제갈세가에 관해서요.
나를 바라보는 적천강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 그걸 노부가 들어서 뭐 하게?
– 예?
– 가면 가는 거지. 뭘 꼬치꼬치 캐묻느냔 말이다. 그냥 최대한 빨리 가라고 닦달한 거였다. 안 그러면 쾌조선을 죄다 침몰시켜 버리겠다고.
– ……아, 예.
이걸 쿨하다고 해야 할지, 불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나는 힐끗 문경을 바라봤다.
귀찮은 내색 없이 밝게 웃으며 혁무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소년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간다.
귓가에 전해지는 은밀한 전음까지.
– 뭐.
–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쓸데없이 쳐다보지 마라. 내일 아침에 뜨는 해를 보고 싶다면.
이거 무서워서 숨이라도 제대로 쉬겠나.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마차의 격자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시대의 역사를 쓴 천하제일의 모사가 은거했던 탓에 복룡산(伏龍山)이라고도 불리는 융중산(隆中山).
그리고 드넓은 면적의 대지 위에 세워진 제갈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북성 제일의 거부라더니.’
가문의 선조인 제갈공명은 검소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그의 후손들은 타고난 좋은 머리를 학문과 기관진식에만 쏟지 않았다.
매년 풍작을 기록하는 비옥한 토지와 호북성 전역을 가로지르는 장강의 물길을 십분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것이다.
나는 제갈세가의 대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그들이 가진 부가 어느 정도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왜 안 내려? 다 도착한 거 아냐?”
제갈균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여기서 내당까지 걸어서 가려면 한참 걸리는데요? 앞으로 일곱 개의 문을 더 통과해야 하니까 그냥 앉아 계시면 됩니다.”
“……그 정도야?”
“그나마 이것도 줄인 겁니다. 본가도 정마대전을 겪으면서 피해가 상당했거든요.”
“미쳤네. 금은보화를 아주 갈퀴로 쓸어 담는구나. 검소하게 살라는 선조님의 유훈, 뭐 그런 거 없었냐? 청렴한 선비 같은 거 아니었어?”
제갈균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문 공부하는 것도 한두 푼 드는 게 아닙니다. 서책 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게다가 저희 가문은 따로 서생들도 후원하고 있다고요.”
“…….”
“여유로운 환경에서 공부해야 과거도 급제하고, 무공에 진전도 있는 겁니다. 배고프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마음만 조급해져요.”
“어, 으응.”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긴 한데, 따져보면 하나하나가 맞는 말이다.
자본의 중요성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한 제갈균은 자신의 선조인 제갈공명 역시 금수저였다는 말로 일장연설을 끝냈다.
그때쯤에는 총 여덟 개의 문을 통과한 마차가 내당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내리셔서 절 따라오십시오. 본가의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주님이라면…….”
“제 아버님이십니다.”
적천강에게 들은 적이 있다.
정마대전 도중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제갈공후가,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어린 손자에게 소가주의 지위를 내려 주었다는 이야기를.
그 어린 손자가 바로 제갈세가의 현 가주이자 제갈균의 아버지인 와룡객(臥龍客) 제갈풍이다.
“가주님. 귀빈들을 모셔왔습니다.”
웃음기를 쏙 뺀 진지한 목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