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6
#45화
서걱.
붉은 눈동자가 온순하게 깜빡인다. C급 레어 몬스터, 그 무시무시한 홉 고블린 대전사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지금껏 왜 몰랐을까.’
가벼운 의문과 함께 창날에 묻은 피를 털었다. 동시에.
쿵.
육중한 뭔가가 땅으로 떨어졌다.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대전사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팔꿈치 아래로 오른팔이 싹둑 잘려 나갔으니.
‘그래도 너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진가보법. 그래, 나는 바로 그 진가보법을 펼치며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전사가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휘둘렀지만 이미 잘려 나간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벌써 잊었냐?”
나는 대전사의 옆구리에 창날을 붙이고 동시에 위로 쳐올렸다. 공력을 머금은 창날이 딱딱한 피부와 근육을 갈라낸다.
서걱-
초록색 핏물과 함께 놈의 왼팔이 떨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양팔을 잃은 홉 고블린 대전사가 분노와 고통으로 뒤범벅된 고함을 내질렀다.
– 크아아아악!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양팔을 잃었지만 놈은 맨몸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니까.
“어. 들어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신형이 달려들었다.
캉! 캉! 캉!
역시, 이 녀석은 육체 자체가 무기다. 괴물답게 인간을 뛰어넘은 원시적인 감각과 힘을 지니고 있다.
쉭. 촤악.
갈고리발톱이 팔뚝을 스쳤다. 살점이 한 움큼 뜯겨 나가고 피가 쏟아진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정수리를 향해 내리 찍히는 발뒤꿈치를 막아 냈다.
쿵. 까드득.
내가 딛고 선 지면이 점점 꺼지기 시작한다.
엄청난 힘. 이대로는 선 채로 파묻힐지도 모른다.
‘공력이 없었다면, 말이지.’
나는 단전의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렸다. 사지백해로 흘러 들어간 힘. 서서히 올라오는 창대에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늦었어.’
처음부터 온전한 상태였다면 모를까, 이미 양팔을 잃은 홉 고블린 대전사는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 크르르.
결국 놈이 먼저 물러났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미 승부는 갈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멈추지 않고 창을 뻗어 냈다.
‘진가창법 일 초식.’
몸과 머릿속에 각인된 동작들이 빠르게 펼쳐졌다.
찌른다. 벤다. 창대로 막고 때린다. 따로 보면 단순한 동작이지만 순서와 위치에 따라 무수한 조합이 탄생한다.
그게 내가 정의 내린 무공(武功)이다.
캉! 캉!
쉭. 쉬쉬쉭!
이 초식. 삼 초식. 사 초식…….
강철만큼 단단하던 갈고리발톱이 잘려 나갔다. 한 걸음씩 물러날 때마다,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더 많은 피가 쏟아졌다.
어느 순간 홉 고블린 대전사의 등이 벽면에 닿았다.
“크르륵…….”
C급 레어 몬스터.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것 같던 이 괴물의 붉은 눈동자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가라, 이제.”
푹.
끄륵. 단말마와 함께 녹색 거체가 벽면을 타고 미끄러진다.
그리고.
띠링.
– [Lv.45 홉 고블린 대전사]를 처치했습니다!
– 레벨 업!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다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시스템이라니.’
하지만 혼란스러워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진태경 씨?”
어느새 제사장을 처리한 최 팀장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린다. 그가 나와 대전사의 시체를 번갈아 바라봤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그러게. 그거 나도 알고 싶다.
허허, 허허허.
* * *
“레어 몬스터요?”
공무원이 물고 있던 담배가 툭 떨어졌다.
천생 공무원 체질로 보이는 그로서는 영 좋은 소식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를 살펴보는 눈빛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며, 몇 급이요?”
최 팀장이 피곤한 얼굴로 제사장의 지팡이를 흔들었다.
쩔그럭.
“C급 레어, 홉 고블린 제사장.”
“C급?! 이런 씨…….”
어, 욕 아껴 둬. 하나 더 있으니까.
나는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홉 고블린 대전사의 대검을 발로 찼다. 둔탁한 소리에 공무원이 고개를 돌린다.
“그건?”
“하나 받고 하나 더. C급 레어, 홉 고블린 대전사.”
“중급 레어 몬스터가 둘? 겨우 E급 게이트에?”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 이건 뭐, 말이 되는 수준이어야지.
공무원은 한동안 우리와 장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상부에 연락하겠습니다.”
“어이, 아저씨. 잠깐만.”
어느새 정신을 차린 임꺽정이다. 내 부축을 받고 있는 그는 최소 뼈 다섯 군데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힐러 불러 줘. 예쁜 언니로.”
E급 트리오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션도 줘! 포션! 좋은 걸로다가!”
“에이 시발, 게이트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장비도 다 박살 나고, 어! 이거 다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정부 쪽에서 다 보상해 주겠지.
이 경우 게이트에서 소비된 모든 물품과 치료비 및 보상금까지 지급해 주는 법률이 버젓이 존재한다.
저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쇼인 거다.
‘쯧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 눈이 있는데.’
그때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태경 씨.”
최 팀장이다.
“뭐 하십니까?”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단검을 쥔 내 손을.
그그극.
공력이 실린 단검에 죽죽 그어진 7년 차 가죽 갑옷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
“…….”
“최 팀장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홉 고블린 대전사. 정말 강한 놈이더군요. 목숨은 건졌지만 갖고 있는 모든 장비가 망가져 버렸어요.”
“…….”
“7년 동안 절 지켜 준 갑옷, 이제는 창까지.”
“창은 멀쩡해 보이는…….”
그 순간, 나는 한쪽 발로 창의 중앙을 지그시 눌렀다.
세 자릿수 근력 스탯의 위엄에 철창이 엿가락처럼 휘어진다.
“멀쩡하다고요? 이게요?”
“…….”
최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
* * *
최 팀장은 책임자 자격으로 파견된 공무원들에게 불려 갔고, 나머지 넷은 치료를 받기 위해 앰뷸런스로 옮겨졌다.
나는 퀴퀴한 휴게실 대신 넓고 쾌적한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사, 상태창?’
반신반의하는 그 부름에, 시스템이 응답했다.
띠링.
상태창
[Lv.33 진태경]직업 : 일류 무인
명성 : 0
칭호 : 2개 (칭호 효과 적용 중)
– 초보 수련자 (수련 속도 +10%)
– 승부사 (일대일 승부 시 전투 관련 능력치 10% 향상)
근력 : 120 체력 : 125
민첩 : 121 지력 : 20
매력 : 20공력 : 15년
잔여 포인트 : 30
– 동기화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칭호와 명성에 변화가 생깁니다.
“시발. 진짜 뜨네.”
잠시 넋 놓고 상태창을 바라보던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상태창이…… 바뀌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0으로 리셋된 명성과 사라진 칭호 두 가지다. 마지막 줄을 읽어 보니 대충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무림이 아니라서?’
내가 쌓은 500의 명성은 모두 무림인으로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사라진 칭호, [명가의 자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긴, 나는 여기서 명문가 자제도 아니고, 잠룡 같은 건 더더욱 아니니까.’
굳이 칭호를 받는다면 서민층 자제나 잠룡 대신 지렁이. 뭐 그런 수준일 게 뻔하다.
“다른 건 얼마나 바뀌었을라나?”
나는 십여 분간 시스템의 모든 기능을 한 번씩 켰다 끄며 시험해 봤지만 달라진 건 상태창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긴 했다. 바로 퀘스트창이다.
띠링.
퀘스트
[배신자]당신은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본대에 합류하여 배신자가 있음을 알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십시오!
등급 : 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배신자 처단 (미완료)
전투 승리 (미완료)
보상 :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
귀중한 철궤
실패 : 사망
곽준과 암살자들을 해치우고 받은 연계 퀘스트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돌아가라는 건가? 무림으로?’
이제는 안다. 내가 겪은 무림은 환상도, 게임도 아니라는 것을. 매우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무림은 아마도…….
끼익.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최 팀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가시죠, 태경 씨.”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된 모양이다. 나는 생각을 접고 일어났다.
“다른 분들은…….”
“지금쯤이면 병원으로 가고 있을 겁니다. 일주일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해서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딱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 전투 계열 헌터의 튼튼한 신체에 포션, 치료 마법까지 받았으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됐나요?”
“며칠 내로 다시 연락이 올 겁니다. 아마 태경 씨한테도 조사관이 갈 거고요.”
조사관이라.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부류다. 하지만 내가 원한 대답은 이게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다른 건요?”
“흠.”
최 팀장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사실대로 말했을까?’
내 힘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왜 현실에서 시스템이 보이는지, 무림과의 연관성도 잘 모르는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F급 헌터가 C급 레어 몬스터를 혼자서 잡았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낭중지추. 튀어나온 송곳과는 반대되는 인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그래서 그에게 부탁했다.
‘저에 관해서는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 팀장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부탁이었을 것이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허위 진술을 하라는 소리니까.
“진태경 씨.”
“네.”
무거운 목소리에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지던 그때였다.
“밥이나 먹읍시다.”
“예?”
“보세요.”
최 팀장이 손목을 내밀었다. 번쩍거리는 마정석 전자시계는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C급 마정석을 통으로 깎아 만든 N사 제품이죠. 강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위급 시 방패로도 쓸 수 있습…….”
그쪽이었냐.
“……갑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고기나 좀 먹죠. 한우 좋아해요?”
“한우요?”
“네. 특등급.”
그리고 돈도 많은 인간이다.
“없어서 못 먹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한우다. 그것도 특등급 한우.
시스템이고 나발이고 일단 허기진 배부터 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