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77
#476화
언제쯤이었더라.
이제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케케묵은 고전 무협 영화에서 그런 대사를 봤다.
무공은 오직 수직과 수평이라고. 상대와 나, 둘 중 누군가는 쓰러지고 다른 하나는 서 있는 것이 싸움의 끝이라고.
맞는 말이다. 내가 지금껏 무림에서 치른 수많은 전투의 결과 역시 항상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쓰러트리거나, 쓰러지거나.’
팔 하나를 잃으면서까지 도망친 혈주(血主)를 제외하면 결과는 늘 양자택일이었고, 쓰러지는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닌 상대였다.
하지만 변이된 수신룡에게 매달린 채로 깊은 강물에 빠졌을 때, 나는 잠시 잊고 있던 또 다른 결과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약 이놈이 도망친다면?’
사실상 수백 년간 동정호와 장강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던 녀석이다.
똥개도 제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놈이 도망치고자 마음먹는다면 나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한동안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전투가 아니라, 사냥이었어야 했어.’
이건 무인 대 무인의 생사결(生死結)이 아니다.
눈앞의 괴물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꼬박 7년 동안을 사냥꾼으로 살아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지식한 무인 흉내를 내고 있었다니. 내심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멍청한 짓거리를 했어.’
헌터와 무림인. 무림인과 헌터.
두 가지 모두 내가 지닌 정체성이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현대의 무림인이자, 무림의 헌터.
나는 어느덧 흐릿하게 지워진 경계선에서 다시금 그 사실을 되새겼다.
‘그래, 이거지.’
아주 오랜 잠에서 새롭게 깨어난 듯한 기분. 가볍게 뭍으로 착지한 나는 천둥 같은 외침을 토해 냈다.
“공격 대형, 갖춰!”
“……!”
“……!”
“……!”
한순간에 뒤바뀐 공기의 흐름에, 세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중에서도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적천강과 문경이 입을 열었다.
“오냐오냐했더니,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놈이 노부에게 말을 까?”
“화왕이 제자 교육을 개판으로 시켰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깜빡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너무 타는 바람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그나마 눈에 쌍심지를 켠 두 노인과는 달리 청풍은 열렬하게 호응해주었다.
“은인, 완전 멋있어요! 미미! 공격 대형 갖춰!”
취릭!
“노부가 천지신명께 맹세하건대, 언젠가는 반드시 저 뱀 새끼로 술을 담가 버릴…….”
적천강의 맹세는 이어지지 못했다.
출렁이는 물결 위로 어른거리던 거대한 그림자가 마침내 수면을 터트리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 크라아아아!
그 어느 때보다 흉포한 괴성이 천지를 울린다.
작은 산과 같은 거체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막강한 기운이 사방을 짓누르고, 발산된 피어(Fear)에 대기가 흔들렸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수십여 장 위, 까마득한 상공에서 우리를 굽어보는 새카만 동공이 있었다.
한 톨의 빛도 존재하지 않는 캄캄한 암흑으로 이루어진 외눈이 빛나자,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미지에 대한 공포.
나와 청풍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변이된 수신룡이 내뿜는 피어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설령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있지.’
몬스터라면 지긋지긋하게 상대해 본 베테랑 헌터. 그게 바로 나다.
썩은 살덩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달려드는 수만의 언데드 군단과도 흔들림 없이 맞서 싸웠는데, 항공모함 크기의 뱀장어쯤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두려움에 벌벌 떨 이유가 없다.
“다시 보니까 선녀 같네.”
중얼거리기 무섭게 뒤통수가 따가워진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웬 미친 소리냐 싶겠지.
하지만 방금 했던 말은 순도 100%의 진심이다.
‘놈이 강력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크 리치는 이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강했어.’
그때 스켈레톤 킹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필시 죽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살아남아 놈을 쓰러트렸다는 것이고, 아크 리치를 상대했을 당시 느꼈던 두려움은 경험이 되어 고스란히 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나는 빨리 배우는 편이지.’
좋은 경험도, 좋지 않은 경험도 피와 살이 되기 마련이다. 지난 7년간, 나는 그렇게 살아남는 법을 익혔고 승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흐읍. 크게 심호흡함과 동시에 백염의 창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곧이어 힘차게 내리찍은 창대의 끝에는 미증유의 공력이 실려 있었다.
쿠우웅-!
굉음과 함께 뻗어 나간 기의 파동이 놈이 발산하는 피어를 밀어 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창이 깨진 것처럼, 빈틈없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묵직한 중압감이 해소되었다.
“이건.”
“네 녀석…….”
적천강과 문경의 놀란 눈빛이 얼굴에 닿는다. 나는 놈을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괜히 쫄지 말 것.”
“……!”
“……!”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크고 작은 두려움을 품고 있고, 피어는 그 두려움을 자극시켜 공포를 느끼게끔 만드는 기운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지운다면 비로소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 크르르르르.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는 저 거대한 괴물이,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칠흑빛으로 번들거리는 동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둘째. 지금부터 제 지시에 따라, 저 새끼를 인정사정없이 조질 것.”
문경의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과정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결과는 제법 듣기 좋군.”
“그래서 싫으신 건 아니죠?”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제가 멍청한 질문을 했네요.”
살성(殺星). 아득한 무림의 역사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고금제일의 살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적을 제거하는 살수에게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결과뿐이다.
“노야.”
“노부가 기억하기로 저런 악물(惡物)을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우선 저놈을 끝장낸 후에 듣도록 하마.”
츠츠츠!
적천강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이어 청풍이 자줏빛 검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힐러도, 탱커도 없이 오직 딜러들로만 이루어진 극악의 조합이지만 이렇게 강력한 레이드 팀도 없을 거다.
‘초절정 고수가 자그마치 넷이라.’
별 다섯 개짜리 장수 돌침대도 울고 갈 만한 조합.
변이된 수신룡의 거체에 비하면 개미나 다름없는 존재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몸 안에는 미증유의 힘을 품은 거인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이제, 네 명의 거인은 거대한 괴물을 사냥할 것이다.
“넌 이제 뒈졌어.”
마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변이된 수신룡은 수면 아래 감춰 두었던 자신의 거대한 몸뚱어리를 일으켜 세우며 포효했다.
– 구워어어어어!
쿠르릉, 콰아아아아!
단 한 번, 포효를 내지른 것만으로 수십 개의 용오름이 솟아오르며 우리를 향해 덮쳐 온다. 그 사이로 걸레짝이 된 놈의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고오오오옹-!
처음보다 더욱 빠르고 강하게 진동하는 대기.
그러나 세 번째 워터 브레스가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내 입술 사이로 뛰쳐나온 외침이 비바람을 뚫고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산개(散開)!”
쉬쉬쉬쉬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을 점하며 각기 쏘아지는 네 개의 신형.
바야흐로, 사냥의 시간이었다.
* * *
레이드(Raid).
비현실이 현실을 침범하고, 헌터와 몬스터가 서로를 향해 죽고 죽이는 싸움을 시작하자 판타지 게임 속에서만 통용되던 이 단어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대격변으로부터 살아남은 수십억 명의 인류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또 다른 곳에서, 용을 닮은 어느 낯선 괴물을 상대로 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익숙한 얼굴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타탁, 쐐애애액!
흩날리는 돌조각을 밟으며 허공을 향해 쏘아지는 육중한 체구.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거대한 꼬리가 반쯤 무너진 절벽을 부수고 풍압을 일으킨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청년, 진태경의 눈동자가 빛났다.
‘지금 저 꼬리를 벤다면…… 아니, 아니다.’
진태경은 본능적으로 창을 휘두르려는 손을 억제했다.
그는 이번 레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변이된 수신룡의 도주를 차단하고, 최대한 뭍으로 유인한 다음 번개처럼 처치해야 한다.
그전에 맞받아쳐 타격을 입힌다면 오히려 괴물의 경각심을 깨울지도 모른다.
물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런 개썅호로……!”
말년에 겨우 얻은 제자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걸쭉한 욕설과 함께 괴물을 향해 일장을 내지르려던 적천강의 움직임은, 다음 순간 들려온 외침에 덜컥 멈췄다.
“노야!”
“……!”
화륵, 콰아아아!
황급히 선회한 열양지기가 애꿎은 지면을 불태웠다.
아주 잠깐 괴물의 칠흑빛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치더니, 이내 흉포한 맹수의 그것으로 변했다.
– 구워어어어!
후웅, 쾅!
괴성과 함께 빗자루처럼 지면을 쓸어 버리는 거대한 꼬리. 찰나의 순간 허공으로 도약하여 공격을 피한 적천강이 분통을 터트렸다.
“언제까지 물러나기만 하란 말이냐!”
꽈앙!
까마득한 상공 위, 전신으로 부딪쳐 오는 괴물의 몸통을 회피한 진태경이 대답했다.
“제가 신호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아,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똥 좀 그만 싸십쇼! 트롤 짓도 한두 번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시키는 대로 하세요!”
“……!”
적천강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몇몇 괴상한 단어가 섞인 탓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하나는 정확히 들었다.
‘똥? 노부가 똥을 싸고 있다고?’
안 그래도 얼마전까지 노환으로 벽에 똥칠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제자라고 생각한 놈이 저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적천강을 깨운 것은 이어진 진태경의 외침이었다.
“노야, 지금! 뒤로 삼십 장 후퇴! 청풍은 놈의 후방으로 이동, 문경은 측면으로!”
“네, 은인!”
“웃긴 놈이군. 뜻을 따르겠다는 거였지, 반말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아니 시벌, 소통 안 되는 원딜충 개극혐이네 진짜. 말 좀 들으라고!”
“……!”
순간 말문이 막힌 문경이 입을 꾹 다문 채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보자, 적천강의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그래, 그나마 노부한테는 노야라고 불러 주긴 하는구나.’
분명 화가 나야 정상인데, 옆집 개똥이 마냥 이름을 불리는 문경의 꼴을 보니 천강이라고 안 부른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다.
동시에 별말 없이 움직이는 문경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뭐지, 이 묘한 기분은?’
뭐랄까, 지금의 진태경은 이상할 정도로 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적천강이 느끼기에 그것은 초절정 고수가 지니는 위압감이나 풍모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마치…….
‘백전노장. 그래, 딱 그런 느낌이다.’
일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적천강으로서는 관부와 연도 없고 병졸이었던 적도 없지만, 어째서인지 막 전장에 배치된 신병이 백전노장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알 것 같았다.
“허 참, 아무리 봐도 참으로 희한한 놈…….”
“야, 적천강! 정신 안 차리냐!”
“……!”
적천강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던 그 순간, 미처 분노를 터트리기도 전에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지금, 쳐!”
쉬쉬쉬쉭!
어느덧 동정호의 물가를 벗어나 뭍에 오른 수신룡을 향해, 네 사람의 거인이 동시에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