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76
#475화
변이된 수신룡.
따지고 보면 이 자식도 용은 용이다.
비록 창천을 누비지도 못하고, 여의주도 없는 걸 보면 진짜 용이라기보다는 이무기에 가까운 것 같지만.
다만 문제는…… 이 정체성 흐릿한 놈이 브레스(Breath)를 쓸 줄 안다는 거다.
그것도 존나 강한 브레스를.
콰아아아아아!
나는 입을 벌린 채 거대한 물의 구가 반경 수십여 장을 뒤덮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장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쌓이고 쌓인 지면이 단번에 절반 가까이 붕괴하는 모습도.
‘이런 미친.’
일반적인 수압(水壓)을 아득히 벗어난 힘.
저건 그저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끌어모아 일거에 쏘아 낸 것이 아니다.
변이된 수신룡이 지닌 강대한 기운이 물의 구에 깃든 이상, 이제부터는 워터 브레스라고 불러야 옳다.
‘무림에서 워터 브레스라니.’
차라리 어떤 미친 언데드 몬스터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신이라고 우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나는 경악 어린 눈빛으로 수신룡이 토해 낸 워터 브레스가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드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초토화되는 지면을 피해 어딘가로 쏘아지는 세 개의 신형도 함께.
“미미, 물공 터트리기!”
“……단단히 미친놈이로군. 나도 모르게 잠깐 살심이 들었다.”
“그게 정상이야. 노부도 지금까지 다섯 번 정도 죽이고 싶었거든.”
뿔 달린 뱀에게 진상짓을 벌이는 미친놈 하나에 회춘한 노인 하나. 그리고 이제는 더 늙어 보이기도 힘든 노인 하나.
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피했구나.’
이 정도 파괴력을 지닌 브레스에 직격당한다면 제아무리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다.
변이된 수신룡이 쏘아 보낸 워터 브레스는 그만큼 강력했고, 과거 내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었던 블랙 와이번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뭐지? 강하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광폭화의 영향인가? 아니면 이제야 내재되어 있던 모든 힘을 끌어올린 걸까?
정확히 무엇이 원인인지는 몰라도, 돌연 검은빛으로 물든 눈동자와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놈을 쓰러트리는 것이 지금의 내 목표고.
– 크르르르륵.
온통 시커멓게 물든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자신의 공격을 피한 인간들을 향해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 낸 괴물은 재차 아가리를 벌렸다.
고오오옹.
막대한 기의 흐름과 함께 놈의 주위를 맴돌던 용오름이 쩍 벌어진 아가리를 향해 빨려들 듯 솟아올랐다.
‘벌써……!’
두 번째 워터 브레스다.
현대의 대표적인 용족 몬스터인 와이번도 브레스를 이렇게 빠르게, 자주 사용하지는 못하는데 이놈은 차원이 달랐다.
나는 완성된 워터 브레스가 쏘아지기 전에, 서서히 벌어지고 있는 놈의 콧잔등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이 쩍벌충 새끼가!”
쾅!
굉음과 함께 흔들리는 거대한 대가리.
갑작스럽게 동체가 흔들리자 빠르게 완성되어 가던 물의 구가 주춤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다르다.’
온 힘을 실은 일권.
그러나 주먹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은 불과 촌각 전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변이된 수신룡에게 일어난 변화에는 브레스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강화 역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송판 열 장을 부쉈어야 하는 주먹이 다섯 장에서 멈춘 기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상황에 따라 대처도 바뀌어야 했는데, 내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 나는 놈의 비늘 사이에 쑤셔 넣어 두었던 백염을 붙잡았다.
‘인벤토리 수납. 오픈. 소환.’
스슥!
찰나의 순간, 허공에 녹아들 듯이 사라졌던 백염이 인벤토리를 거쳐 다시 내 손아귀로 소환된다.
모든 동작을 최소화한 움직임. 그건 시스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조차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숙달되기 시작한 응용법이었다.
그리고 백염의 창대가 손아귀 잡힌 그 순간, 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일격을 내리긋고 있었다.
화르륵-!
투명한 창날 위로 피어오른 청백색의 화염이 공기를 태우고 주변에 가득한 수분을 증발시킨다.
짙은 안개와도 같은 수증기를 가른 화염이 나아가는 방향의 끝에, 검은 비늘에 뒤덮인 괴물의 콧잔등이 있었다.
“아가리 닫아.”
천격(天格).
콰아아아아, 서걱!
공력을 태워 불러일으킨 강대한 화염이 비늘을 가른다. 살을 태우고, 뼈를 부수었다. 엄청난 강도를 자랑하는 피륙으로도 만년한철과 강기가 융합된 일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창날을 따라 좌우로 갈라지는 모든 것의 뒤에, 완성을 코앞에 둔 물의 구가 있었다.
‘벤다.’
수백 년간 존재했던 수신룡의 워터 브레스와, 하늘로부터 낙뢰처럼 내리꽂히는 화룡의 발톱이 만났다.
아니, 격돌했다.
고오오오옹-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붉고 푸른 섬광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 * *
그날, 정체불명의 굉음을 들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동정호에 인접한 곳에 머무르던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쿠구구구궁!
뇌성벽력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굉음에 산천초목이 허리를 숙였다.
흉흉한 분위기를 피해 칩거 중이던 양민들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렸고, 사건의 조사를 위해 동정호 인근을 배회하던 관군들은 창까지 놓치며 혼비백산했다.
나이 지긋한 늙은이들은 울음을 터트리는 손주들을 토닥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신령이시다. 신령께서 노하셔서 누군가에게 천벌을 내리신 게야.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될는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신령스러운 존재는 분명 실존했으니까.
그러나 신령으로 추앙받던 영물은 이제 추악한 악물(惡物)로 타락했고, 분노한 변이된 수신룡이 내린 천벌은 한 인간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동정호 깊숙한 어느 곳에서, 인간과 악물의 전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 크롸아아아아!
사방 천지를 울리는 고통에 찬 괴성. 아가리가 찢어진 괴물이 몸부림치며 동정호의 강물 위로 몸을 내던졌다.
콰과과과과!
검푸른 핏물과 뒤섞인 강물이 단번에 아득한 높이까지 솟구쳤다.
저 머나먼 대해(大海)에서나 볼 법한 파도가 일어나 사방을 덮치자, 괴물의 거대한 동체에 비하면 작은 점과도 같은 세 사람의 신형이 그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다.
쐐애애애액!
화살처럼 쏘아지는 세 개의 신형. 그러나 한 사람이 선택한 방향은 다른 두 사람과 정반대였다.
피하기는커녕 홀로 괴물을 향해 돌격하는 적천강의 모습에 문경이 전음을 날렸다.
– 화왕!
그러나 적천강은 대답 대신 덮쳐 오는 파도를 향해 일장을 내뻗었다.
퍼엉!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작달막한 노구(老軀)를 집어삼키려던 거대한 파도의 중심이 뻥 뚫리며 수증기가 되어 증발했다.
고통에 찬 괴물의 끊임없는 몸부림에 곧이어 몰려온 제이, 삼의 파도가 몰려왔지만, 다음 순간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촤악!
파도의 허리 부분을 정확히 끊어 낸 것은 새하얀 빛줄기였다.
이어 청풍이 흩뿌린 검기가 물보라 사이에 섞여 날아드는 자갈들을 가루로 만들자, 소검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낸 문경이 적천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못 본 사이에 수공(水功)이라도 익혔나?”
문경을 힐끗 바라본 적천강이 툭 내뱉었다.
“노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나?”
“……?”
“첫째, 물에 젖는 것. 둘째, 산에 불 지르는 것. 마지막 셋째. 물에 젖은 상태로 불타는 산을 보는 것. 이거 세 가지야.”
“그게 무슨.”
“오십 년 전쯤이었지. 근처 계곡에서 하기 싫은 목욕을 억지로 끝마치고 나왔더니 구화산이 활활 불타고 있더라고. 결국 그 천하의 호래 새끼들을 다 잡아 죽였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날 이후 구화산 깊은 산속에서 무공을 연마하던 어느 늙은이는 화왕(火王)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뭐, 그럭저럭 잘 풀려서 화왕이니 뭐니 주위에서 추켜세우긴 했지만 몇몇 정신 나간 놈들은 뒤에서 손가락질하더군. 천 명을 죽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살귀(殺鬼) 같은 늙은이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적천강의 태도에 문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게 무슨 헛소…….”
“별거 아니야. 간단히 하자면 노부는 구화산이 좋았고. 살면서 처음 생긴 내 집이라 더 좋았다는 거지. 정마대전을 통해 내 것을 건드리는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족친다는 걸 온 천하의 호래 새끼들에게 각인시켜 주었고. 그런데…….”
적천강이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몸부림치는 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저 염병할 놈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하긴, 몰랐으니까 겁대가리 없이 노부의 제자를 건드렸겠지.”
“정말이지 제멋대로군. 결국 수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염병할.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 사이에 우정 따위는 없지만, 조심하라고 말해 주고 싶군.”
“저깟 뱀장어 하나 처리하는데 수공 따위가 대수일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 족칠 것이야.”
청풍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와아. 뱀장어가 다 저렇게 커요? 정말 하나같이 오십 장쯤 되나요?”
“살심이 치미는군.”
“죽일 거면 검성에게 양해를 구하고 은밀하게 처리해. 물론 그전에 한 손 거들고.”
소검을 가볍게 고쳐잡은 문경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진태경 그 녀석이 수공을 배웠나?”
“구화산 깊은 계곡에서 놈을 수련시켰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 그렇게 헤엄 못 치는 놈은 난생처음 봤어.”
“……당장 저 괴물을 뭍으로 끄집어내야겠군.”
“동의하네. 제자를 두 번이나 잃고 싶지는 않거든.”
수중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수신룡에게 전투가 유리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또 다른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진태경이 익사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적천강과 문경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시선을 부딪친 그때, 청풍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 아닌데. 은인은 헤엄도 되게 잘 치는데요.”
“……?”
“……?”
“진짜예요. 오는 길에 은인이. 어, 그러니까…… 맞다. 자기를 아구아맨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어요.”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멈칫한 두 노고수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오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구워어어어어!
촤아아아아악!
강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괴성과 함께, 수면 위로 솟구치는 한 사람의 신형.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보라 사이로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적천강이 입을 딱 벌렸다.
“너, 너…….”
“어푸, 갖춰!”
“뭐, 뭣이라?”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출렁이는 수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동시에 지면 위로 내려선 진태경의 입에서 천둥 같은 외침이 튀어나왔다.
“공격 대형, 갖춰!”
타오르는 눈동자에 서린 것은 무인이 아닌, 능숙한 헌터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