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48
#447화
촤아아아.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쾌조선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수룡채의 수적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기계처럼 노를 저었고, 무송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분위기 한번 끝내주네.’
나는 내심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동정채로 향하는 쾌조선은 총 네 척.
하지만 선상의 분위기는 호북으로 향하던 때와는 천양지차다.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얼굴들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제갈세가. 그리고 무당파.’
호북성을 양분하는 두 명문 대파의 제자들이 네 척의 쾌조선을 가득 채웠다.
혹시 모를 유혈 사태를 대비하여 가려 뽑은 정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이 뛰어난 무인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바람이 강한 것 같구려, 제갈가주.”
노도사의 말에 제갈풍이 태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같은 바람이 분다면 오히려 일이 더욱 수월해질 테니까요.”
“어째서 그렇소? 이보다 약한 바람에도 이미 수십 척의 배가 수몰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수부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장강수로맹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쾌조선은 여타의 배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강풍에 휩쓸리기보다 힘을 받고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지요.”
“빈도 역시 쾌조선에 관한 풍월을 들은 적이 있긴 하오만…… 견문이 좁은 탓에 자세히는 모르겠구려. 일평생 무림에 몸담은 것이 허송세월처럼 느껴질 정도요.”
“진인께서는 무당파 본산에만 머무르셨으니 모르실 만도 하지요. 그런데…… 지난번 말씀하셨던 그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장문인께서 직접 본 산의 제자들과 함께 힘쓰고 계시는 중이오. 그 대신 빈둥거리며 양곡만 축내는 빈도를 이리 보내신 것이고.”
“양곡만 축내다니요. 이 후배는 현공진인(玄空眞人)께서 오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합니다.”
제갈풍의 말은 예의상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다.
현공진인.
그것이 누덕누덕 기운 도복과 낡은 송문고검(松紋古劍)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찬 노도사의 도호였다.
그리고 그가 무당파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무림의 배분은 결코 제갈풍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직 환갑도 되지 않은 제갈풍과 달리, 현공진인은 정마대전 당시에도 혁혁한 전공을 올린 전대의 고수이자 현 무당파 장문인의 사제니까.
‘게다가 무당파가 자랑하는 초절정 고수이기도 하고.’
무당파 최고의 절기, 태극혜검(太極慧劍)의 극의에 다다랐다고 알려진 검객이 바로 현공진인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풍이 다른 이들 앞에서도 말을 높이는 것 역시 그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다.
아, 물론 한 사람은 이 모든 것에서 예외다.
“많이 컸네, 저놈.”
무림의 달마대사 고인물, 적천강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얼마나 많이 컸는지 수염이 허옇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저놈 나이가 이립이었던가. 허, 참. 시간 한번 빠르다. 솜털 보송보송하던 어린 녀석들이 죄다 일파의 장문인이고 장로라니.”
“……솜털 보송보송이요? 이립이면 고추 털 수북 아닙니까?”
적천강이 쌍심지 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말꼬리를 잡는 걸 보아하니, 아래 털이 죄다 뽑히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쾌조선 갑판 위에서 화왕질리언 왁싱을 당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빛의 속도로 손을 내저은 내가 슬쩍 적천강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이렇게 된 김에 여쭤보는 건데, 춘추가 정확히 얼마나 되시는 겁니까?”
“춘추?”
평소에도 늙었다는 소리를 죽여 달라는 것과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적천강이다. 나는 떨떠름하게 단어를 고쳤다.
“……그럼, 연세?”
“연세?”
아니, 백 세가 넘었으면서 도대체 여기서 뭘 더 원하는 거야.
나는 어이없음을 한껏 담아 물었다.
“천강이, 몇 살?”
빡!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번개처럼 내 뒤통수를 후려친 적천강이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일백을 넘긴 후로 안 세 봤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나이를 셌던 게 몇 년 전인데요?”
“오천 년 전. 됐느냐?”
근처 뱃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청풍이 입을 딱 벌렸다.
“와아, 오천 살!”
“……저놈은 의심이란 걸 할 줄 모르냐?”
“……원래 그런 놈입니다. 그나저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동안이셨네요.”
적천강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냐?”
“당연히, 아니죠.”
솔직히 알고 싶긴 한데, 표정을 보니 알아서는 안 될 것 같다.
평소 나이에 민감한 건 둘째 치고, 어느 때보다 거친 물살과 바람을 타고 빠르게 나아가는 쾌조선에 타고 있다는 현실이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 염병할 나무 쪼가리는 언제쯤 멈추는 게냐?”
바로 그때.
적천강의 투덜거림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염병할 나무 쪼가리가 더욱 속력을 높였다.
콰아아아!
물줄기가 높이 솟구치며 안정적이던 선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거친 움직임에 청풍이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환호를 질렀다.
아직까지도 장강 찍먹 사건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한 혁무진과 궁기방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고, 평온하게 홀로 중심을 잡고 있던 문경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눈치껏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적천강은…….
“으허, 으허어어어어!”
화왕(火王)이라는 별호가 무색할 만한 소리를 내며 혼비백산하는 중이다.
세상에, 눈 부릅뜬 거 봐. 강남 성형외과 쌍꺼풀 수술 성공 사례로 지하철 전면 광고 실어도 되겠다.
나는 얼굴로 쏟아지는 물을 피하며 무송을 향해 외쳤다.
“선배! 속도를 좀 늦춰 주…….”
“그건 곤란할 것 같군.”
무송이 내 말을 칼같이 잘라 냈다.
장강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게, 마치 평지에서처럼 우뚝 서 있는 그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보이나?”
보이냐니. 뭘 말하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응시했다.
공력을 끌어 올려 눈에 집중하자, 비약적으로 상승한 안력(眼力)이 출렁이는 강물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 너머를 꿰뚫어 본다.
‘저건…….’
보인다.
선박 중에서도 가장 날렵한 축에 들어가는 쾌조선조차 겨우 두 척이 간신히 지나갈 법한 좁은 폭.
그리고 그 앞에서 칼날처럼 회오리치는 거센 와류(渦流)가.
콰아아아, 콰득!
어디서 떠내려온 것인지, 반경만 백여 장에 달하는 와류에 휘말린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다.
그렇게 튕겨 나간 통나무의 파편 일부는, 수문장처럼 와류 뒤에 우뚝 선 거대한 바위와 부딪쳐 산산이 조각났다.
‘바다도 아니고 강에 저런 소용돌이라니.’
신비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광경.
그리고 지금 쾌조선에 탄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은 저 엄청난 와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천령폭(天靈瀑)!”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친 한마디.
맞다. 저것이 바로 천령폭이다.
장강수로맹의 동정채를 천혜의 요새로 만들어 준 자연의 산물이자, 오랜 세월 동안 숱한 목숨과 선박을 집어삼킨 괴물.
적천강이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선언했다.
“배 돌려. 저걸 건널 바에야 정마대전을 한 번 더 치르겠다.”
이어 궁기방과 혁무진이 이미 질식한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무송 선배. 제발 살려 주십시오. 차라리 거지 소굴에서 구걸을 하겠습니다.”
“조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 이제 무림인 그만할게요. 고향 내려가서 비단 팔고 싶어요.”
“……비단보다 네 영혼이 먼저 팔린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는 나도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대한 와류를 보고 있자니, 나 스스로가 개미지옥에 빠진 한 마리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시벌, 우선 바위에 맞아서 개박살이 난 다음에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것처럼 쏙 빨려 들어갈 것 같은데.’
대자연이 주는 공포 앞에서는 시스템도, 초절정의 무공도 별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일 누군가 나를 장강 한가운데에 빠트린다면 어떻게든 헤엄쳐 나올 자신이 있지만, 저런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쓸린다면…… 그때는 정말이지 끝장이다.
“후우, 후.”
심호흡하는 내 어깨 위에 두꺼운 손 하나가 올라왔다.
“막내야.”
제법 장신인 나조차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하는 거한, 진위경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거라.”
형님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침착성이다.
물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적천강은 둘째 치고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나조차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인데, 무공으로는 한참 아랫줄인 진위경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래서 큰형이고, 소가주인 거구나.
“큰형님…….”
“그래.”
진위경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이 되어서도 우리 형제의 우애는 영원할 것이다.”
“예?”
“돌아가신 부모님이 눈앞에 어른거리는구나. 천령폭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시는 듯해.”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시지 않아요?”
“다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됐다. 그냥 죽은 셈 치자꾸나.”
큰형님은 얼어 죽을. 그냥 큰 새끼다.
그 와중에 가문 짬 때리고 도망쳤다고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까지 죽여 버리는 클라스.
‘시펄…….’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대부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대자연이 주는 비트에 몸을 맡기는 중이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무송을 바라보았다.
“저기, 무송 선배.”
“미안하지만, 멈추기에는 늦었네.”
콰아아아아! 콰드득!
“어, 시발 진짜네.”
무송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꽉 잡게. 나와 수하들 역시 최선을 다할 테니.”
“예? 애쓰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천령폭이 성마다 하나씩 있는 흔한 것인 줄 아나? 나 역시 황 숙부를 뵙기 위해 호북에 왔을 당시 서너 번 지나갔던 것이 전부야. 본 맹의 쾌조선과 지금껏 갈고닦은 솜씨를 믿는 수밖에.”
“자, 잠깐, 그러니까…… 천령폭 뉴비라 이겁니까?”
“갑자기 왜 유비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애당초 총단을 떠나 채주가 된 이후로는 사천에만 있었으니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맞는 말이다. 존나 처맞는 말.
넋이 반쯤 나가 있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아니 미친.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야 해요?”
“제갈 대협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뭐?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고개를 돌리자, 긴장으로 잔뜩 몸이 굳어 있는 양 문파의 제자들과 그 중심에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제갈풍이 솟구치는 물보라를 맞으며 껄껄 웃었다.
“지자(智者)는 아군을 이끌고, 모사(謀士)는 아군마저 속이는 법. 다 함께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어디 한번 끝장을 보세!”
“……!”
“……!”
이거 실화냐.
나를 비롯한 모두는 할 말을 잃었고, 적천강은 이성을 잃었다.
“저 개쌍노무 새끼가……!”
지금까지 봐 왔던 것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역대급 극대노.
하지만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적천강이 달려들려던 바로 그 순간.
“모두 꽉 붙잡아!”
무송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아가리를 쩍 벌린 천령폭의 와류가 쾌조선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