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68
#467화
나는 항상 일의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과정을 애써 외면하고는 한다.
꼭 모든 과정이 완벽하고 아름다울 필요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결과지. 결과.’
어, 그냥 그렇다고.
그리고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외면한 과정 뒤에, 훌륭한 결과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촤아악.
기침 소리와 함께 쩍쩍 갈라진 입술 사이로 물이 흘러넘친다.
동정어옹을 상대로 눈물겨운 희생정신을 보여 준 청풍이 오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혁무진과 궁기방. 그리고 늙은 사공과 시선을 교환한 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은 원래 그래.”
“은인도 저랑 같은 기분이었어요?”
“……물론이지.”
아직 해 본 적도 없지만, 하더라도 청풍 같은 기분은 아닐 거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슬쩍 눈을 피하며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청풍이 심호흡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모르겠어요.”
“설레서 그래. 설레서.”
“이상한 냄새도 났어요. 생선 비린내 같은.”
개코네.
나는 싸우기 전 날생선을 뜯어먹고 있던 동정어옹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착각이야.”
“속이 울렁거려요.”
“그건 호르몬이 분비돼서 그래. 입맞춤은 면역력 증진에도 좋고,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있고…….”
“네?”
“아냐. 아무것도.”
“저는 그냥, 속이 너무 메스꺼워요. 당과 먹고 싶어요.”
혁무진이 죄책감 어린 손길로 청풍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청 소협.”
“혁 무사님이요?”
“예.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 터질 만큼 먹여 드릴게요.”
“혁 무사님도 가난하시잖아요. 지난번에 나루터에서 은자 열심히 주우시던데…….”
“아버지가 부자십니다.”
나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해서 그렇지,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가업을 생각하면 혁무진도 부잣집 자식이다.
아버지 등골을 빼먹겠다는 재벌 2세의 당당한 선언에, 슬픈 눈빛으로 청풍을 바라보던 다른 두 사람도 말을 이었다.
“청 소협, 내가 구걸을 해서라도 한몫 보태겠소.”
“쇤네도 뱃삯을 조금 깎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요.”
“와아! 정말요?”
“…….”
죄책감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 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분명히 본인 선택이었어.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한 나는 동정어옹의 상태를 살폈다.
“어떻습니까?”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혁무진의 대답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해.”
“어……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동정어옹을 내려다보았다.
기이한 각도로 뒤틀린 양팔. 갈기갈기 찢긴 의복 사이로는 상처가 가득하다.
단순히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상이 이 정도고, 심각한 수준의 내상은 보너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짧게 수중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 주었다.
“혹시 몰라서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약하길래 존나 팬 다음 끌고 왔다.”
“…….”
잠깐 침묵하던 혁무진이 입을 열었다.
“아니, 동정어옹이면 엄청난 수공의 고수잖아요.”
“그래서 땅 위에서 팼어. 안에 동굴 있더라.”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굉장히 쉽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굉장히 쉽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어렵지도 않았으니까.”
“…….”
“중요한 건 숨이 붙어 있다는 거지.”
“숨이 붙어 있는 게 용해 보이네요.”
“지금까지 저 늙은이가 한 짓을 생각하면 당장 죽어도 싸.”
“그건 그렇죠. 어쨌건 다행입니다. 동정어옹도 동정어옹이지만, 암천의 다른 놈들까지 함께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건 나도 염두에 두고 있던 부분이었다.
홍란의 증언에 의하면 동정호의 참극을 일으킨 주범은 동정어옹 한 사람뿐.
그러나 동정채의 본거지에서 장강일도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학살한 것은 최소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초절정 고수가 있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경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지.’
아무리 내가 가파른 성장을 거듭했다 하더라도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한다는 건…… 글쎄.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같은 반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그 실력은 천차만별이니까.
‘동정어옹은 나보다 한 수 아래였고.’
운이 좋았다. 만약 동정어옹이 암천의 다른 강자와 함께 움직였다면 오히려 역으로 당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전에 승산이 희미한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런데 이 늙은이, 정신 차릴 때도 된 것 같은데 왜 꼼짝도 안 해? 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궁기방의 말에, 강물로 입을 헹구고 있던 청풍이 대답했다.
“점혈 당한 상태라 그래요. 맞죠, 은인?”
“어, 정확해.”
현재 동정어옹은 마혈과 아혈, 수혈이 점해진 상태다.
수혈이 풀려 강제적인 수면 상태에서 깨어난다 해도 몸이 마비된 데다 입도 벙긋할 수 없을 테니, 저항은커녕 굼벵이처럼 꿈틀거리지도 못한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목적을 달성했으니 돌아가야지.”
이곳의 위치를 아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만약 냄새를 맡은 암천이 지원 병력을 보낸다면 도리어 궁지에 처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서천마군 같은 괴물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나와 청풍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번 호북성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암천이 개입한 것은 확실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놈들의 위치와 구성원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동정어옹의 입을 열게 만든다면 놈들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치고 반격을 가할 수 있다.
화왕과 살성이라는, 희대의 초절정 고수 두 명과 명실상부한 호북성의 패자인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총력을 기울일 테니까.
“출발한다. 지금 당장.”
그러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저어, 대협.”
불쑥 입을 연 것은 늙은 사공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송구하지만, 쇤네의 짧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다요.”
“예?”
“대협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동정호의 상태가…….”
쿠구구궁, 콰앙!
사방에서 울려 퍼진 천둥소리가 늙은 사공의 뒷말을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듯 잔뜩 어깨를 움츠린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 어찌 배를 띄울 수 있겠습니까.”
“……!”
그가 지금처럼 두려움에 떠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시커멓게 물든 하늘과 드문드문 내리치는 낙뢰. 언제부터인가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에 확연히 불어난 동정호의 강물이 거센 와류를 일으키며 절벽과 바위를 후려친다.
‘하필이면 이럴 때.’
동정어옹의 비처로 들어가기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한 시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주위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가야 합니다.”
“대, 대협.”
“두려우신 건 이해합니다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셨잖습니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약간의 내상을 입었지만 나는 아직 건재하다.
거기에 더해 초절정 고수인 청풍과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인 궁기방. 유사시에 한 손 거들 수 있는 혁무진도 있다.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고 물살이 거세다고 한들, 불가능이라 단정 지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늙은 사공의 생각은 달랐다.
“쇤네가 동정호에서 노를 잡은 세월만 사십여 년입니다. 오늘처럼 대협들처럼 대단한 고수를 모신 것도 처음이지만, 지금처럼 흉악한 날씨에 배를 띄운 것도 처음이지요.”
늙은 사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목소리를 내뱉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물길 읽는 것과 노 젓는 것이 전부인,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지만 그래도 이 동정호에서 반평생을 넘게 보냈습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요.”
“이보시오, 사공.”
앞으로 나선 궁기방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공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대협들께서 고수라고 하셔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요?”
“배가 버티지 못합니다.”
“……!”
늙은 사공의 단호한 한 마디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맞다.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나룻배는 나룻배다.
동정어옹의 비처를 찾기 위해서는 선박의 무게가 가볍고 크기가 작아야 했기에 적격이었지만, 그 장점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가장 큰 단점이 되었다.
‘육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두 시진을 이동해야 하는데…… 그 전에 배가 가라앉는다면?’
스스로 던진 의문에 대한 대답은 곧장 부정으로 되돌아 왔다.
‘공력을 이용하여 등평도수(登萍渡水)를 펼친다고 해도 남은 거리가 너무 멀어. 더군다나 그건 이런 날씨가 되기 전의 상황. 사공의 말대로 배가 버티지 못한다.’
육지로 끌어 올려져 있는 나룻배의 표면. 겉으로 보기에도 뜯겨 나간 목재를 드문드문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주인처럼 나룻배 역시 조금은 낡았고, 오늘의 물살과 항해는 유독 거셌다.
‘제기랄.’
이건 사공을 설득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아직 지속 시간이 한참 남은 [수상 구조대원]의 칭호 효과나 지난번 동정호에서처럼 인벤토리를 활용한 방법을 다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도 위험도가 크다.
“조장님.”
혁무진의 말에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는 면면들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 속,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들어오는 물길은 어떻습니까?”
“예, 예?”
재차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늙은 사공을 향해, 나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나가기 힘들다면 들어오기도 힘들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 그야 물론입죠. 폭이 워낙 좁은 탓에 쇤네의 것과 같은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데다, 이런 정신 나간 물살이면 나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게 몇 배는 어렵습니다요. 애초에 이런 날씨에 동정호에 배를 띄운다는 게 미친 짓이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낫다. 혹시 모를 암천의 침입 역시 자연스럽게 막힌다는 뜻이니까.
‘우선 날씨가 가라앉을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는 게 낫겠어.’
생각을 끝마친 내가 지시를 내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둑, 투두두둑!
가까이서 시작된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
고개를 돌려 그 정체를 확인한 나와 사람들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 동정어옹의 신형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 순간에도 그의 몸에 깃든 떨림은 점점 더 빠르고, 강해지는 중이었다.
“분명히 점혈 당한 상태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청풍이 신음처럼 내뱉은 혼잣말처럼, 동정어옹의 혈을 짚은 장본인인 나 역시 도무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머리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쉭!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쏘아진 나는 쾌속하게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수혈(睡穴), 그다음은 마혈(痲穴). 마지막으로 아혈(啞穴)을 짚었다.
그리고 재차 점혈을 끝낸 다음 순간,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점혈은 풀려 있지 않았어. 이건 그저…… 동정어옹의 몸이 의지와는 별개로 반응한 거야.’
당황한 내가 멈칫하던 바로 그때였다.
덥썩!
갈 곳 잃은 내 손목을 붙잡는 누군가의 손길.
어느새 눈을 부릅뜬 동정어옹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는 동굴에서와 달리 평범한 사람의 그것이었고,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도망쳐.”
뭐?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반응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곤두선 그 순간,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과과과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