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55
#454화
눈을 부릅뜬 채 굳어 있던 청년, 아니 주원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라?”
이놈은 아까부터 귓구멍이 막혔나. 자꾸 했던 말을 반복하게 만드네.
입을 딱 벌린 채 나와 주원공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내리라고.”
“나, 난 주원공이다!”
“주인공이든 주원공이든. 내려.”
“네놈도 결국 대국의 백성일진대, 황상 폐하의 혈족인 내게 어찌 이리도 무례를 범할 수 있단 말이냐!”
“내 친구 중에 존슨이라고 있거든? 그 사람 있었으면 다른 걸 범했을 거야.”
“……!”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려.”
무슨 소리인지는 몰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험을 감지하는 법.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움찔거리던 주원공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에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면서도, 황족이라는 배경을 믿는지 마지막까지 엄포를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어, 무사할 것 같은데.”
“황족을 능멸하다니, 이건 역모다!”
“탈모만 아니면 돼.”
“뭐 이런 놈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천자(天子)와 같은 주씨 성에 용의 핏줄을 타고난 자.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이 황족이니까.
비록 무림과 관부가 상호불가침의 관계라는 해도 황족에 대한 무례와 위협은 중죄로 취급받는다.
괜히 아까부터 제갈세가 가솔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제 그만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나는 가솔의 속삭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요?”
“예, 예?”
“제가 뭐 했어요?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인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공격도 저쪽에서 먼저 했어요. 전 사인교에서만 내리라고 한 거고.”
“……아니, 뭐. 따지고 보면 그건 맞는데. 그래도 황족 아닙니까.”
“황족도 황족 나름이지, 팔촌이면 같은 핏줄이 아니라 그냥 피 몇 방울 떨어트린 수준 아닙니까? 당장 제가 장강에 침 좀 뱉으면 저랑 장강이랑 팔촌 정도는 될 것 같은데.”
“헉. 진 대협, 제발.”
“괜찮아요. 어차피 작게 말해서 아무도 못 들었을 테니까.”
그때, 나와 가솔이 속닥거리는 모습을 착각한 주원공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곧 황실의 십만 대군이 출동하여 네놈을 포함한 역도들의 구족(九族)을 멸할 것이니!”
“오, 버스터 콜.”
“아까부터 뭐라는 것이냐, 이 역적놈아!”
“헉!”
“히이익!”
주원공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깃들자, 양민들이 헛숨을 삼키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미 곳곳에서는 도망치는 이들까지 속출했다.
괜한 일에 연루되는 것을 피하려는 모양인데, 보는 눈이 적어지는 셈이니 내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심심하면 구족을 들이미네.’
구족 이하로는 취급을 안 해 주나?
한숨을 푹 내쉬는 내게 제갈세가의 가솔이 속삭였다.
“너무 겁먹지는 마십시오. 십만 대군 운운한 것은 허세니까요.”
“……제가 바봅니까? 그걸 믿게.”
“애초에 주 공자는 황족의 권위를 내세워 재산을 착복하다가 귀양 온 상태라, 일을 키울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사과하고 물러나시지요.”
“잠깐만. 귀양?”
“예.”
“저게?”
“황족이잖습니까. 아무리 먼 방계라고는 해도 핏줄은 무시 못 합니다. 게다가 황위 계승 서열과는 거리가 먼 방계라, 죄를 지어도 적당한 향응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지요.”
“요컨대, 하도 좆밥이라 주위에서 신경도 안 쓴다?”
“……진 대협, 제발 말씀을 좀 가려서 하십시오.”
나는 가솔의 푸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피식 웃었다.
황족씩이나 되는 놈이 왜 황궁이 아니라 호북성 대로변에서 망나니들과 친목질을 하고 있나 했더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다.
뭐, 팔촌 운운했을 때부터 짐작했던 거긴 하지만.
“우선 존귀한 이 몸을 알아보지 못한 네 놈의 그 오만한 눈깔을 파 버리고, 오체분시를 한 다음……!”
“그래. 알겠으니까 그다음은 이거나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나는 일장 연설을 쏟아내는 주원공을 향해, 품에서 꺼낸 물건을 던졌다.
동시에 가슴을 한껏 펴고 있던 놈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주저앉았다.
“암기다! 암기! 이놈이 황족을 시해하려 한다!”
“……수준 상당하네, 진짜.”
그리고 다음 순간.
주원공의 발 앞에 툭, 하고 떨어진 ‘암기’가 모두의 시선 속에서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어?”
의문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발 앞에 놓인 물건을 바라보던 주원공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어어, 어어어어!”
물음표가 느낌표로, 분노가 경악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름과 용이 음각된 상산왕 주표의 증표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주원공이 무겁게 입을 뗐다.
“내 자비를 베풀어, 그대를 용서하겠노라.”
“…….”
지랄한다.
* * *
“그래서, 동정호 가는 길이셨다고?”
“그렇다! 아니, 그렇소!”
내 부드러운 음성에 주원공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용한 청협방의 꽃 병풍들은 뒤늦게 도착한 관군들과 함께 사람들을 입단속 시키고 있었고, 기어코 만두 대량 구매에 성공한 청풍은 동정호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아, 동정호!”
비로소 이 만두 귀신의 신분을 알게 된 주원공이 불안한 눈빛으로 청풍의 허리춤에 찬 검을 힐끗거렸다.
“그, 그대가 원한다면 초대해 줄 수도 있소만…….”
내가 중얼거렸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시네.”
“착각이다! 아니, 착각이오.”
“그럼 평소에도 착각을 자주 하는 성격이신가? 조용히 지나가려는 사람도 공격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내 다시 한번 사과드리리다. 상산왕 전하의 증표를 갖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아, 증표가 없었으면 십만 대군을 끌고 와서 구족을 멸하고, 눈깔 뽑은 다음 오체분시를 했을 것이다?”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허, 허허허.”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나도 증표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주원공이 이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동물도 순종, 잡종을 따지는데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는 황족은 오죽하겠나.
같은 황실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상산왕 주표는 천자의 하나뿐인 동복동생이자, 그가 직접 임명한 유일한 번왕(藩王)이기도 하다.
선황 사후, 제위를 둘러싼 다툼에서 수많은 핏줄을 제거한 냉혹한 황제의 아픈 손가락이 바로 상산왕 주표다.
반면 주원공은 팔촌이나 떨어진 방계 황족.
직계 황족이 가진 정통성과 권위. 촌수로 따져도 주원공에게 있어 상산왕 주표는 까마득하게 높은 집안 어르신인 것이다.
‘이런 걸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하는 거지.’
오랑캐는 오랑캐로 무찌르고, 약한 천룡인은 강한 천룡인으로 무찌르는 법.
내 열렬한 팬클럽 회장이 이 정도라니,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웅장해진다.
“뭐,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동정호에는 가서 뭐 하시려고?”
“그, 그게. 날씨가 좋아서 뱃놀이를 좀…….”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에 주원공이 황급히 말을 고쳤다.
“뱃놀이 겸, 요새 호북성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고 하니 민생을 살피려고 했소.”
“……그전에 본인 인생부터 살펴야 하지 않을까. 뒷구멍으로 한 재산 빼돌리다가 귀양 오신 거라며?”
“큼, 크흠!”
“그런데 사람들을 이렇게 잔뜩 끌어모아서 뱃놀이를 가? 그것도 이 시국에?”
호북성에 눈 있고 귀 달린 이들은 최근 끊이지 않는 흉흉한 소문에 불안에 떠는데, 귀양 온 황족이란 놈은 동정호에서 초호화 뱃놀이라니.
이시국 씨가 들었으면 오함마로 골통을 깨부숴도 할 말이 없다.
‘하여간에 있는 것들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잡음 없이 마무리되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주원공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 모양이었다.
“자, 잠깐만. 어딜 가시는 거요?”
“동정호에 뱃놀이하러 가는 것보다는 바쁜 몸이라. 왜 그러시는데?”
“마음 상했다면 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소. 그런 의미에서…….”
말꼬리를 흐린 주원공이 눈짓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청협방의 무인들이 행렬 사이사이 위치한 화려한 가마를 메고 왔다.
천을 걷지도 않았는데,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파고든다.
‘이거 설마.’
옛말에 그런 속담이 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모습을 보이거라.”
주원공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마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심스럽게 가마에서 내리는 한 여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 줄기 탄성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허.”
흔히들 연예인을 두고 예쁘다, 잘생겼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은, 그런 세간의 기준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름답다.’
그래, 아마도 이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여인은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미 주원공의 속셈을 짐작했던 나조차도 감탄할 만큼.
궁기방이 황급히 침으로 세수를 하고, 혁무진이 넋을 놓을 만큼. 고기만두와 야채만두를 양손에 올려두고 고민하던 청풍이 만두를 모조리 떨어트릴 만큼 대단한 미모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충격 속에서 주원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인이 곁에 두고 있는 가기(歌妓)요. 보시다시피 그 용모는 가히 천하절색이라 부를 만하고, 음율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이 아이의 연주를 들으면 모두가 넋을 놓지.”
글쎄, 굳이 연주가 없어도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은데.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드러난 내 표정에 피식 웃은 주원공이 여인에게 말했다.
“무엇 하느냐?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소녀, 홍란(紅蘭)이라 합니다. 귀인을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오.”
“……와.”
“……이야.”
외모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곳곳에서 탄성이 튀어나온다. 정갈하게 맑으면서도 고혹적인 목소리.
홍란. 붉은 난초라는 이름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여인이다.
‘물론 실제 이름도 다르고, 평범한 가기도 아니지만.’
홍란 역시 월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생들처럼 본명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무공에 관해서는 일초 반식도 모르는 주원공과 달리, 미약하게나마 무공을 익힌 몸이기도 했다.
– 하오문?
내 전음에 가녀린 어깨가 움찔하더니, 이내 홍란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하오문이라,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개방 다음으로 많은 문도를 보유한 문파가 바로 하오문이다.
옆에 있는 주원공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지만, 다른 하오문의 기생들처럼 홍란 역시 제 한 몸을 지킬 만한 수준의 무공을 익혔다.
“자, 어떻소. 진 대협. 기회를 준다면 본 공자가 제대로 대접하리다. 물론 대협의 옆자리에는 홍란이가 앉을 것…….”
네가 이러고도 안 따라오나 보자. 득의양양하게 말하는 주원공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다. 홍란을 물끄러미 바라본 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됐고, 서로 가던 길이나 마저 갑시다.”
“그럼 다 함께 자리를 옮겨서, 응? 바, 방금 뭐라 하셨소?”
“뭘 그렇게 당황하신대. 분명히 바쁜 일이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력이 안 좋은 건가?”
“아, 아니. 그래도 홍란이가 있는데…….”
나는 손을 들어 주원공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미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바람에 시간을 소모했다. 내가 미인에 눈이 팔려 따라갈 놈이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쪽도 적당히 놀고. 집 들어가서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이만.”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몸을 돌리려던 그때, 주원공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잠깐! 그럼 이거라도.”
“……?”
“내 소문을 듣자 하니 상산왕 전하께서 진 대협에게 서명을 받았다고 들었소. 부디 내게도 같은 것을…….”
“……!”
조만간 팬카페가 잎새 2단계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