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88
#487화
게이트의 존재를 확인한 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나지만, 적천강의 도움으로 깔끔하게 지워 낼 수 있었다.
“…….”
아니다. 도움은 니기럴 거. 얼마나 꼼꼼하게 때렸는지 뼈마디가 쑤실 지경이다.
뒤늦게 만난 혁무진은 끙끙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이야, 역시 조장님! 그렇게 맞고도 일어나시는군요!”
“무진아.”
“네?”
“좋게 말할 때 엄지 집어넣으렴. 주먹으로 정수리 내려찍어서 엄지 공주 만들기 전에.”
내 근력이면 압축 프레스 쌉가능.
엄지 공주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흉흉한 분위기만큼은 제대로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치켜세웠던 엄지를 잽싸게 회수한 혁무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맨날 나한테만 난리야. 확 그냥 부상으로 쭉 누워 있었으면…….”
“무진아, 뭐라고?”
“조장님께서 무림의 신성으로 급부상! 하셨다는 이야깁니다!”
“…….”
혼이 담긴 구라 보소.
이 정도면 임기응변을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득 애잔해진 나는 혁무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너도 힘내라. 이번 일로 급부상했던데.”
“예? 제가요?”
“응. 오는 길에 저잣거리에서 들었어.”
혁무진 저 녀석이 여기서나 푸대접이지, 태원진가의 북부 고원 평정을 통해 쾌풍검(快風劍)이라는 그럴듯한 별호까지 얻은 무인이다.
게다가 나 같은 우량주와 항상 붙어 다니니 자연스럽게 주가 상승의 길에 접어들 수밖에.
“양민들 대화 들어 보면 거의 뭐, 역전의 용사더라고.”
“큼, 그렇습니까?”
“어. 최소 초절정 고수야. 이 정도면 완전 급부상 아니냐.”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좋아하던 혁무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뭐냐, 그 불손한 눈빛은?”
“급부상했다면서 때린 다음 급 부상당했다. 뭐 그러실 것 같아서요.”
“……아니, 미친놈아.”
괜찮은 시나리오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이미지가 이 정도였나?
‘생각해 보면 그간 많이 때리긴 했지.’
갑자기 동정심이 든다. 얼마나 맞았으면 이 정도 피해의식에 갇혀 있을까.
애잔한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냐. 저잣거리에서 직접 들었다니까.”
“진짜요? 다 걸고?”
“네 불알 두 쪽 건다.”
“오. 진짠가 보네요. 드디어 태원진가가 낳은 풍운아, 쾌풍검 혁무진의 명성이 천하 무림에 울려 퍼지…….”
히죽히죽 웃던 혁무진이 멈칫했다.
“아니, 잠깐만요. 뭔가 이상한데.”
“뭐가?”
“그렇잖아요. 왜 조장님께서 제 불알을 겁니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네 불알이니까.”
“예? 그게 왜 당연해요?”
“네가 혁무진이니까.”
“이게 뭔 소리야 도대체…….”
표정 한번 볼만하다.
지금까지 내가 혁무진을 대상으로 걸었던 숱한 내기에서 모두 진다면, 불알이 서른 개쯤 달려 있어도 부족하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겠지.
“혹시 하나 떼서 심어 볼 생각 없냐. 혹시 나무가 자랄지도 모르잖아.”
“뭘요.”
“뭐겠어.”
내 시선을 따라간 혁무진이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그런 나무가 있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요.”
“그러니까 네가 최초가 되는 거지.”
“조장님께 양보하겠습니다.”
“됐고. 뭐 하느라 이제야 나타났냐?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수신룡이 쓰러진 직후 우리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 과정에서 청풍과 혁무진은 제갈풍을 따라갔으니 꼭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이다.
내 질문에 혁무진이 손에 들고 있던 그물을 흔들어 보였다.
“그건 뭐야?”
“물고기요. 계속 포획 중이었어요.”
“물고기?”
“예. 어제부터 계속 잡고 있는데, 쉽지가 않네요.”
어, 그래. 당연히 쉽지 않겠지. 물고기 잡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어.
물고기가 펄떡이는 그물과 혁무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우리 무진이가 낚시하느라 바빴구나.”
“장난 아니라니까요. 이놈들이 얼마나 난폭하고 힘이 좋은지, 진이 다 빠질 지경…….”
빡!
“억!”
“진이 빠지긴. 충심을 다해 보필해야 할 직속 상관은 내팽개쳐 놓고 와서 낚시나 즐기고 앉아 있어? 널 보는 내 진이 다 빠져!”
머리를 움켜쥔 채 뒷걸음질 치던 혁무진이 버럭 외쳤다.
“아,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이 자식이 어딜 함부로 목소리를 높여. 물고기 잡고 있었다며, 인마!”
“낚시가 아니라, 포획이요! 포획!”
“포획? 청 소협, 이 새끼 포획해!”
“앗! 네, 은인!”
주위를 얼쩡거리던 청풍이 잽싸게 달려와 혁무진을 붙들었다.
화산파의 신성이요, 검성의 진전을 이은 초절정 고수가 펼치는 금나수(擒拿手)를 버틸 리가 있나.
나는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혁무진을 내려다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내일 무림이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불알 나무를 심으리.”
“잠깐. 잠깐!”
“묻겠다. 왼쪽 불알이 네 불알이냐, 오른쪽 불알이 네 불알이냐.”
“둘 다 내 건데 뭔 개소립니까!”
“솔직한 녀석이군. 상으로 둘 다 떼 가도록 하겠다.”
“놔! 놓으라고! 이 미친놈들아!”
혁무진의 비명이 울려 퍼진 바로 그때였다.
취릭!
“양지바른 곳에 묻으면 무럭무럭 자라날…… 엇, 깜짝아.”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새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청풍의 품속에서 빛살처럼 뛰쳐나오자, 혁무진을 제압하고 있던 청풍이 즉각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미미야!”
“푸하!”
간신히 청풍의 제압에서 풀려난 혁무진이 바닥에 떨어트린 그물을 삿대질하며 외쳤다.
“포획! 낚시가 아니라 포획! 직접 보시라고요!”
결과적으로 보자면 혁무진의 외침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미미가 청풍의 품속에서 튀어나와 그물로 향한 그 순간부터, 내 시선은 이미 그쪽에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함과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산 넘어 산이군.’
취리릭! 콱!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물 틈새를 파고든 미미가 물고기의 아가미를 물어뜯는다.
‘저것’을 물고기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쿵! 푸드드득!
새빨간 핏빛으로 물든 눈.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에 성인 장정의 팔뚝보다 큰 몸뚱어리.
그리고 꼬리에는, 시벌. 저게 뭐야.
나는 눈을 의심하며 중얼거렸다.
“……가시?”
헉헉거리며 몸을 일으킨 혁무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귀 못 알아듣는 걸 보면 귀는 어두우신데, 눈은 좋으시네요.”
“미친. 뭔 놈의 물고기가 꼬리에 가시가 달렸어?”
“독문 병기인가 보죠.”
“……개소리할래?”
“아, 말씀드렸잖습니까. 낚시는 무슨 개뿔 같은 낚시. 포획이라니까요, 포획. 저런 놈을 어떻게 낚시로 잡아요?”
“허.”
포획. 다시 들어 보니 저런 놈을 잡기에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
뭐라 구시렁거리며 걸어간 혁무진이 떨어트린 그물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안 사실인데, 그물도 그냥 그물이 아니라 철과 쇠가 들어간 철망(鐵網)이다.
“그거, 도대체 뭐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놈들 이빨이 엄청 날카롭습니다. 어지간한 그물은 그냥 한번 깨물면 잘려 나가는 수준이라…….”
“아니, 철망 말고. 그 안에 든 놈들 뭐냐고.”
“아.”
철그럭!
철망을 찢을 듯이 거세게 몸부림치는 ‘그것’들을 바라본 혁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은 모두들 혈어(血魚)라고 부릅니다.”
“혈어?”
“예. 눈깔이 핏빛이라서요.”
혈어라, 섬뜩한 외관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나는 저 괴생명체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싶었다.
‘기감 발동.’
쏴아아아, 띠링.
나를 중심으로 뻗어간 [기감]의 물결이 놈들에게 닿자, 시스템 알림과 함께 커다란 몸뚱어리 위로 레벨 창이 떠올랐다.
[Lv.5 변이된 송사리]– 새로운 어류를 발견했습니다!
– [변이된 송사리]에 대한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아이템창
[변이된 송사리]종류 : 어류
등급 : 無
제한 : 無
설명 : 미약한 마력에 노출되어 탄생한 변이종. 몰라보게 강해진 데다 상당한 독성(毒性)을 띠고 있지만, 막상 요리하여 먹어 보면 맛있을지도.
“…….”
이게 송사리라고?
나는 어지간한 성인 장정의 팔뚝보다 큰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아는 송사리 어디 갔냐.
‘차라리 여기가 동정호가 아니라 아마존이라고 하지.’
우선 물고기 주제에 레벨이 5씩이나 되는 이 괴물이 송사리라는 것에 놀랐고, 존나 세고 독성이 있지만 맛있을 거라는 시스템창의 개소리에 두 번 놀랐다.
막상 먹어 보면 맛있을 거라니. 독이 있다잖아, 이 미친놈들아.
‘그건 그렇고, 역시 원인은 하나밖에 없겠지.’
이건 분명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마력으로 인한 변화가 틀림없다.
비록 수신룡이 제 한 몸을 희생하여 게이트의 마력을 대부분 흡수했다지만, 잔여물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불과 한 두시진 전 직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게이트는 제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미약한 마력을 흘리고 있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천하 곳곳으로 퍼져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감염이라도 된다면?’
사실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좆 되는 거지, 뭐.
동정호의 지류는 장강으로 이어져 있고, 장강은 광활한 자연 생태계와 수많은 이들이 오가는 해상 교통로다.
내가 뭐 환경단체 소속도 아니니 생태계 파괴는 둘째치고, 만약 감염 성분이 있어서 육지에까지 변이된 생물체가 넘쳐흐르면 그때는 끝장인 거다.
“……아, 돌아 버리겠네.”
“왜 그러십니까?”
“은인. 괜찮으세요?”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단호하게 대답한 나는 청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 소협. 이런 놈들이 얼마나 있어?”
“저는 이쪽에 투입되지 않아서 잘 몰라요. 그런데 미미가 좋아해요. 맛있나 봐요!”
어느새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혈어 한 마리를 꿀꺽 삼킨 미미를 향해, 청풍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을 흘려보냈다.
“많이 먹어, 미미!”
“……그래. 당신한테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그럼 무진아.”
“예. 현재까지 포획한 혈어의 숫자는 백여 마리쯤 되는데,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정상인의 존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나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제갈풍 대협도 알고 계시고?”
“그럼요. 혈어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입구 부분의 수로를 완전히 폐쇄하도록 지시를 내리신 분이 제갈 대협이십니다.”
“이미 빠져나간 혈어들은?”
“어, 일단은 거의 없는 것 같던데요.”
“뭐?”
[기억의 파편]을 통해 엿본 과거에 의하면, 게이트가 열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족히 한 달은 된 시점이다.지금까지도 게이트가 미약한 마력을 흘리고 있는 걸 봐서는 상당한 물고기들이 변이되었을 텐데…….
“확실해?”
“짐작이긴 한데, 이놈들이 서로 싸우고 있더라고요.”
“싸워?”
“워낙 흉폭해져서, 아군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서로 죽고 죽이고 있을걸요?”
“…….”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흉폭하다는 건 그만큼 위험하다는 건데, 일단 자기들끼리 전쟁이 벌어져서 개체 수를 줄이고 있으니 축하할 일은 맞다.
‘이건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진 공자님.”
등 뒤에서 들려온, 맑고 가증스러운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문경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찾으십니다.”
“바빠. 어른들 일하니까 기다려라.”
“……꼭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누가?”
살벌한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내가.
“……아.”
그럼 가야지.