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57
#456화
“난데없이 동정호라니. 그게 무슨?”
제갈균의 의아함은 잠깐이었다. 간혹 괴짜 같은 언행을 보이기는 해도 제갈세가의 핏줄답게 두뇌만큼은 명석한 녀석이었으니까.
신기묘룡(神奇妙龍)이라는 별호는 단순히 기관진식에 조예가 깊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다.
“혹, 동정어옹을 찾으려 하십니까?”
몇 시진 전, 제갈세가에 막 도착했던 내게 사건의 정황을 모두 들은 제갈균이다. 동정어옹이 흉수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
“갑자기 이러시는 걸 보니…… 정보의 출처는 개방과 하오문이겠군요.”
“정확히는 하오문. 삼 년 전부터 동정어옹을 주시하고 있었어.”
“주시가 아니라 감시겠죠. 동정어옹과 하오문주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었다는 건 본가에서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어찌 됐건 우리에게는 잘된 일이지. 읽어 봐.”
내게서 죽간을 건네받은 제갈균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불과 촌각 만에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읽은 녀석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동정어옹이 아직 호북성에 있다?”
“하오문의 정보에 의하면 그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죽간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하오문은 동정어옹의 정확한 행적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호북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포착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나도 그건 염두에 두고 있어. 하지만 그 내용이 사실일 경우에는?”
“만약 그렇다면…….”
모두에게서 죽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던 동정어옹이 호북성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동정어옹이 정말 암천의 하수인이자 동정채를 몰살시킨 흉수 중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니, 오히려 흉수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져.”
제갈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가 암천이 아니라면 이미 동정채의 참극을 세상에 알리고, 본가와 무당파에 도움을 요청했을 테니까요.”
해사방에 이어 동정채를 비롯한 장강수로맹의 세 개 수채가 몰살당한 상황.
때마침 우리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선화아 무송과 그가 이끄는 쾌조선이 아니었다면 천령폭 너머 동정채의 참상이 알려지는 것은 한참 더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남습니다. 이건 감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시일이 더 걸릴 뿐, 결국은 밝혀질 일이었어요. 만약 암천이 작정하고 은폐하고자 했다면, 세인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더욱 조용히 처리했겠지요. 해사방의 일은 장강수로맹에게 뒤집어씌우는 방향으로요.”
맞는 말이다. 제갈세가와 무당파가 천령폭을 넘지 못했던 이유는 그만큼 튼튼한 선박과 뛰어난 수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무송과 휘하의 수룡채 수적들이 아니더라도 곧 다른 지방에서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죽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갈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겠지.”
“맞습니다. 암천은 빠져나갈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데 동정어옹이 아직도 호북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이상합니다.”
“그래, 이상해. 앞뒤가 안 맞을 만큼.”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제갈균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군요.”
“앞에 말했잖아.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라고.”
“그럼…….”
“암천은 일반의 범주에 들어가는 놈들이 아냐. 너도 하남에서 겪어 봤으니 알고 있을 텐데?”
“……!”
“우선 작은 조약돌을 던져서 이목을 끌고, 그다음으로 바위를 준비하는 놈들이다. 해사방과 수채 세 개 정도로는 안 끝나. 분명히 더 노리는 게 있어.”
암천이 지닌 힘과 과감성은 상식을 벗어난다.
이미 십왕(十王)에 속한 전대의 초절정 고수 두 사람이 죽었고, 수천에 달하는 목숨이 피를 뿌리며 스러졌다.
그리고 암천이 일으킨 이 두 번의 혈사에는 한 가지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신물(神物)…….”
제갈균의 침음성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천은 하남에서 소림사의 신물인 녹옥불장을 탈취했고, 사천을 습격하며 만독지환을 빼앗으려 했다.
다행히 사천에서의 일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놈들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명백하다.
‘신물 혹은 구파일방, 오대세가라 불리는 명문 대파의 멸문.’
그런 놈들이 생계형 방파인 해사방과 수채 세 개를 없애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차라리 해상왕이 있는 장강수로맹의 총단을 노렸다면 모를까.
제갈균이 경직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동정어옹을 비롯한 흉수들이 호북성에 남아 있을 이유도 충분하군요.”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우선 더 큰 일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목을 끌었다고 봐야지. 시간을 끈 건 이미 호북성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장막이고.”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혹시 이동진이라 불리는 그 해괴한 진법을 통해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청풍이 만두 가게를 지나쳤다고 해라.”
“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해가 확 되네요.”
나는 허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해사방과 동정채의 일은 조약돌이야. 다음은 바위다.”
호북성이라는 연못은 넓다. 조약돌이 떨어져도 파문은 얼마 가지 않아 곧 가라앉는다.
하지만 바위가 떨어진다면 물보라가 일어나고 연못 안의 물고기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연못이 피로 물들기 전에 바위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관부와 무당파에 이 사실을 알리고, 안팎으로 방비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관군들을 주의해라. 사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지?”
서천마군이 이끄는 암천의 군세는 관군으로 위장하여 당문과 아미, 청성을 휩쓸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니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제갈균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미 주의하고 있습니다. 두 번이나 같은 방법을 쓸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동정채에도 알려. 조양(棗陽) 나루터에 수룡채의 쾌조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가솔들에게 서신을 맡기면 될 거다.”
전서구를 이용한다면 좀 더 빠르고 편하겠지만, 중간에 누군가에게 탈취당할 위험도 있을뿐더러 동정채를 오가도록 훈련받은 전서구는 제갈세가에 존재하지 않았다.
‘동정채와 연락이 가능했던 다른 두 수채도 이미 몰살당했고.’
참혹한 시산혈해의 광경이 눈앞을 스치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산서에서 하남, 그리고 사천에 이어 현대에서 벌어진 쓰촨성 몬스터 웨이브까지. 이미 두 세상을 오가며 너무 많은 죽음을 지켜봤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게 제갈균이 물었다.
“지금 바로 떠나시려고요?”
“서두를수록 좋으니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우선 동정호로 가서 흔적을 찾아야지.”
“쉽지 않으실 텐데. 동정어옹은 일평생 동정호 인근에만 머물렀으니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처(秘處)를 여러 군데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열었다.
“야, 너 암천이냐?”
“예?”
“암천이냐고.”
“아, 아닌데요.”
“그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응원이나 해, 자식아.”
내 주먹을 힐끗 바라본 제갈균이 재빨리 대답했다.
“옙. 일단 본가의 정보력을 총동원하고 개방과 하오문과 협력하여 동정호 외의 다른 지역을 샅샅이 뒤져 보겠습니다.”
“잘해라. 간다.”
돌아서려던 나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빼먹었음을 깨닫고 멈칫했다.
“잠깐. 혹시 제갈세가에도 신물이 있나?”
“그럼요. 선조이신 제갈무후께서 생전에 타고 다니시던 사륜차(四輪車)와 심득을 집대성하신 병법이십사편(兵法二十四編). 그리고 백우선(白羽扇)도 있습니다.”
“……거, 많기도 하네.”
휠체어와 책, 부채가 얼마나 대단한 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확인은 해 봐야 한다.
나는 제갈균을 향해 말했다.
“잠깐 좀 보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있었는데, 이제는 없는데요.”
“……?”
“병법이십사편은 전란 중에 소실됐고, 백우선은 낡아서 바스라졌습니다. 사륜차는 한 이백 년 전쯤에 선대 가주님 중 한 분이 탔다가 부숴 먹었다고 들었는데, 성함이 기억이 안 나네요.”
“…….”
뭐여, 시벌.
암천에게 빼앗기기 전에 자체 파괴하는, 뭐 그런 큰 그림인 건가.
신물의 면면을 보면 제갈무후가 남긴 물건이라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신물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황당하긴 매한가지다.
“그래도 사륜차는 부서진 상태로 남아 있는데, 그거라도 보여 드릴까요?”
“아니, 됐어.”
단호하게 대답한 나는 전각을 나왔다. 밖에서는 다시 어둑해진 밤하늘과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네 사람인가?
“그놈, 숨 잘 붙어 있지?”
“네. 은인.”
과거 내가 사천에서 그랬듯, 지게를 짊어진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게 위에는 모든 혈도를 제압당한 채 쇠사슬에 묶인 삼괴가 있었다.
“많이 쇠약해져 있기는 한데, 틈틈이 공력으로 원기(元氣)를 북돋아 주면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충분해.”
삼괴를 데려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나 암천에 속한 놈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나 표식이 있을까 해서다.
그게 놈이 살아 있는 유일한 가치이기도 했다.
“가자, 동정호로.”
제갈세가를 빠져나온 우리는 곧게 뻗은 관도를 혜성처럼 가로질렀다.
전신을 스치는 바람에 피비린내가 섞여 드는 듯했다.
* * *
쉬이이이익!
우리는 기력을 아끼지 않고 질주했다.
나나 청풍, 궁기방에 비해 공력과 경신법이 떨어지는 혁무진이 계속해서 뒤로 쳐졌지만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업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혁무진이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
“헉, 허억. 아닙니다. 더 뛸 수 있습니다!”
“힘든 거 아니까 업히라고.”
“허억,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대태원진가의 진룡대 부대주! 본가와 조장님께 누를 끼칠 수는…….”
“그런 새끼가 은자 줍겠다고 뛰어다녔냐?”
“…….”
“뒤지기 싫으면 업혀. 아니면 버리고 간다.”
“예, 옙.”
혁무진은 상당한 체격의 소유자였지만, 나는 굉장한 근력 스탯의 소유자다. 사람 하나 들고 뛰는 건 내게 있어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적토마가 된 기분인데.’
묘한 기분을 느끼며 얼마나 달렸을까, 제갈세가를 나설 때만 해도 조금 어둑했던 하늘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관도를 오가던 사람들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진이 넘는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전력을 다해 경신법을 발휘하고 있던 궁기방이 입을 열었다.
악취와 단내를 머금은 한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무한(武漢)이군.”
무한은 호북성의 성도이자 동정호를 지척에 둔 도시였다.
하지만 최근 잇따른 흉흉한 사건들 때문인지, 불야성으로 북적일 거리는 조용했고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양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괜히 밤에 나돌아다니다가 개죽음당하기는 싫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한의 복잡한 거리를 가로지르던 그 순간이었다.
“동정호! 동정호에서 배가 침몰했다!”
“……!”
저 멀리서 터져 나온 누군가의 비명이, 깊고 어두운 적막을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