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86
#485화
쿵. 쿵.
몸 안에서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린다.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모래를 한 움큼 넣고 씹은 것처럼 입안이 까끌거렸고, 나도 모르게 크게 뜨인 눈동자는 뻑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이 절벽의 틈새에 닿은 그 순간. 나는 이 불길함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삐빅.
– 해당 게이트는 이미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 게이트의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 [게이트 공략] 퀘스트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알림과 눈앞을 가득 메운 홀로그램 창,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
그 모든 것들의 앞에서, 나는 천천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씨발.”
콰드득.
나도 모르는 사이 힘이 들어간 손아귀가 절벽을 파고든다.
절벽의 틈새, 아니 게이트로부터 흘러나오는 아주 미약한 마기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마지막까지 아니길 바랐는데.’
빌어먹을 게이트. 정말 게이트였다니.
도대체, 어떻게, 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 *
머릿속이 복잡하다. [기억의 파편]을 통해 보았을 때부터 설마 하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믿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림에, 그것도 게이트라니.’
이건 거대한 균열이다. 이 세계를 둘러싼 법칙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고, 재앙의 첫걸음이었다.
‘암천(暗天).’
놈들의 정체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것이었다.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진 채로 검게 물든 동정호의 강물을 바라보던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강물을 향해 던졌다.
퐁당.
‘소림에서 벌어진 혈사는 사천으로 이어졌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지난 몇 달의 시간은 그야말로 시산혈해(尸山血海)의 연속이었다.
하남에서 성라대연이 벌어지는 와중에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이 습격당했고, 암천이라는 불길은 사천으로 번졌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혈주, 서천마군, 그리고 이동진의 존재.’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죽음을 담보로 한 적천강의 화신귀무(火神鬼舞)에 당하고도 회복하던 혈주의 모습이.
‘아니, 그건 회복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지.’
맞다. 당시 혈주가 보여 주었던 능력은 회복이 아닌 재생에 가까웠다.
시간을 역행한 것처럼 돋아나던 새 살과 제 자리를 찾는 뼈마디. 잿더미처럼 새카맣게 타들어 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재생되던 모습.
그리고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렸었다.
‘트롤(Troll). 그래, 마치 트롤 같았어.’
아니면 포션이거나……. 젠장, 트롤에 포션이라니. 내가 떠올린 거지만 미친 생각이다.
더 미칠 것 같은 건 그게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거고.
재차 돌멩이를 집어 든 나는 더 멀리 날려보냈다.
퐁당.
혈주가 보여 준 기이한 현상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검성의 등장과 함께 수세에 몰리자 천주를 부르짖으며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당시에는 모두가 사마외도의 괴공절학 중 하나라고 단정 지었으나, 게이트라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은 달랐다.
‘텔레포트(Teleport).’
비록 내가 매직 존슨을 통해 경험했던 텔레포트와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지만 그게 텔레포트가 아니면 혁무진 손에 장을 지진다.
‘다시 생각해 보면 서천마군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
사천혈사 당시 서천마군은 독왕을 처치하는 대가로 한쪽 팔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정작 사천당문의 지하 뇌옥에서 대면했을 때, 놈은 새로운 팔을 얻은 상태였다.
그리고 아무리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봐도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딱 두 가지밖에 없다.
서천마군의 정체가 생체 프라모델이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했거나.
당연하게도 전자일 가능성은 없다. 물론, 나로서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동진의 존재도 마찬가지.’
이동진. 수백에 달하는 암천의 흑의인을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신묘한 진법.
마교의 후신이라 불리는 암천이니, 마교에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오십여 년 전에 써먹고도 남았을 거다.
그랬다면 정마대전은 마교의 승리로 막을 내렸을 테고, 나도 태원진가가 아니라 흑룡방, 뭐 그런 흑도 문파의 삼공자가 되었겠지.
‘왜 몰랐을까.’
무림이라는 세상에서 유일한 이방인이었던 나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실체.
드문드문 머릿속에 스쳤던 한 줄기 의심은 천년마도의 괴공절학이라는 말에 묻혔고, 서천마군이 괴력난신(怪力亂神)라 부르는 힘에 의해 지워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게이트의 존재를 확인했고, 어느덧 내게도 익숙해진 무림의 상식과 법칙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림인들이 괴공절학과 괴력난신이라 부르는 암천의 기이한 능력을 단 두 글자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도.
‘마법.’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한 단어에, 눈앞이 밝아지고 뜨겁게 달궈졌던 이마가 차갑게 식는다.
더불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한 존재를 뜻하는 말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천주(天主).”
암천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
혈주와 서천마군, 남천마후와 같은 이들이 스스로 하찮은 종이라 칭할 만큼 압도적인 존재.
‘도대체, 네 정체는 뭐냐.’
천주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다.
만약, 아주 만약에 천주라는 놈이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의식중에 떠올린 바로 그 존재라면…….
풍덩!
“……!”
높이 솟구치는 물보라와 출렁이는 강물.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다가왔는지조차 모를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뭘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퉁명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자글자글한 얼굴 주름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우려와 걱정이다.
그런 적천강의 모습에 피식 실소를 흘린 내가 입을 열었다.
“깜짝 놀랐네. 뭡니까?”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적천강이 대답했다.
“그냥 하도 안 보이길래 와 봤다.”
“올 거면 조용히 오시지. 난데없이 바위를 던지시네.”
“일곱 살 난 어린애마냥 돌멩이나 깔짝깔짝 던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그랬다. 불만 있느냐?”
“있으면요?”
후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자, 심상치 않은 파공성이 머리카락을 스치며 허공을 강타한다.
뒤통수 어택에 실패한 적천강이 입맛을 다셨다.
“눈치 하나는 기똥찬 놈이로고.”
“이런 거 한두 번 합니까. 이제는 눈 감고도 피하죠.”
“감아 봐.”
“……싫은데요.”
“건방진 녀석 같으니. 한데 그런 놈이 아까는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느냐? 무림에서 그러고 있다가는 골로 가기 딱 좋다.”
“그래서, 저를 골로 보내시려고요?”
“오냐. 네 녀석이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그럼 제자를 다시 찾으셔야 할 텐데요. 아, 제자가 아니라서 별 상관없나?”
“커흠. 커흐흐흠!”
나오지도 않은 헛기침을 억지로 뱉어 내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서, 머리에 똥만 차 있는 놈이 뭐가 그리 고민이냐?”
“똥 어디서 쌀까 고민했는데요.”
빡!
아, 이번에는 못 피했다. 금나수까지 써 가며 기어코 뒤통수를 후려치는 데 성공한 적천강이 눈을 치켜떴다.
“피똥 싸고 싶으냐?”
“어후, 왜요. 머릿속에 똥만 차 있는 놈이 똥 생각했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주둥이와 궁둥이 위치를 바꿔 놓기 전에 성심성의껏 대답해라.”
“아, 예.”
얼얼한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제가 원래 있던 세상에 존재하는 나쁜 힘이 암천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이번에 미쳐 날뛴 이무기 있죠? 그게 다 그놈들 짓이에요. 절벽에 있는 균열은 게이트라는 건데, 그게 제대로 터지면 막, 어? 괴물이 아주 그냥 쏟아져 나옵니다.”
“…….”
“그때가 되면 전부 끝장이에요, 끝장. 그리고 아마 아니겠지만 마왕 아스모데우스라는 놈이 있거든요. 만약 그놈이 아직 살아서 무림을 노리는 거면 진짜 전부 좆 되는…….”
“알겠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도 않을 허무맹랑한 이야기. 대놓고 속 시원하게 떠들어 대던 나는 적천강의 반응에 이어지려던 말을 삼켰다.
“예?”
“알겠다고 했다.”
“…….”
“네 녀석이 한 말. 모두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더 말할 필요 없느니라.”
아니, 이거 반응 왜 이래.
당황스럽다 못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동시에 말로 형용키 어려운 어떤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불쑥 솟구쳤다.
‘믿어 준다고?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니, 나를?’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적천강의 눈빛에,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고 목이 콱 막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일 년 남짓한 시간.
누구보다 많은 일을 겪으며 동고동락했던 노인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절대적인 신뢰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였다.
‘……그만큼 믿고 있었구나. 나를.’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을 때. 나조차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때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 말을 해야 할 때라는 걸.
“노야. 아니…….”
오랜 망설임 끝에 꺼낸 한마디.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연 나를 향해, 적천강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었다. 죽고 싶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구나.”
“스, 예?”
“예는 무슨 개 같은 놈의 예.”
빠바박!
뭐여, 시벌.
갑자기 찾아온 뇌정지 타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뒤통수를 감싸 안은 내게,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노부가 머저리로 보이느냐? 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이세계에서 양민이었던 내가 무림에서는 초절정 고수. 뭐 그런 거냐!”
“제목 생각보다 트렌디하고 괜찮은,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이미 들었다. 유언.”
“어어, 어. 잠깐만!”
“잠깐만? 그렇게 맞아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반말을 쓰다니, 이런 개호로……!”
퍼버버버벅!
눈앞을 가득 메운 수십여 개의 장영(掌影)이 전신을 두드린다.
몸 안을 파고드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스승님은 무슨. 시부럴.’
잠시나마 감동에 젖었던 내가 병신이다.
* * *
“다음에 또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다가는 반으로 찢어 죽인다. 알겠느냐?”
적천강의 살벌한 살인 예고에, 일각이나 무차별 폭행당한 진태경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우, 잠깐만요. 저 지금 진짜 죽을 것 같은데요.”
“시끄럽다. 노부의 조모보다 느려 터진 놈 같으니!”
“……저기, 노야.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혹시 소피 보러 가실 때 몰래 스마트폰 꺼내서 쓰시는 건 아니죠?”
빡!
또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진태경에게 마지막 일격을 먹인 적천강은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분위기에 사람들이 헛숨을 삼키며 길을 비켰다.
저벅, 저벅.
어디론가 향하는 발걸음.
어느덧 혼자가 된 적천강의 얼굴 위에는,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놈. 그런 알 수 없는 소리나 해 대다니.’
하지만 글쎄, 모르겠다. 일평생 소문이나 미신을 쥐똥만큼도 믿지 않았던 적천강이었지만, 진태경이 하는 말이라면 달랐다.
그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녀석은 자신에게 있어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스, 뭐라고 하려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아니, 아니겠지.
한숨을 내쉰 적천강은 절벽 위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휘영청한 달빛 아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신과 같은 처지인 한 사람이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적천강이 건넨 한마디에, 문경이 대답했다.
“싫다, 꺼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