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46
#445화
드르륵.
“아.”
누군가가 작은 탄성을 흘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서고(書庫)의 웅장함도 놀라웠지만, 사람의 손길이나 공력의 움직임 없이 열린 문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껏 현대인으로 살아오며 자동문을 수만 번도 넘게 드나든 내게도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기계 장치?’
아니, 이곳은 무림이니 기관이라고 해야 하나?
막 열린 문에는 철과 목재로 만든 부품들이 복잡한 구조로 정교하게 얽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서고 곳곳에는 문에 설치된 것과 같은 기관의 흔적이 뚜렷했다.
물론 현대의 최첨단 문명에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지금껏 방문했던 여느 명문 대파에서 볼 수 없었던 광경인 것은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왜 아무도 없어?
그 흔한 시종이나 호위 무사는 물론이고, 가주라는 양반 역시 코빼기도 안 보인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에 제갈균이 크게 외쳤다.
“가주님!”
공력을 실은 외침이 서고 안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단순히 넓다기보다는 광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현대의 축구장보다 큰 공간.
끝없이 늘어선 책장들 사이로 제갈균의 외침이 파고들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야? 설마 안 계셔?”
“안에 계시긴 한 것 같은데요, 하, 미치겠네.”
제갈균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뭔가에 한번 빠져들면 자주 이러십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가주님을 찾아서…….”
서고를 둘러보던 적천강이 제갈균의 말을 끊었다.
“됐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예? 아무리 그래도 적 대협께서 오셨는데…….”
“때가 되면 알아서 나오겠지.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천강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심지어는 청풍마저도 입으로 가져가던 당과를 툭 떨어트릴 정도다.
‘꿈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적천강이 훈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노부 평생 이렇게 크고 웅장한 서고는 처음이구나. 잠시 구경을 해 봐도 되겠느냐?”
제갈균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불태워도?”
“……예?”
“농담이다, 요 녀석아. 허허, 아무리 그래도 객으로 온 입장에서 닥치는 대로 태워 버려서야 쓰나.”
껄껄 소리 내어 웃은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실수로 책장을 무너트린다면 모를까.”
그리고 다음 순간, 적천강의 신형이 빛살처럼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만근 거력이 실린 일장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장을 후려쳤다.
쾅!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메, 시벌.
쿠구구구궁.
높이만 족히 삼 장에 달할 것 같은 책장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무려 수백 개.
일정 간격으로 빽빽하게 모여 있던 수많은 책장이 하나의 거대한 도미노로 변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어, 어어, 어어어어!”
쿠웅! 쿠구구구궁!
엄청난 굉음이 제갈균의 비명을 집어삼켰다.
책장이 모조리 무너지자 오랜 세월 쌓여 있던 먼지가 일시에 날아오르며 서고 안을 자욱하게 메웠다.
아니, 이걸 더 이상 서고라고 부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책들의 무덤. 뭐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어쩌면 한 사람의 무덤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버지이!!!”
적천강이 울부짖는 제갈균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젠 네가 제갈세가의 새로운 가주다.”
“안 돼애!”
빡!
제갈균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적천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농담도 모르는 녀석이로군. 저기 멀쩡히 살아 있는 네 녀석의 아비는 보이지 않는 게냐?”
적천강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방에 자욱한 먼지구름 사이로 두어 번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호리호리한 체구의 인영 하나가 손을 휘저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거 참, 콜록. 미리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근래 들어 유난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지라. 콜록.”
“알면 됐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
퉁명스럽게 대꾸한 적천강이 소매를 떨쳤다.
파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흩어지고, 마침내 한 사람의 모습이 완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허, 널 이렇게 보니 세월이 흐르긴 했구나. 노부를 기억하느냐?”
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날은 제가 태어난 후 다섯 번째로 맞은 중추절(仲秋節)이었지요. 노선배께서는 오리구이 두 접시와 여아홍 다섯 단지를 드셨고, 자리가 파할 무렵에 팽 대협과 비무를 벌여 코피를 터트리셨습니다.”
“뭐? 그 자리에 벽력도왕 그놈도 있었나? 심지어 싸우기까지 했어?”
“예. 팽 대협께서 크게 웃으시며 탁자를 내리치시다가 노선배님의 무릎에 술을 쏟았지 뭡니까. 사소한 시비였습니다.”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대사건이었군.”
피식 웃은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네놈의 그 신통방통한 머리는 여전하구나. 알았으니 흰소리는 그만하고 이리 오거라. 네놈을 기다리는 객들이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인사를 나눌 생각이었습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음에도 감출 수 없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
지금껏 만나 본 명문 대파의 장문인 중에서도 가장 젊은 그는, 유난히도 맑고 빛나는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귀한 객들을 모셔 놓고 인사가 늦었군. 제갈풍일세.”
호북성 제일의 명문가이자 정파의 구심점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가주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담백한 첫인사.
그리고 누군가 대답할 틈도 없이 곧장 이어진 제갈풍의 뒷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문득 왜 그의 별호가 와룡객(臥龍客)인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은 금과 같은 것이라, 다른 이의 귀중한 금을 뺏을 생각은 없으니 이 자리에 있고자 하는 이들만 남아 주게. 아, 그리고 대화는 편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오랜 지론이니 혹시 모를 오해는 없길 바라고.”
무슨 소린가 했더니, 바닥에 쌓인 먼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넙죽 모로 누운 제갈풍의 모습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뭐 그러시죠. 편하고 좋네.”
내가 말과 함께 비스듬히 턱을 괴고 눕자, 그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 * *
사람들은 황당해하면서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아 제갈풍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송은 호북성 장강수로채에 가야 한다며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제갈풍의 한마디에 떼었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겠다면 굳이 막지는 않겠지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자네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네. 선화아(船火兒) 무송.”
“……!”
무송이 머뭇거리다 남은 데 비해, 정작 가장 먼저 떠날 것 같던 문경은 의외로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하긴, 지금처럼 모두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혼자 떠났다면 더 눈에 띌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제갈세가만의 정보망을 통해 이 소년 의생의 정체를 신의의 제자라고 알고 있던 제갈풍도 묘한 눈빛으로 한 차례 바라봤을 뿐, 이내 문경에게서 시선을 떼고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달포 전이었네. 서고에서 사기(史記)를 여든다섯 번째로 읽고 있던 차에 그 소식을 들었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각 성을 대표하는 맹주들.
적게는 백여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까지 뿌리를 내린 세력이다 보니, 각자 자신의 영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는 촘촘한 정보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갈세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사방(海蛇房)이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네.”
“해사방? 그게 뭐예요, 은인?”
“나도 몰라.”
어리둥절한 청풍과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특히 무송의 반응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해, 해사방이 말입니까?”
“자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 해사방이 맞네. 이 호북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어부와 수부가 모여 만든 방회 조직 말일세.”
아하, 이제 알겠다.
해사방의 이름은 처음 듣지만 어떤 성격의 조직인지는 감을 잡았다.
구태의연한 설명 다 집어치우고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직업 조합이다.
각 지역에 헌터 협회가 있는 것처럼 호북성에는 해사방이라는 이름의 어업인 조합이 존재하는, 아니,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은 적어도 무송에게 있어서만큼은 희소식이 틀림없었다. 입가에 슬쩍 떠오른 웃음이 바로 그 증거였다.
“제갈세가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본 맹에 뜻을 둔 저로서는 기쁜 소식이군요. 그간 해사방 때문에 스승님께서도 상당히 골치를 썩이셨으니 말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적어도 이곳 호북성에서만큼은 장강수로맹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으니.”
호북성 전역에는 장강의 지류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장강수로맹의 위세가 강하다고 해도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숫자가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맡은 사천의 일은 아니지만 강력한 경쟁 상대가 하나 사라졌다는 소식에, 무송은 껄껄 웃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해산되었답니까? 혹시 소금을 밀수했다거나……?”
제갈풍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만약 그랬다고 해도 해사방의 일 처리는 그리 허술하지 않고, 걸렸다면 이미 천자의 명을 받은 함대가 호북의 장강을 가득 메우고 있었겠지.”
“그럼, 내분입니까?”
“아무래도 자네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싶군.”
맑고 투명한 한 쌍의 눈동자가 무송을 응시한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향해, 제갈풍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해사방은 사라졌네.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짓밟혔단 말일세.”
“……!”
“내가 그 보고를 들은 전날 밤, 해사방주의 팔순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지. 방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흔다섯 명의 선주와 일천을 헤아리는 해사방도가 참석하여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기울이고 적벽(赤壁)의 강물에 수십 척의 놀잇배를 띄웠어.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늙은 뱃사공이 본 것은 적벽의 강물을 메운 수많은 시체와 참혹하게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었다.
해사방의 머리이자 몸통이라 할 수 있는 방주와, 수십 명의 선주를 비롯한 핵심 방도들이 모조리 적벽에 뼈를 묻은 것이다.
머리와 몸통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난 수십 년간 호북성에서 장강수로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위세를 떨치던 해사방은 그렇게 사라졌다.
“어, 어찌 그런 일이…….”
“희한한 일이군.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을 잇지 못하는 무송을, 제갈풍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벽에서의 일이 알려지자 누가 가장 먼저 움직였는지 알고 있나? 관부? 운 좋게 살아남은 해사방도들? 아니야. 바로 장강수로맹일세. 그들은 실로 기민한 속도로 해사방의 영역을 침범하고 장강을 장악했어.”
“……제갈 대협.”
무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왜 이 자리에 자신이 남았어야 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듯 보였다.
“지금 혹시 저를, 본 맹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었지. 내가 아는 동정채의 황 대협은 그렇게 우매한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우매하고 난폭한 채주들과는 다른 인물이지.”
어깨에 쌓인 먼지를 턴 제갈풍이 무송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그리 생각했네. 사흘 전, 장강수로맹을 공개적으로 지탄했던 동정어옹(洞庭漁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
사람들 사이로 동요가 퍼져 나간 그 순간, 익숙한 알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