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80
#479화
세상이 무너지고, 이내 다시금 세워진다.
흉포함이 깃든 붉은 동공과 출렁이는 강물도, 아름답게 세공된 은빛 비녀도 사라졌다. 빈자리를 메운 것은 기억 밖의 현실이었다.
솨아아악.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전신을 감쌌던 물의 장막이 흩어지고 뒤바뀐 주위의 광경이 또렷해졌다.
동시에 누군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쌓여 있던 둑이 한 번에 터진 듯, 주변의 서늘한 공기와 시스템 알림이 나를 덮쳤다.
띠링. 띠링. 띠링.
– [기억의 파편]이 해제되었습니다!
– [변이된 수신룡]이 이성을 되찾음에 따라,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 갱신된 퀘스트 정보에 따라, 임무 성공을 인정합니다!
– 돌발 퀘스트, [타락한 영물]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막대한 양의 경험치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레벨 업 알림과 함께 신비로운 힘이 지쳐 있던 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소모된 공력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홍란. 홍란이었어.’
그래, 그녀였다.
동정호의 참극으로부터 주원공과 함께 살아남은 하오문도.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경국지색의 미녀.
내 머리카락에 꽂힌 이 비녀의 주인이, 선한 이무기를 타락시켜 동정호와 장강을 피로 물들게 한 장본인이자 호북성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다.
왜 몰랐을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이었을까.
‘게이트, 마력, 홍란. 암천.’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의문과 생각들. 과부하가 걸린 두뇌가 터질 것만 같았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파르르 몸을 떨고 있던 나는, 이쪽을 향해 쏘아지는 세 사람의 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들이닥치고 있는 적천강의 일그러진 얼굴도.
“놈, 감히-!”
생각해 보면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그림이다.
나와 수신룡이 나눈 대화와 [기억의 파편]에 들어갔다 나온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이루어졌고, 멀쩡하게 서 있던 내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분노에 찬 적천강의 대갈일성에 정신이 번쩍 든 내가 벼락처럼 외쳤다.
“노야!”
“……!”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는 우리였다.
내 외침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린 적천강의 눈동자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동시에 힘차게 나아가던 주먹의 끝이 방향을 틀었다.
후웅, 콰아아!
그야말로 털끝 하나 차이였다.
아슬아슬하게 수신룡을 비껴간 권강(拳罡)이 어느새 잔잔해진 수면을 강타한다.
열양지기에 실린 열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단번에 반경 수 장의 공간에 존재하던 수분이 모조리 증발했다.
수신룡은 현재 죽음을 코앞에 둔 상태.
저런 일격을 맞았다면 마지막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네 녀석, 어째서……!”
– 제자가 걱정되었나? 좋은 스승이로군.
“흡!”
수신룡이 흘려보낸 의념(疑念)은 내게만 전해진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적천강은 짧게 헛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 쳤고, 뒤이어 도착한 문경과 청풍도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지금, 도대체 뭐였지?”
“어어, 미미도 이런 건 못 하는데.”
……취리릭.
수신룡의 깊고 맑은 눈동자에 우리의 모습이 비친다. 적천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네놈은 대관절 무엇이냐.”
– 누군가는 나를 신령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괴물이라 하더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스스로 찾아보게.
그르릉.
힘겹게 숨을 내쉰 수신룡이 의념을 이어 갔다.
–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 그대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마지막까지 추악한 악물로 남았을 터…….
또렷하게 뇌리에 울려 퍼지던 의념이 서서히 흐려진다.
어느덧 수신룡의 맑은 눈동자에서 빛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는다고? 이렇게?’
나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문경을 바라봤지만, 신의(神醫)라는 또 다른 별호를 지닌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이미 늦었다. 내가 아니라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 해도 멈출 수 없어.”
– 그대의 말이 옳네. 생과 사를 오가는 자여.
생과 사를 오가는 자.
한 사람의 정체를 정확히 꿰뚫는 한마디에, 문경의 가지런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를…… 알고 있나?”
– 비록 하늘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쌓은 몸.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 모두를 몽중(夢中)에서 보았지.
도대체 수신룡이 꾸었다는 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수신룡은 장장 오백 년을 살아온 이무기다. 힘을 다하여 죽음을 앞둔 상태라 해도, 짐작할 수 없는 깊이와 신비로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응시하듯, 우리의 어깨너머 허공을 바라보던 수신룡이 의념을 흘려보냈다.
– 아쉽게도 내게 허락된 것은 여기까지일세. 비록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지만…… 그래, 마지막 가는 길에 한 가지 선물을 남기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선물?
우리 중 누군가 의문을 표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피로 흠뻑 젖은 수신룡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무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스으으윽.
그건 은은한 빛을 뿌리는 진주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들어 올린 것처럼 수신룡의 입가를 빠져나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른 그것은 스스로 몸을 떨었다.
후우웅.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
동시에 진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 얼룩이 녹아내리듯 사라진다. 그럴 때마다 진주의 크기가 눈에 띌 만큼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단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진주가 품고 있는 기운의 크기와 깊이를 느낄 수 있었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서 정화(淨化)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련의 변화가 모두 끝났을 때.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숨길 수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아.”
스아아아.
어느덧 진주는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비록 크기는 일반적인 단환과 비슷할 만큼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불순물을 모두 정화한 기운의 결정체는 한없이 맑고 깊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정순하다.’
실로 강력한 기운의 결정체.
나를 포함한 모두가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그때.
스르륵.
천천히 허공을 유영한 기운의 결정체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동시에 수신룡의 의념이 울려 퍼졌다.
– 내 원정(元淨)일세. 인세에서는 내단이라고도 부르더군.
“……!”
– 비록 과거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나 반드시 큰 힘이 될 터. 부디 필요한 곳에 써 주게.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
떨리는 눈빛으로 기운의 결정체를 바라보던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띠링.
– [수신룡의 원정]을 획득하셨습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시스템 알림.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준 수신룡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희미한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 그래, 여기까지로군…….
그르릉.
흐릿해지는 의념과 함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마지막 숨결이 피에 젖은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모든 것이 멈추고 고요해진다.
나는 손을 뻗어 차갑게 굳어 버린 수신룡의 눈을 감겨 주었다.
‘고생했습니다.’
[기억의 파편]을 통해 수신룡의 삶을 지켜본 나다.그는 일반적인 영물이라 부를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였고, 자신을 희생하여 더욱 큰 재앙을 막은 선한 존재였다.
그러니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레벨업을 위한 희생양이 아닌, 자연스러운 죽음을.
하지만 한 사람. 아니 한 년만큼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예외다.
‘……홍란.’
나는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던 은비녀를 뽑았다.
예민한 후각으로도 간신히 알아차릴 만큼 은은한 향을 내뿜는 그것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적천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뱀 잡으러 가실래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을…… 뭐라? 뱀?”
“예. 꽃뱀이요.”
* * *
군선(軍船)의 갑판 위에서 울려 퍼진 맑은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니,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이유는 비단 웃음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눈이 달린 사내라면 배에 오르기 전부터 힐끔힐끔 쳐다보던 중이었으니까.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허어, 웃음소리조차 아름답군.”
관군 복장을 한 중년인이 한탄하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동료가 핀잔을 주었다.
“이 모습을 자네 마누라가 봤어야 했는데.”
“재수 없는 소리 집어치우게. 차라리 염라대왕이랑 눈을 마주치고 말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토끼 같은 자식 놈이 다섯이나 있으면서 이러긴가?”
“그러는 자네는?”
“난 아직 자식이 없어.”
“마누라는 있잖나.”
동료 관군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곧 없어질 거야.”
“……단단히 미쳤군. 제정신인가?”
“내가 뭐 어때서? 사내라면 한 번쯤은 노려 볼 만하지.”
“내 장담하건대,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벌써부터 초치는 건가?”
“아니. 자네보다 훨씬 더 젊고,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인간이 지금 선수를 쳤거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닌 군관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여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소저.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군선의 책임자인 송 군관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부유한 집안에 인물도 훤칠한 그다. 눈앞의 여인이 살면서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경국지색의 미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다.
‘대갓집 규수도 아니고, 기껏해야 일개 가기(歌妓)인데 뭘.’
그리고 그런 송 군관의 생각은, 다음 순간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네, 있네요. 아주 즐거운 일이.”
영혼이 정화되는 것처럼 깨끗한 목소리. 수국(水菊)이 만개한 듯한 웃음.
그녀에게선 요염하면서도 청초하고, 청초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흘러나온다.
송 군관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렇습니까.”
그런 송 군관의 모습에 여인, 홍란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에 쉴 틈 없이 곁눈질하던 주위의 관군들이 애끓는 신음을 흘렸다.
‘저놈들이 감히.’
수하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 송 군관은 쿵쿵 뛰는 가슴을 안고 입을 열었다.
“아쉽군요. 소저와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터인데…….”
의도적으로 흐리는 말꼬리에 홍란이 싱긋 웃었다.
“글쎄요. 소녀가 괜한 말로 우리 송 군관님의 마음을 어지럽힐 것 같아 조심스럽네요.”
우리? 송 군관님?
틀림없다. 이건 호감이 있는 남녀 관계에서나 보인다는 녹광(綠光)이다.
용기백배한 송 군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선조의 명예를 걸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머, 용맹하기도 하셔라. 그럼 특별히 송 군관님께만 알려 드릴게요. 잠시 귀 좀…….”
“네, 넵!”
송 군관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홍란을 향해 귀를 내민 다음 순간, 달콤하면서도 따뜻한 숨결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실은, 소녀가 동정호에 사는 이무기를 이용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거든요.”
“예?”
“그런데 그 이무기가 방금 죽어 버렸지 뭐예요. 그 사실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즐겁네요.”
천천히 고개를 든 송 군관이 멍한 표정으로 홍란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이 여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소저, 그게 무슨…….”
“들으신 그대로예요. 송 군관님은 절 이해하실 거라 믿어요.”
어째서일까. 나른하게 들리는 홍란의 목소리에 송 군관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그건 단순히 여인의 향한 사내의 연심이 아니었다. 거부할 수도 없는 이끌림이었고, 한 사람의 감정과 영혼을 사로잡는 쇠사슬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죠, 송 군관님?”
“……물론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잘됐네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송 군관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홍란은 넓게 펼쳐진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포로가 된 사내에게 부탁을, 아니 첫 명령을 내렸다.
“우리, 목적지를 바꿀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