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84
#483화
“남천……마후?”
젊은 군관의 몸을 빌린 홍란, 아니 남천마후(南天魔后)가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 별호,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낯부끄럽네.”
“낯부끄럽기는 시발. 동서남북으로 개지랄을 하고 자빠졌네. 그래서 동쪽은 동정모쏠이고 북쪽은 북괴김씨냐?”
“별호는 달라도 얼추 비슷하게 맞췄어. 생각했던 것보다는 똑똑한데?”
“……젠장.”
서천마군, 그리고 남천마후.
이 정도면 각각 동서남북을 염두에 두고 지은 별호라는 건 미미쨩도 알겠다.
서천마군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끝에 겨우 잡은 괴물인데, 그런 연놈들이 최소 셋이나 더 있다니.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문이 남았다.
나는 넋 나간 표정의 군관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한 거지?”
“어머, 우리 어린 대협께서 뭐가 그리 궁금하실까.”
“알잖아. 뭘 말하는지.”
맥없이 풀려 있는 군관의 눈동자에 문득 기광(奇光)이 스쳤다.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천마후가 한 마디를 툭, 하고 내뱉었다.
“너, 봤구나?”
“……!”
“고작 이틀 만에 찾아냈을 리는 없을 테고, 역시 영물은 영물이라 이건가. 하긴, 오백 년 묵은 이무기라면 확실히 신령스러운 존재긴 하지.”
단숨에 모든 것을 파악한 남천마후가 매끄럽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럼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직도 생생하다. 기억의 파편을 통해 엿보았던 게이트(Gate)의 흔적.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마기에 물드는 수신룡의 모습이.
그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곳, 무림에서만큼은 나타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현상.
그러나 남천마후는, 암천은 불가능을 현실로 끌어 올렸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을 지경이다.
“도대체, 너희들의 목적이 뭐지?”
“목적?”
다음 순간, 군관의 입술 사이로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꾸며내지 않은 즐거움이 담긴 웃음소리.
한바탕 소리 내어 웃던 남천마후가 말을 이었다.
“아이야. 나 역시 명에 따라 움직이는 하찮은 종일뿐. 그 누구라 해도 그분의 뜻을 짐작할 수는 없단다.”
그분. 이 두 글자가 누굴 가리키는 것인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다.
적천강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주(天主).”
으드득.
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삐걱거리는 목각 인형처럼 돌아간 고개가 적천강을 향했다.
“구화산에 미친 노괴(老怪)가 산다는 말은 들었지. 화왕 적천강, 그대의 말이 맞아. 바로 그분이시지. 누구보다 위대하고 고귀하신…….”
“산 채로 태워 죽여도 시원찮을 개호로 새끼겠지. 감히 뉘 앞에서 함부로 요설(妖舌)을 놀리느냐.”
차가운 불길이 담긴 적천강의 말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내 굳게 닫혀 있던 군관의 입술이 스르륵 열리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텐데? 당신의 질긴 명줄을 좀 더 오래 붙들고 싶다면.”
“내 명줄?”
적천강이 코웃음 치며 내게 물었다.
“네 녀석이 말해 보거라. 노부 명줄 끊겠다고 달려든 놈들이 어찌 되었는지.”
“뒈졌죠. 한 놈도 빠짐없이.”
“하면 지금껏 노부가 써 내려간 살생부에 놈이 아니라 년을 포함시킬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두말할 것도 없이 찬성이다. 나는 엄지를 번쩍 치켜세웠다.
“이 시대의 진정한 페미니스트십니다.”
“패미비수타? 그게 뭐냐?”
“공정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평등하게 조지시는.”
“요새 젊은 놈들이 쓰는 말인가? 어찌 되었건 의미는 마음에 드는구나.”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적천강이 군관의 몸에 깃든 남천마후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들었느냐? 패미비수타인 노부가 네년과 천주인지 뭐시긴지 하는 놈을 치죄할 터이니, 그때까지 목닦고 기다리거라.”
어. 멸염신권이 페미권이 되기 전에 지금이라도 말려야 되나.
하지만 덕분에 속은 뻥 뚫렸다. 복잡하던 머릿속도 깨끗하게 정리된 기분이다.
‘그래, 시벌. 죄다 족치면 그만이지.’
어차피 열화문의 모토가 그거 아닌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닥치는 대로 깨고, 부수고, 태워 버리는 거.
어차피 남천마후는 내 의문에 대한 답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천이 무슨 짓을 벌이든, 철저하게 깨부수며 나아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선택권은 없으니까.’
기호지세(騎虎之勢). 애당초 난폭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이상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등에서 나가떨어지는 대신, 호랑이의 골통을 박살 내서라도 이 미친 몸부림을 끝낼 거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후우…….”
참았던 숨을 내뱉은 나는 군관을 향해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눈동자 너머, 머나먼 어딘가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만나면…… 넌 반드시 죽어.”
군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 나도 그날이 기다려지는구나. 그리고 그때가 오면 이 자리의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겠지.”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 초점이 잡히지 않는 희뿌연 눈동자가 방 안의 모두를 차례차례 응시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소름 끼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문경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덧없는 살생(殺生)을 멈추는 게 좋을 겁니다. 칼날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이니.”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한 예의 바른 어조와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칼날이 숨어 있다.
그것이 오직 피로 물든 길을 걸어온 고금제일의 살수. 살성(殺星)이라는 지고한 무인이 지닌 진면목이었다.
“……묘한 아이로구나. 신의라는 자가 궁금해질 만큼.”
그러나 다른 이의 몸을 빌린 남천마후는 문경의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의의 제자라는 표면적인 신분은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자그마치 사십 년 전 사라진 살성과 어린 의생을 연결하기에는 그 고리가 너무나도 희미했으니까.
그리고 문경에 대한 남천마후의 의심이 깊어지기도 전에, 진위경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원진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당신은 우리 막내를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거요.”
“태원진가라. 그 알량한 가문과 하찮은 무공으로 저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시궁창 쥐도 제 새끼를 위해서라면 호랑이와도 맞서 싸우는 법. 궁금하다면 오시구려. 직접 보여 드리는 수밖에.”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기이한 현상에도 진위경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가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궁기방이 떡 진 머리를 긁적였다.
“진 대협, 본 방을 빼놓으시면 섭섭합니다.”
“개방을 깜빡했군. 함께하겠나?”
“제 스승님이 그러셨습니다. 개 몽둥이 하나로는 동네 똥개밖에 못 잡지만, 백 개가 모이면 호랑이도 때려잡는다고. 하물며 십만의 거지들이 모인다면 어떻겠습니까?”
개방의 진정한 힘은 바로 압도적인 머릿수에서 나온다.
뭉뚱그려 십만 개방도라 칭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
그들의 정점으로부터 한 걸음을 남겨둔 후개(後丐), 궁기방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참 아리따운 처자였는데 이렇게 되어 안타깝구려. 하지만 어쩌겠소. 내가 몽둥이로 그 고운 얼굴을 후려갈겨도 너무 원망 마시오.”
“원망?”
군관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솟구쳤다.
피부가 찢어질 듯 기괴한 웃음을 짓는 그의 입을 빌린 남천마후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지금처럼 안달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서서히 꺼져 가는 모닥불처럼 사그라지는 목소리.
어느새 군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물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후우웅.
순식간에 단전으로부터 솟구친 공력이 그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지만, 이미 시작된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다.
쓸모없어진 물건은 버려지는 법.
어쩌면 남천마후가 군관을 살려 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시 몸을 빌릴 꼭두각시.’
울컥. 주르륵.
입뿐만이 아니다.
눈, 코, 귀…… 이른바 칠공(七空)이라 불리는 인체의 구멍으로부터 검붉은 핏물이 펑펑 쏟아졌다.
수 갑자의 공력이나 점혈로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이 군관의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늦었습니다.”
문경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 그 순간.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흥건한 핏물과 함께 마지막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스륵. 툭.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든 생명력을 소진한 군관의 고개가 축 늘어지며 숨이 멎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침묵이 내려앉은 그때, 장원을 향해 다가오던 기척이 문 앞에서 멈췄다.
“저어, 들어가도 될까요?”
귀에 익은 목소리.
이윽고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 틈새로 빼꼼 고개를 내민 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은인, 제갈퐁 대협께서 찾으시는데요.”
“제갈퐁이 아니라 제갈풍.”
“네. 제갈퐁 대협이요.”
“……말을 말아야지.”
한숨을 내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와룡객 제갈풍이 어디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를 왜 찾는 건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그 장소’를 알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그래서, 찾았어?”
“네.”
청풍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은인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곳이 맞아요.”
그곳이란 수신룡의 기억 속에 있던 바로 그 장소.
그래, 빌어먹을 게이트(Gate)다.
* * *
홍란, 아니 남천마후는 감았던 눈을 떴다.
잘게 흔들리는 사두마차의 비단을 걷어 올리자, 격자 창문 밖으로 울창한 풀숲이 보였다. 습하고 무더운 남방의 날씨에 땀을 흘리는 표국의 인원들도.
“흐음.”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는 남천마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때, 홀린 듯이 힐끔거리는 표국 사내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불호령이 떨어졌다.
“모두 한눈팔지 말고 운송에 집중해라! 며칠 후에 만나게 될 묘족(苗族)들에게 뒈지기 싫으면!”
걸쭉한 말과는 달리 목소리의 주인은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햇빛을 피하고자 푹 눌러쓴 죽립 아래로 쭉 뻗은 콧날은 칼날 같았고,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보기 좋았다.
‘여 표사? 흔치 않은데.’
거친 사내들을 한참이나 윽박지르던 여 표사가 남천마후의 시선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고삐를 늦추고 마차 옆에 붙은 그녀가 창문 너머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혹시 문제가 있으신가요?”
“문제는요. 고생해 주신 덕분에 편히 가고 있는걸요.”
“그럼 어찌하여 저를 그리…….”
“그냥요.”
“네?”
남천마후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참 어리고 예뻐서. 그래서 보고 있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중소 표국의 소국주인 여 표사는 당황했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숨겼다.
칭찬해 주는 상대가 여자도 반할 만큼의 미녀인 건 둘째 치고서라도, 상당한 재물을 지불한 승객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한마디에는, 여 표사도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탐이 나네요. 제 얼굴에 가져다 붙이고 싶을 만큼.”
“……!”
“농담이에요. 농담.”
까르르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얼어붙은 여 표사를 향해, 남천마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운남(雲南)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지금 이 순간, 남천마후는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머지않아 또 다른 장소에서 들려올 비명과 죽음에.
그리고 새로운 얼굴을 만났다는 기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